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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의 직무유기 | 김석범 강연을 듣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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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8일 오후에 제1회 이호철 통일로문학상 수상자인 김석범 작가 문학 심포지움에 다녀왔다. 사정이 생겨 작가의 기조강연만을 듣고 나왔지만, 유익했다. 강연주제는 '화산도와 나: 보편성으로 이르는 길'. 무엇보다 이제 만 92세인 노작가의 모습을 직접 보고, 육성 강연을 들은 것만으로도 감흥이 컸다. 나는 오늘 강연을 들으면서, 전에도 몇 번 말했지만 한국문학계가 이 작가에게 그동안 합당한 대우를 해주지 못했다는 생각이 다시 들었다.
 
비평가/독자로서 내 판단으로는, 아마도 해방 이후에 출간된 한국문학(일본어로 쓴 한국문학을 포함한)의 가장 중요한 업적 중 하나로 꼽힐 만한 걸작인 〈화산도〉는 한국의 유수하다는 문학출판사에서 출판되지도 못했다.(그에 대해 전해 들은 씁쓸한 뒷얘기도 있지만 굳이 적지 않겠다) 그리고 작품의 완역본이 몇 년 전 출간된 뒤에도 내가 알기로 주요문예지 어디에서도 제대로 된 평문으로 거의 다루지 않았다.(나도 소략한 문학평으로 계간 〈황해문화〉에서 다뤘을 뿐이다) 작가의 성취에 걸맞은 국내의 명망 있는 문학상을 수여하지도 않았다. 아마도 짐작컨대, 일본어로 쓴 김석범 문학은 '한국'문학에 포함시킬 수 없다는 판단이 작용했을 것이다.(그런 점에서 김석범 문학은 역설적으로 한국문학의 경계와 의미를 묻는 역할도 한다) 그런 문학계와 비평계의 홀대가 나로서는 이해가 안되고 마음 아프다. 이 노작가의 육성을 들으면서 그런 씁쓸함이 더 커졌다. 나를 포함한 한국의 비평계는 반성해야 한다. 비평의 직무유기다.
 
기조강연의 주요대목을 올려둔다. 하나하나가 우리시대의 작가나 비평가들이 새길 발언들이다. '조국'을 잃은 '디아스포라(이산)' 문학의 의미, 재일조선인문학과 일본문학의 관계(일본어로 조선을 쓸 수 있는가), 재일조선인문학과 한국문학의 관계(김석범 문학은 조선문학, 한국문학인가), 이념적 문제로 입국을 못해 작품의 현장 취재조차 하지 못하고 오직 기억과 상상력만으로 제주를 그려야 했던 고통, 민족어와 보편적 진실의 표현이 맺는 관계, 문학에서 정치성과 예술성의 관계(최근 다시 불거진 미당 논란과 관련해 여러 생각이 든다), 역사적 망각과 작품이 새기는 기록의 역할, 글쓰기의 고독 등.
 
노작가가 앞으로도 건강을 유지하셔서 남한도, 북한도 아닌, '조선'과 한반도의 굴곡진 역사를 강인하고, 깊이있게 다룬 작품을 더 많이 써주시길 독자/비평가로서 바란다. 우선은 〈화산도〉가 한국독자들에게 더 많이 읽히고, 더 깊이 논의되길 바란다.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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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체로 재일조선인 문학은 일본 문학의 품 안에서 자랐을 만큼 일본 문학의 주류 전통인 사소설-순문학의 영향이 자못 크며 그 아류이기도 하다. 그렇지 않으면 일본 문단에서 받아들여지기가 매우 어렵다. '일본 문학은 상위 문학' , '일본 문학의 일부분인 재일조선인 문학은 하위 문학'이라는, 이러한 문학개념은 일본 전후 사회에서 오랫동안 당연시되었고 상식이 되었다. 일제 지배 의식 잔재의 반영이다. 나는 재일조선인 문학은, 적어도 김석범 문학은 일본 문학이 아니라 '일본어 문학, 디아스포라 문학'이라는 주장을 오래 전부터 해 왔고, 이를테면 김석범 문학은 일본 문학계에서 이단의 문학이다. 그것은 한마디로 일본어로 쓰여졌다 해서 일본 문학이 아니다. 문학은 언어만으로 형성, 그 '국적' 에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일관되게 주장해 왔다.
 
- 나는 '화산도' 가 존재 그 자체로서 어딘가의 고장, 디아스포라로서 자리잡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화산도〉를 포함한 김석범 문학은 망명 문학의 성격을 띠는 것 이며, 내가 조국의 '남' 과 '북' 의 어느 한쪽 땅에서 살았으면 쓸 수 없었던 작품들이다. 원한의 땅, 조국 상실, 망국의 유랑민, 디아스포라의 존재, 그 삶의 터전인 일본이 아니었으면 〈화산도〉는 탄생하지 못했을 작품이다. 가혹한 역사의 아이러니!
   
- 일본어는 지배자의 언어, 제국의 언어입니다. 그리고 언어학적으로도 조선어와 비슷한 점이 많지만, 단어가 연쇄, 연속해서 말이 되고, 글이 됨으로써 그 언어의 독특한 힘, 기능을 가지게 되어, 일본어로 '조선' 을 표현할 적에 여러 언어적 갈등과 어려움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일본어로 조선을 쓸 수 있는가' . 어려운 문제입니다. 일본 문학계에서는 관심이 없을 뿐만 아니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일본어로 '조선' 을 쓰지 못한다면, 나는 소설 쓰기를 그만두어야 했습니다. 왜 ? 주로 조선, 고향 제주도에서의 미증유의 대학살 〈4.3〉을 테마로 글쓰기를 시작한 나에게 일본어로 조선을 테마로 글을 못 쓸 경우 글쓰기에서 물러나야만 했습니다.
 
- 한편으로 언어 문제뿐만 아니라 현지 제주도 취재를 위해 한번도 출입을 못하게 되어 설상가상으로 나는 궁지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사람을 만나서 이야기도 듣고, 고향의 아름다운 자연 환경 속에서 현지 답사로 견문도 넓히지 못한다면 듣지도 보지도 못하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작가로서의 기능 상실자, 작가가 아닌 사람이 될 수밖에- 작가가 아니면 사람 구실을 못하는 존재. 텅 빈 사람 모양만 한 존재. 여기서 나의 문학적 방법론이 제기됩니다. 하나는 일본어로 '조선'을 쓸 수 있는가, 한마디로 일본어를 갖고 〈화산도〉를 쓸 수 있는가. 일본어란 서로 다른 개별어로 '조선' 이란 개별적 외피를 입힌 그 본질, 보편성의 가교, 통로로 만들 수 있는가.
 
- 지금도 후유증이 남아 있으나, 제주도민은 오랜 군사독재 정권의 탄압 하에서 기억 상실자, 말도 못 하고 듣지도 못하고 눈을 떠서 봐서도 안 되는 인격 상실의 허수아비 신세였던 것입니다. 이제 정말 세상이 바뀐 것입니다. 고맙기 짝이 없도록...
 
- 도대체 〈4.3〉이 일본 문단, 독자들과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일본뿐만 아니라 재일동포들도 외면해 온 〈4.3〉. 나는 고립지구(孤立持久), 홀로 서 있음을 오래 지탱하면서 비타협의 인생을 보내온 셈입니다. 〈화산도〉는 단지 주어진 일본어로 쓰인 소설이 아니라 '민족어'로서의 구속에서 이미지가 형성되는 허구 세계에로의 비약과 동시에 변질시키는 상상력의 힘 그리고 소여의 사실에의 의거가 아니라 없어진 역사를 허구, 소설로 재생하는 상상력에 의해 산출된 작품입니다.
 
- 바로 보편성에 이르는 것인데 ,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요인, 힘이 바로 상상력입니다. 디아스포라인 나의 문학적 자유(인간 존재의 자유)를 얻기 위한 무기(방법론)가 바로 상상력에 의한 소설(허구) 공간의 구축이었습니다. 내 언어론에서 상상력이 주는 역할이 절대적이지만 그것은 언어론만이 아닙니다. 제주도를 테마로 소설을 쓰는데 오래 살아보지 못한 낯선 현지에 가서 취재든 답사를 못 한다는 것이 가장 괴로웠습니다. 더구나 일본 근현대 문학의 사소설, 순수문학이 주류이자 권위인 일본 문단, 문학계의 흐름을 따르지 못 하는 것은(외면하는 것은) 치명적인 일이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일본 땅에서 제주도를 테마로 꼭 소설을 써야 한다면 직접 현지에 가 보는 것, 아니면 소설 쓰기를 포기할 것인가, 차마 그건 못 할 일. 현지에 못 가도 소설을 써야 한다. 결론이 없는 결론, 자가동착의 모순을 풀어 나가는 길, 힘이 상상력이었습니다. 상상력에 의해 실제로는 못 가봐도 허구의 세계에서 작가와 제주도가 교신하는 길. 상상력.
 
- 소설은 세계를 전체적으로 보며 소여의 현실과 대치해 길항해야 하며, 레지스탕스 문학, 저항문학으로서 정치적으로 바뀌는 것이 문학의 속성입니다. 나는 그 길을 걸어 왔으며 소위 순수문학을 일컫는 사소설을 부정하지는 아니하더라도 내가 택할 길은 아니었습니다(우물 파듯이 자기 내면을 깊이 파고 들면 보편성에 달하기도 합니다). 현실과의 길항 없이 체제 순응을 하다 보면 마침내 그 소설은 현실에 흡수되어 사라지고 마는 경우가 많습니다.
 
- 일찍이 프롤레타리아 문학은 계급주의 사상이 앞서서 예술성을 훼손, 교조적 프로파간다가 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나의 위는 문학의 불가사리며 강한 정치적 테마도 문학으로 녹여버릴 힘이 있다"며 자주 농담삼아 이야기하는데 나의 문학 활동은 테마가 테마인 만큼 항상 정치성이 따라 다닙니다. 문학의 문학성, 예술성은 상실, 정치적인 작품으로 전락하는 것을 막아 정치를 녹여서 문학의 자양분으로 섭취, 더욱 문학성이 강한 작품을 산출하고자 하는 것이 문화적 자세이며 바로 나의 작품의 집대성인 〈화산도〉는 그것의 구현물입니다. 정치성을 극복, 소화해서 예술로 승화시키는 일이 진짜 예술지상주의가 아닌가도 생각합니다.
 
- 과거는 사라지고 없어지나 강제로 없앨 수도 없습니다. 반세기, 영구 동토 속에서 얼어붙었던 한 없이 죽음에 접어드는 망각과 기억. 권력자는 학살을 망각 속에서 땅 속 깊이 처박아 없애려고 했으나 긴 긴, 기나긴 세월이었지만 반세기만에 지상으로 되살아 난 것입니다. 해방 공간의 역사, 은폐하고 왜곡된 역사. 5년간 신탁 통치를 폐기하고 이승만 단독정부 수립 과정이 올바른 역사였던가를 밝히는 〈4 3〉의 역사 바로 세우기는 불가분의 역사적 과업입니다. 이 지나간 역사는 지금 산 자인 우리들 속에 살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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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필자의 페이스북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