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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시 | 미당 시가 아름답다면 그 근거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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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유학가기전에 대학(원)시절에 배운 교수들은 대부분 신비평(New Criticism)의 훈련을 받은 분들이었다. 여기서 무슨 비평이론 강의를 할 수는 없지만, 신비평의 핵심주장은 둘이다. 첫째, 작품은 작품자체로서만 내재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작품 외의 모든 것은 비평의 대상이 아니다. 그 대상에는 작가, 역사, 사회, 독자, 맥락 등이 포함된다. 이들은 배제된다. 이글턴의 표현에 따르면, 신비평은 일종의 작품물신주의다. 오직 작품, 텍스트만이 중요하다. 둘째, 작품의 의미는 내재적으로 작품 안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므로 독자/비평가는 그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작품을 꼼꼼하게 읽어야 한다. 이른바 '세밀한 읽기'(close reading)의 비평. 나도 그렇게 작품을 읽는 법을 훈련받았다. 그 훈련에서 얻은 바도 적지 않다.신비평이 득세했던 영국이나 미국에서 신비평의 영향력은 대개 1950년대로 끝났다고 본다. 그리고 1960년대 전세계적인 반체제운동의 물결 속에서 다양한 비평이론들이 등장한다. 내가 주로 가르치는 비평이론들은 신비평 이후의 이들 이론들이다. 신비평의 시대는 끝났다.
  
그런데 최근의 미당 시 논란을 보면서, 문득 한국 문단, 비평계에는 여전히 이런 케케묵은 신비평적 관점이 득세하는 것처럼 보인다. 특히 일부 '원로' 비평가들을 중심으로. 기이한 느낌을 받는다. 한편으로 나름대로 이해는 된다. 위에 적었듯이, 그들 세대의 교수나 비평가들은 그렇게 신비평적인 독법의 훈련을 받은 분들이니까. 문제는 이런 신비평적 태도,특히 작품과 작가를 철저히 분리해 사고하는 태도가 일반 독서대중에게도 광범위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단순하게 표현하면, 작가의 삶은 비록 졸렬할 수 있지만, 작품은 그렇지 않고 매우 뛰어날 수 있다는 관점. 내 페북에도 그런 댓글이 꽤 올라온다.
  
물론 작가의 삶은 그의 작품과는 구분해야 한다. 영국의 소설가 D.H. 로런스가 말했듯이, 작가를 믿지 말고 작품을 믿으라는 유명한 언명도 있다. 나도 그 언명에 동의한다. 요는, 삶과 작품의 관계이다. 그 둘을 분리하는 신비평적 관점은 폐기된 지 오래다. 훨씬 많은 부연설명과 논증이 필요하지만, 내 입장은 이렇다. 삶의 치열성이 없으면 그런 작품도 없다는 것. 오해 말기를. 삶의 치열성이란 고매한, 죄 없는 도덕군자의 삶을 말하는 게 아니다. 혹은 정치적으로 전위적인 이념의 문제도 아니다. 내가 아는 어떤 위대한 작가나 시인 중에 도덕군자는 없다. 혹은 그들 모두가 소위 정치적으로 진보도 아니었다. 그들 중 어떤 이들은 당대의 기준으로 볼 때는 심지어 반도덕주의자들이었다. 역시 오해 없기를. 이때의 반도덕주의는 당대의 도덕관에도 미치지 못했다는 뜻이 아니라, 그것과 충돌하고 넘어섰다는 것이다. 문학예술에서 결핍은 미덕이 될 수 없다. 과잉만이 미덕이 된다.
 
예컨대 한 여자를 평생 동안 사랑해서 그녀에게 구애, 혹은 '스토킹'했고, 심지어는 미련을 버리지 못해 그녀의 딸에게까지 구애했던,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시인 중 한 명인 아일랜드 시인 W.B. 예이츠의 개인사가 좋은 예다. 그의 사적 삶은 도덕군자의 삶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예이츠의 삶과 문학이 보여주는 대로, 그들은 자기만의 방식대로 자신의 시대를 치열하게, 사유하면서 살았다. 예이츠의 사적 삶이 문제가 아니라, 그가 정치적,사회적, 역사적 존재로서 살았던 삶이 문제다. 총체로서의 삶의 면모가 문제다. 거기에는 특히 반식민운동에 관계했던 예이츠의 삶과 사유가 크게 작용한다.(최근 예이츠 연구의 핵심주제다. 다른 맥락에서 각각 영국/일본 식민주의 경험을 했던 예이츠와 미당을 비교해보는 것도 흥미로운 주제다) 그리고 그 삶이 작품에 표현된 견해와 사유가 문제다. 현상학적 비평이 이미 예리하게 밝혔듯이, 비평의 대상은 사적 존재로서의 작가/시인의 견해나 인격이 아니라, 작품에 표현된 정신, 마음, 사유다. 내가 아는 문학사의 뛰어난 작가/시인들은 그들 시대의 핵심 과제나 모순을 회피하거나 도망가거나 물러서거나 미사여구로 포장하지 않았다. 그게 치열함이고 정직성이다. 여기서 정치적으로 보수냐, 진보냐는 큰 문제가 못된다. 치열함의 강렬도만이 문제다. 자기 시대의 문제에 얼마나 정면으로 맞섰는가, 그게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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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말해 졸렬한 삶에서 뛰어난 작품은 못나온다는 것. 물론 삶과 글쓰기 사이에는 수많은 매개변수가 있으며, 그 변수들을 세심하게 고려해야 한다. 위대한 삶에서 반드시 위대한 문학이 나오는 건 아니다. 세상사가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다. 문학의 수련은 단지 삶의 경험만이 아니라 오랜 기간의 훈련, 특히 언어와 사유의 훈련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졸렬한 삶에서 위대한 문학이 나오는 법도 또한 없다.(물론 듣기에 따라서는 도발적인 이런 주장은 많은 부연설명을 요구한다) 그런 경우가 있다면 알려주시라. 내 판단으로는 미당은 그런 예가 될 수 없다.

내가 되풀이해서 미당의 삶은 비록 치욕스러웠지만, 그의 시가 아름답고 뛰어나다고 옹호하는 이들에게 그런 주장의 구체적 근거를 요구하는 이유다. 어떤 점에서 미당 시는 빼어나며, 한국 시의 역사에서 일종의 전범이 될 수 있는가. 그의 시가 아름답다면 그 아름다움의 근거는 무엇인가. 그의 삶과 시의 관계는 무엇인가. 내가 임우기 평론가의 오래전 글인 '미당 시에 대하여'를 재론한 이유다. 임우기는 왜 미당 시가 (그의 굴곡진 삶과 연결된) 시 자체로서도 아름답지 않은지, 어떤 문제가 있는지를 그만의 독법으로 치밀하게 분석한다. 삶과 시의 관계를 해명한다. 지금의 나로서는 임우기의 분석에 동의한다는 말로, 내 입장을 우선 밝혀둔다. 하나만 덧붙인다. 아름다운 글이나 시는 미사여구나 미문으로 장식된 글이 아니다. 다루는 대상과 사안의 핵심을 꿰뚫는 정확한 글이다. 아름다운 글은 정확한 글이다. 통찰의 글이다. 그리고 정확함과 통찰은 언제나 깊은 사유와 지성을 요구한다. 묻는다. 미당의 시가 과연 그런가?
  
그러므로 비평의 과제는 작가와 작품을 안이하게 분리해서 사유하는 게 아니라, 그 삶과 사유의 관계, 그 관계 사이에 존재하는 수많은 매개변수들의 역할을 구체적으로 분석하면서, 그 관계의 의미를 해명하는 것이다. 삶과 글쓰기의 관계를 다시 사유하는 것이다. 미당 시도 마찬가지다. 그런 글이 나오길 기대한다. 물론 나도 가능하다면 그런 글을 언젠가 써보도록 할 것이다.
 
끝으로 나는 미당문학상의 기존 수상자들의 판단과 수상을 존중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미당(과 친일/친독재의 행태를 보인 작가나 시인들)을 기리는 문학상은 폐지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이런 요구는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라, 문학적인, 미학적인 이유 때문이다. 이 문제에 대해 더 많은 논의가 비평과 읽기의 공론장에서 이뤄지길 바란다.

* 이 글은 필자의 페이스북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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