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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당(시)에 대하여 | 참된 아름다움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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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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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에 임우기 평론집 〈그늘에 대하여〉(1996)를 읽고 이렇게 적었다.


 

영화판에서 쓰는 말로 '저주받은 걸작'이란 표현이 있다. 문학에도 그런 작품이 있다. 드물지만 그런 비평집도 있다. 문단에서 힘을 행사하는 '문중'에 속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저주받고 무시된 비평집. 내 판단으로는, 임우기의 〈그늘에 대하여〉가 그런 책이다. 특히 세 개의 글이 눈길을 끈다. 이른바 4.19세대 비평가, 작가들의 근대주의적 문체의 문제점을 날카롭게 밝혀낸 글 한 편. 문체론이 드문 비평계에서 눈길을 끈다. 이 비평집을 찾아 읽게 만든 글이다. 또 하나는 김지하의 시 '쉰'에 대한 정밀한 분석을 보여주는 글. 이 글은 '신비평'적이라고 폄하해버리는 세밀한 읽기가 어떻게 시 한편의 정밀한 분석을 넘어 작가의 의식, 그의 고통, 그리고 읽는 비평가 자신의 성찰로 이어지는가를 증거한다. 세번째는 미당 서정주 시(학)의 문제점을 분석한 글. 시인이 지닌 정치의식의 부재만이 문제가 아니라 미당의 빈곤한 정치의식이 어떻게 그의 화려한 언어 수사에 연결되는가를 정치하게 분석한다. 그것 말고도 마지막의 백무산에 대한 글이 조금 쳐지는 것 말고는 다 좋다. 정독을 하게 만든다. 독자에게 다시 읽고 싶은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좋은 비평은 좋은 작품과 마찬가지로 독자에게 어떤 감흥을 준다. 이 비평집은 '90년대 한국 문학계가 거둔 가장 탁월한 성취 중 하나이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다시 읽어도 이 평론집은 뛰어나다. 임평론가가 그뒤에 낸 평론집을 살펴봤지만, 〈그늘에 대하여〉에 못 미친다. 일종의 다른 편향이 보인다. 〈그늘에 대하여〉에도 다소간 그런 점이 엿보이지만, 서구편향에 대한 비판이 역으로 동양적인 것, 혹은 '우리만의 고유한 것'의 강한 편향으로 나타난다. 강하게 말하면, 일종의 문화적 국수주의다. 문화/문학에 '우리 것'만은 없다. 우리만의 고유한 '전통'도 없다. '국학' 연구자들이 조심할 점이다. 필요한 것은 '저들'의 것과 '우리'의 것이 만나고, 충돌하고, 뒤섞이면서 새로운 무엇을 생성하는 부분, 예전 어느 평론가가 임화에 대해 쓴 글의 제목을 빌리면, '이식과 창조의 변증법'만이 문제다. 문화적 사대주의도 문제지만, 문화적 국수주의는 그보다 더 문제다.
 
〈그늘에 대하여〉에 실린 '미당시에 대하여'는 미당시의 아름다움이나 뛰어남을 당연한 것, 건드릴 수 없는 것(untouchable)으로 전제하고, 그것과 미당 개인의 '인격적인' 결함이나 정치적 오류를 분리하는 태도를 비판한다. 미당시를 옹호하는 오랜 주장은 이 기사의 제목과 같은 태도다. "정치는 짧고 예술은 길다." 이 기사에 언급된 비평가들이나 연구자들이 볼 때 미당의 시는 "길게" 지속될 아름다움을 지녔다. 그러니 미당의 "정치"적 오류는 눈감아야 한다. 그래서 이런 동의할 수 없는 비유를 든다. "큰 잔디밭에 잡초 서너 포기 있다고 잔디를 다 뒤집는 일은 있어서는 안된다. 개인적으로 문학이 어떤 사람의 삶과 100% 분리된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하지만 그래도 인간은 굉장히 복잡한 존재라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그럴싸해 보이지만, 동의할 수 없는 비유다. 미당시가 "큰 잔디밭"인지도 의문이고, 그의 정치적 오류가 "잡초 서너 포기"에 불과한지도 의문이다. 그런데 이들은 미당시의 문학적 성취는 마치 건드릴 수 없는 진리인 것처럼 간주한다. 그런가? 문학사에 영구불변한 고전이나 걸작은 없다. 문학사는 재평가의 전쟁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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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문제는 미당시의 예술성이 뛰어나다고 주장하는 근거다. 임우기는 묻는다. 미당시는 정말 시 자체로서만 판단하더라도 뛰어난가. 아름다운가. 아름답다는 것의 기준은 무엇인가. 신영복 선생은 어느 글에선가, '아름다움' 어원은 '앎'이라고 적었다. 아름다움은 '앎/알음'다움과 관련된다. 아름다움은 곧 제대로 아는 것이다. 그 대상에는 앎의 주체와 대상이 모두 포함된다. 아름다움은 곧 자신과 세계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파악의 깊이다. 빈약한 사유를 가리는 미사여구를 구사하는 것, 기발한 표현과 문장을 창안하는 것, 독특한 비유법과 상징법을 사용하는 것이 아름다움의 몸체가 아니다. 물론 그런 것들도 포함된다. 말을 갖고 노는 재주는 시의 중요한 구성요소다. 그러나 이런 '언어적 장치'들은 아름다움의 곁가지다. 아름다움은 곧 깊은 앎의 문제다. 미당시는 그런 아름다움에 이르는가. 그렇지 못하다. 나는 한국문학의 큰 공백으로 (문학적) 지성의 빈곤을 지적해왔는데, 미당시도 예외는 아니다. 참된 아름다움은 깊은 지성의 다른 표현이다.(여기서 진-선-미의 미학적 관계를 논하지는 않겠다)
 
나는 시 전공자가 아니고, 한국문학사에서 미당이 차지하는 위치를 정확히 평가할 위치도 아니다. 다만, 한국현대시 연구자/비평가가 아니면 '입 다물라'는 식의 주장에는 동의할 수 없다. 미당이든, 누구든, 친일문학에 포함되는 작가/시인이든 그렇지 않은 작가/시인이든, 모든 작가들은 읽기의 공론장, 비평의 공론장에서 재평가되고 그 예술적 성취를 다시 논해야 한다. 내 전공인 영문학사를 봐도 그렇다. 전문연구자의 판단은 존중해야 하지만, 그 판단에 대해 다른 (전공의) 연구자, 비평가, 독자들도 당연히 문제를 제기할 수 있고 제기해야 한다. 그게 건강한 비평 장의 모습이다.
 
참고로, 나는 친일작가/시인들을 기리는 문학상은 폐지해야 한다고 판단한다.(여기서 '친일'의 기준에 대해서는 논하지 않겠다. 이미 많이 논의된 것이다) 물론 그들의 문학적 공과를 재론하는 것은 또 따로 할 일이다. 하지만, 일종의 문학적 '모델' 역할을 하는 문학상을 세우면서 친일행적이 명백히 입증된 작가/시인들을 기리는 문학상을 제정하는 건 중요한 문제다. 이 문제를 단지 '문학적'인 쟁점으로만 간주하는 건 타당하지 않다. 세상사에는 좁은 의미의 '문학'보다 더 중요한 일들이 많다. 정치적인 판단을 떠나서 심미안에 거슬린다. 이 기사에서 언급된 이들이 모르는 건, 문학사에서 예술성과 정치적 태도는 그렇게 쉽게 나뉠 수 없다는 것이다. 현대비평이론에서는 이미 철지난, 케케묵은 (신비평적 독법에 근거한) 작품물신주의의 방패를 들고 미당 같은 친일시인을 옹호하는 건 궁색하다. 차라리 이렇게 해달라. 지금 읽어도 어떤 점에서 미당시는 아름다운지, 어떤 시적 깊이와 삶에 대한 통찰을 여전히 보여주는지를 차근차근하게, 구체적으로 밝혀달라. 그런 비평적 논증이 설득력이 있다면,나도 미당에 대한 부정적인 판단을 철회하겠다. 논란이 되는 다른 '친일작가들'도 마찬가지다. 나도 '아름다운' 시, 참된 앎/알음을 보여주는 시를 좋아한다.
 
다만, 이런 얘기는 하지 말라. 위에 적은 까칠한 말들은, 작품의 예술성을 무시하는 독단적이고 폭력적인 주장이라든지, 작품을 '세심하게'(sic!) 읽지 못하는 거친 비판이라든지, 예술성과 정치적 태도는 별개라든지 하는 말들. 진부한 반론이다. 현대비평이론에서는 이미 논박된 해묵은 주장에 불과하다. 철지난 논리를 들먹이지 말라. 임우기의 '미당시에 대하여'를 다시 읽어볼 것을 권한다. 몇 대목을 옮겨둔다. 미당 시의 가치를 다시 논하는 연구와 비평들이 더 많이 나오길 바란다. 생산적인 논쟁이 필요한 건 비평계만이 아니라 한국(현대)문학사도 마찬가지다. 외국문학연구자/비평가로서 하는 당부다.
 


 

- 그러나 이 시점에 와서 곰곰 생각해볼 것은 미당 시를 오늘에 와서 새삼스러이 찬양해야하는 한국 문학의 내적 필요성은 무엇일까라는 의문이다.(212면)
 
-많은 평자들은 미당 시에서 삼세인연설과 윤회설을 읽고 있다. 그리고 미당의 불교적 깊이와 시어의 매혹을 논한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 생명세계의 나날의 일상에 몸담고 살아가는 속인들에게 인연과 윤회가 무엇이여 그런 것이 있다거니 그런 것이 없다거니 하는 것은 엄밀히 말해서 말장난에 불과한 것이다[...]해탈은 하늘에서 부여하는 것이 아니다. 고통스러운 속세에 몸을 대고 있는 사람들에게 해탈은 그저 가능성으로 남는 것이다. 그래서 나날의 삶의 고생 속에서 해탈의 길을 찾는 사람들에게 미당 식의 불교 사상이나, 그 매혹적인 시어는, '매혹적'이지만, 지극히 비현실적인 세계로 비칠 수가 얼마든지 있다.(213)
 
 - 시는 시인의 생명활동의 구체적 산물이다[...]미당은 불교 정신의 드높은 세계를 설파하지만, 그 드높은 세계가 얼마나 구체적 현실의 삶을 무시한 것인지를 미당 시의 여백은 스스로 증명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미당 시는 시의 의미 내용상 세속과 역사를 외면한다는 뜻에서만이 비판이 될 것이 아니다. 세속적 삶의 역사에 대한 외면의 태도는 미당의 시학 구성 원리 자체에 깊이 간섭하고 있으며, 그런 시적 태도는 미당의 불교적 세계관 속에 이미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미당 시는 그 시학 자체로서 미당의 삶에 대한 태도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214-215)
 
- 이 시에서 음악은 없다고 말하는 것이 적절하다. 있다면, 미미할 정도이다. 오히려 시를 모방한 산문이라는 편이 옳다. 시에서의 음악이란 단순히 음의 길고 짧음, 음의 끊고 이음이 아니라, 음악성 그 자체가 감정과 의미와 사상을 표현하고 확장하는 울림이요 떨림이며 흐름이다. 미당 시의 대부분의 경우 율격이 스스로 새로운 의미 공간을 열어놓거나 생산해내는 경우는 드물다. (218)
 
- 미당 시의 7·5조가 형식만 차용했을 뿐, 음악성을 잃고 사실상 산문성을 보여주는 데에 그치고 있는 것은 다름아닌 음악성에 대한 치열한 의식의 결핍을 고백하고 있는 대목이다. 미당의 가장 아름다운 시편 가운데 하나로 널리 알려진 『귀촉도』도 그 아름다운 언어에 대한 탐닉과 언어 세공이 시의 주요 형식이 되고 있을 뿐, 7·5조 율격과 음보의 음악성은 형식적인 장식에 지나지 않는다. (222)
 
- 이 시(『귀촉도』)의 주된 율격인 7·5조 와 3음보 또는 4음보는 시 내용상의 미당 철학과 상호작용하여 의미론적 상승·확산에 이바지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헛돌고 있거나 율격의 정형화된 장식으로 떨어지고 있는 것이다[...]7·5조 와 3음보 또는 4음보의 음악성이란 산문을 그냥 행갈이하고 토막내기 위해 차용된 옛스런 음악형식이지, 그 자체가 삶의 구체적 과정을 뜨겁게 통과함으로써 일어나는 신명으로서의 음악성은 아닌 것이다. (224)
 
- 근본적으로 시인의 세속적 삶의 진지한 연마의 결과인 신명이 부재하는 사실과, 주로 단조로운 율격의 형식적 변용, 의성성과 표음성과 같은 음성적 미에 탐닉하는 시어에의 집착 등 미당의 시적 태도는 미당의 탐미적 시의식을 보여주는 것인 동시에, 삶의 차원에서 얘기한다면, 세속적·역사적 삶의 치열성이 결여된 시의식의 한 표현이라고도 말할 수가 있다.(225)
 
- 미당이 신라 불교를 시로 얘기할 때, 풍류 정신에 대해, 화랑도에 대해 얘기할 때, 불교의, 신선의 높은 경지는 얘기될지언정, 그 훌륭한 전통 정신들이 미당이 살아온 당대 민족의 고난의 삶 속에서, 세속계의 민중들이 겪는 일상적 고통의 삶 속에서 어떤 뜻을 지니는가라는 '괴로운'핵심적 질문은 실종되어 있다. (234)
 
- 그 미당 시어의 아름다움은 삶의 어떤 사회적 혹은 역사적 경험의 세계와 살아있는 관련을 포기하고 있다. 그 음향적 아름다움은 세속적 삶에 대한 진지한 자세에서 나온 신명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언어의 세공과 공작을 통한, 잘 닦여진 고풍의 사물과 같은 아름다움으로 느껴질 때가 많다. (238)
 
- 회귀: 회귀 욕망은 일종의 절대에 대한 욕망이다. 또한 절대성에 대한 욕망은 현실적 삶에 대한 성찰을 동반하지 못 할 때 일종의 숭배로 기운다[...]미당의 '회귀'의 시 세계는 '영원성'으로 돌아간 해탈의 경지를 누리고 있는지도 모르겠으나, 중생적 삶의 아픔과는 거리가 먼 안주의 세계이다(249-250)


* 이 글은 필자의 페이스북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