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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규직의 확산과 탄압에 법원과 검찰은 어떻게 일조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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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윤지영 변호사

동양시멘트의 하청업체 소속 노동자들은 2014년 5월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동양시멘트 및 하청업체를 상대로 고용노동부에 위장도급/불법파견 진정을 넣었다. 고용노동부는 2015. 2. 13. 동양시멘트가 이들 하청업체 소속 노동자들의 사용자라고 판정했다. 그러자 그 즈음 동양시멘트는 하청업체와 맺은 도급계약을 해지했고 하청업체 소속 노동자들을 모두 해고했다(강원도지방노동위원회와 중앙노동위원회는 동양시멘트가 도급계약을 해지한 것이 부당해고라고 판정했다). 부당해고였기 때문에 근로관계는 여전히 유효했다. 그러나 동양시멘트는 이들 노동자들이 생산 현장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바리케이트를 치고 대신 일용직 노동자들을 고용했다. 노조는 현장 출입구 부근에 천막을 지고 농성을 벌였다. 그 대가는 처절했다.

검찰은 노동자들을 업무방해죄로 기소하였고, 법원은 업무방해죄의 유죄 판결을 내렸다. 심지어 노조위원장에게는 실형을 선고했다. 또한 사측이 제기한 손해배상청구의 소를 이유로 노동자들의 재산에 가압류 인용 결정을 내렸다. 동양시멘트, 정확하게는 동양시멘트가 만든 SPC는 노조와 조합원들을 상대로 50억 원의 손해배상청구의 소를 제기했다.

피고가 된 노조와 조합원들을 대리하여 소송을 진행하고 있다. 기록을 보면 볼수록 억울하고 참담하다. 현실에서는 누가 잘못했는지가 분명하다. 그런데도 법 앞에서 이들은 마냥 죄인이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일까.


정리해고가 법률에 명시되자 법원은 한술 더 뜨기 시작했다.



정리해고가 법에 도입된 것은 1997년이다. 그러나 정리해고는 법률에 명시되기 전부터 법원의 판결로 법리가 형성되어 있었다. 근로기준법은 정당한 사유가 없는 때에는 해고를 할 수 없다고 정하고 있었는데, 여기서 말하는 정당한 사유를 법원은 확대 해석한 것이다. 그리하여 긴박한 경영상 필요가 있는 때에는 해고할 수 있다는 판결들을 내놓았고, 이러한 판결들이 정리해고를 법률에 도입하는 데에 근거로 작용하였다.

그러나 정리해고가 법률에 명시되자 법원은 한술 더 뜨기 시작했다. 노동조합이 정리해고에 반대하는 파업을 실시하자 대법원은 "정리해고 등 기업의 구조조정의 실시 여부는 경영주체의 고도의 경영상 결단에 속하는 사항으로서 이는 원칙적으로 단체교섭의 대상이 될 수 없고, 노동조합이 실질적으로 그 실시 자체를 반대하기 위하여 쟁의행위에 나아간다면, 비록 그 실시로 인하여 근로자들의 지위나 근로조건의 변경이 필연적으로 수반된다고 하더라도 그 쟁의행위는 목적의 정당성을 인정할 수 없다"고 판결하였다. 그러면서 "경영권과 노동3권이 서로 충돌하는 경우 이를 조화시키는 한계를 설정함에 있어서는 기업의 경제상의 창의와 투자의욕을 훼손시키지 않고 오히려 이를 증진시키며 기업의 경쟁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해결책을 찾아야 함을 유의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기업이 쇠퇴하고 투자가 줄어들면 근로의 기회가 감소되고 실업이 증가하게 되는 반면, 기업이 잘 되고 새로운 투자가 일어나면 근로자의 지위도 향상되고 새로운 고용도 창출되어 결과적으로 기업과 근로자가 다 함께 승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실제 판결문에 이렇게 적혀 있다)며 현실을 빌미로 사측의 손을 들어줬다. 그러면서 노동조합의 쟁의행위를 빌미로 기업이 노조와 조합원들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가압류 신청을 하면 법원은 기업의 영업 손해 주장을 그대로 인정하면서 무차별적으로 손해배상 판결 및 가압류 결정을 하고 있는 현실이다.


법원은 정작 중요하게 여겨야 할 현실은 외면했는데, 대표적인 것이 특수고용이다.



그러나 법원은 정작 중요하게 여겨야 할 현실은 외면했는데, 대표적인 것이 특수고용이다. 근로기준법은 애초에 제조업, 공장 노동을 염두하고 만들어졌다. 한 곳에 모여 같은 시간에 직접적으로 사용자의 지휘 감독을 받으며 일하는 노동자들을 염두하였다. 그러나 기술이 발전하고 노동 형태가 다양해지면서 노동자들을 한 곳에 몰아넣지 않아도 사용자는 노동자들을 통제하고 감독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면서 회사는 사용자 책임을 지지 않기 위해 이들 노동자들을 개인 사업자로 둔갑시켰는데, 법원은 이러한 현실을 외면한 채 여전히 구시대적인 노동 형태에만 사로잡혀 노동자가 아니라고 판결하는 것이다. 특히 법원은 사용자가 얼마든지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요소들, 예컨대 취업규칙의 적용 배제, 4대 보험의 미적용, 사업소득세의 납부를 노동자성 판단의 중요한 요소로 삼고 있다. 이러한 현실과 판례의 괴리 때문에 차라리 특수고용 노동자들을 법상 근로자로 구체적으로 명시하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법원은 기간제노동자들의 현실도 외면하였다. 사용자는 상시 업무에 기간제노동자를 사용하면서 직군을 분리하여 정규직 노동자와 기간제노동자를 노골적으로 차별하고 있는데, 법원은 형식적으로만 차별 여부, 갱신기대권을 따진다. 최근 들어 갱신기대권에 관해 진일보한 판결이 등장한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간접고용노동자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제조업 불법 파견에 관해서는 원청의 직접 고용 책임을 인정하는 판례가 어느 정도 누적되었지만, 법원은 나머지 업종에서는 파견을 당연한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기업들이 쪼개기 계약을 스스럼없이 체결하는 데에는, 법망을 빠져 나가는 이러한 행태들에 대해 법원이 형식을 들이대며 눈감은 것에 큰 원인이 있다.


검찰은 사측의 노동법 위반 행위에는 솜방망이를 휘두르면서 노조의 쟁의행위는 특별히 공안부에 사건을 배당하고 가중 처벌하고 있다.



검찰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검찰은 사측의 노동법 위반 행위에는 솜방망이를 휘두르면서 노조의 쟁의행위는 특별히 공안부에 사건을 배당하고 가중 처벌하고 있다. 또한 사측이 노동자들에게 휘두르는 폭력,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한 기업의 법 위반 행태에 대해서는 사적 자치의 영역이라고 핑계를 대며 관망하면서, 그 반대의 저항에 대해서는 반사회적이고 안보에 위해되는 것으로 몰아세우고 있다. 불순세력, 진압의 대상으로만 노동자를 여기는 것처럼 말이다.

사법부가 사측에 유리한 입장에 서는 이유는 '기업의 경쟁력 = 국가 경쟁력', '기업에 대드는 자 = 위험분자'라는 검증되지 않은 안일한 인식이 팽배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는 어쩌면 법과 제도가 가지는 본질적인 특성인지도 모르겠다. 법과 제도는 기존의 질서를 옹호가 위한 수단으로서 존재하고, 권력과 자본은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편성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법원과 검찰은 법과 제도를 해석하고 집행하는 것을 사명으로 하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반(反) 노동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현실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법조인들의 노동권에 대한 지식과 인식이 미천하기 때문이다. '계약 자유의 원칙', '사적 자치의 원칙'에 기반한 민법적 사고에만 익숙한 이들에게 이들 원칙에 반하는 노동관계의 원칙은 생소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민법은 필수지만 노동법은 선택인 것이다.


반복된 학습을 통해, 기업은, 국가권력이 자본에 우호적이라는 것으로 알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법원과 검찰의 영향력은 점점 더 커지고 있다. 반복된 학습을 통해, 기업은, 국가권력이 자본에 우호적이라는 것으로 알게 되었다. 그러면서 걸핏하면 노조와 조합원들에게 손배가압류를 청구하고 업무방해죄로 조합원들을 고소한다. 사측의 비리를 폭로하면 명예훼손죄로 고소하고 위자료를 청구하는가 하면, 급기야 아시아나항공은 항공기내 청소 용역 노동자들에게 노동조합 이름에 아시아나 문구 사용을 금지하도록 소송을 냈다. 직접 손에 피를 묻힐 필요가 없다. 변호사를 대리인, 변호인으로 내세우면 그만이다. 법원과 검찰을 통해서 쉽게 원하는 결과를 얻게 되는 것이다. 노동자들도 마찬가지다. 노조의 힘이 줄어들고 쟁의행위가 위험천만한 수단이 되면서 노조와 노동자들은 직접 기업을 상대하기 보다는 법이라는 수단을 활용하려 한다. 직접 고용하라고 투쟁하는 대신 원청을 상대로 근로자지위확인의 소장을 접수하는 것이 보다 안전한 것이다. 물론 어쩔 수 없는 측면이 크다. 현장에서의 패배 경험이 쌓이게 되면 다른 방식, 즉 소송을 고려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법치주의가 점점 더 중요한 가치로 여겨지는 시대의 필연적인 결과일지도 모른다.

* 이 글은 공익인권법재단 공감의 블로그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