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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 캔 스피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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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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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 말할 수 없는 사람이 있을까? '말'의 범위를 음성언어로 한정시키지 않고 표정이나 몸짓까지 다 포함시킨다면, 말할 수 없는 사람이란 거의 없을 것이다. 흔히 말할 수 없다고 표현되는 것은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다는 뜻이다. 스스로 말할 수 없다고 할 때조차도 다른 이들에게 통할 만한 말을 할 수 없다는 것이지, 그때도 어떤 '말'은 꼭 존재한다. 문제는 누가 들으려고 하느냐다.

영화 <아이 캔 스피크>는 말하기와 듣기의 이러한 관계를 잘 보여주는 영화다. 주인공 나옥분은 처음부터 '말이 많은 사람'이었다. '위안부 문제'에 관한 것은 아니었지만, 매일같이 구청을 찾아가 민원을 넣는 그의 모습은 침묵과는 거리가 멀다. 문제는 그때 그의 말을 듣는 이가 없었다는 것이다. '위안부'로서의 경험을 증언할 때와 마찬가지로 그는 계속 정의 실현을 호소했지만, 그 말들은 기계적으로 '접수'되었을 뿐 말로 취급되지 않았으며, 심지어 그가 제출한 자료들이 파쇄되기까지 한다. '침묵'은 이렇게 만들어진다.

이 영화는 어떤 의미에서 한국 사회를 아주 리얼하게 그려냈다. 구청 공무원들에게 늘 기피 대상이었던 '도깨비 할매'가 '위안부' 생존자였다는 것이 알려지고 그가 미국에서 증언을 하는 데 어려움이 생기자 그 공무원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그가 증언할 수 있도록 돕는 장면은, 이 사회에서 '말할 권리'가 어디에 있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재개발 문제를 제기할 때는 귓등으로도 안 듣던 이들이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는 왜 이렇게 귀를 기울이는 것일까. 물론 '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어떤 활동을 시작하는 것이 나쁜 일일 리는 없다. 하지만 그것을 계기로 그들이 다른 민원인들의 말에도 진지하게 귀를 기울이게 되지 않는다면, 거기에 있는 것은 말들 사이에 세워진 위계뿐이다.

이런 문제를 보여주다가도 결국에는 얼버무렸기 때문에 이 영화의 서사가 재개발 문제로 시작되었는데도 그 문제는 어느새 증발하고 만다. 마지막에 등장하는 시장 모습은 아무 문제도 없었던 것처럼 평화롭기만 하지만, 실제 상황이었다면 이렇게 쉽게 재개발 문제가 해결되었을 리가 없다. '유능한' 공무원 박민재가 낸 아이디어대로 구청의 행정명령과 그에 대한 재개발 추진 세력의 불복 소송이라는 방식으로 재개발은 '무사히' 진행되었을 것이다. 나옥분이 기록한 자료들도 다 공무원들이 없애버려서 법적으로 재개발을 중단시킬 만한 '하자'도 없으니 말이다. 이런 상황이 벌어졌다면 박민재는 어떻게 책임을 졌을까? 이 영화가 단순히 일본을 비판하는 것을 넘어서 침묵을 강요했던 이들을 비판하기 위한 것이라면, 마지막에 그려져야 했던 것은 아베에 대한 욕이 아니라 재개발 문제에 대처하는 공무원들의 모습이다.

'재개발', '위안부', '구청'이라는 세 가지가 한데 모이면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작년 3월, 옥바라지골목 재개발 문제로 주민들과 함께 종로구청 주택과를 찾아갔었다. 거기서 주택과 과장은 내가 일본인임을 알자 '위안부 문제나 해결하라'고 소리쳤다. 이때 '위안부 문제'는 재개발 문제를 말하는 입을 막기 위한 '권위적' 도구였다. 당시 옥바라지골목의 역사에 대해서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던 종로구가 최근 일본대사관 앞에 있는 평화의 소녀상을 공공조형물로 지정해 소녀상 지킴이로 나섰다. 과연 그들은 달라진 것일까?

이 사회 속에는 수많은 '옥분들'이 존재하며 지금도 '사소한' 정의를 위해 끊임없이 목소리를 내고 있다. 지금 우리는 그것을 듣고 있을까?

*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