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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금지법과 촛불민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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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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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정부가 발표한 100대 국정과제에 차별금지법에 관한 내용이 들어가지 않았다. 지난 대선 때부터 당시 문재인 후보는 차별금지법에 대해 이미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으니 놀라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이 빠진 이유를 보니 우려가 된다. 이는 단순히 법 하나를 제정하느냐 마느냐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100대 과제를 선정한 국정기획자문위원회 관계자에 따르면, 선정 과정에서 차별금지법에 대한 논의는 이루어졌으나 "그 내용 중에 사회적 논쟁을 유발할 내용이 있어서" 빠졌다고 한다. 대선 당시에도 문재인 후보는 차별금지법을 적극적으로 추진할 생각이 없다는 입장을 보였지만, 그때는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는 과정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논리였다. 즉, 당장에 차별금지법을 제정할 생각은 없지만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는 과정은 필요하다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이번에 국정과제 선정에서는 사회적 합의 과정에서 반드시 필요한 사회적 논쟁을 유발한다는 것이 배제의 이유가 되었다. 결국 사회적 합의를 이룰 길 자체를 막아버린 셈이다. 정부가 내세우는 '촛불민주주의 실현'이 이것으로 가능할까?

촛불민주주의라는 표현은 촛불이라는 이미지를 통해 감성에 호소하는 방식의 말이라 그 뜻이 좀 불분명하지만, 그 핵심에는 광장에 모인 다종다양한 이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직접민주주의가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직접민주주의란 모두가 직접 정치적 주체가 된다는 것, 바꿔 말해 아무도 누군가를 대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아무도 다른 사람을 대변할 수 없기에 모두가 스스로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직접민주주의의 원점이다. 또 모두가 다르다는 데서 출발하기 때문에 합의 못지않게, 아니 어쩌면 합의 자체보다도 합의를 형성하는 과정을 중요시한다. 이 부분이 대의제 민주주의와 직접민주주의의 결정적인 차이다.

대의제 민주주의는 동일성의 논리를 그 핵심으로 삼는다. 한 명의 대통령이 국민 전체를 대표할 수 있다는 것도 '국민 전체의 의지'라는 것이 존재하고, 그것을 대통령의 의지와 같은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인데, 루소가 상정한 '일반의지'처럼 대의제라는 '무리수'를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국민'을 비롯한 어떤 동일성을 설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대의제 민주주의만을 민주주의로 생각하는 데 익숙해지다 보면 이 동일성이 민주주의의 바탕이라는 착각에 빠지기 쉽다. 마치 차이를 지우고 한목소리를 내는 것을 민주주의인 것처럼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합의 자체가 우선시되고 합의 형성 과정은 되도록 줄여야 할 일종의 '거래비용'으로 간주된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사회적 논쟁을 유발하는 사안이 기피 대상이 되는 것도 당연할지 모른다.

그런데 그런 동일성, 또는 '합의'를 손쉽게 이루기 위한 방법으로 한국 사회에서 오랫동안 사용된 것이 다름 아닌 차별과 혐오였다. 나치즘이 유대인을 그렇게 이용한 것처럼, 어떤 소수자를 배제하며 철저하게 차별하는 것을 통해서 나머지 이들에게 합의를 강요하는 것은 독재자들이 즐겨 쓰던 방법이다. 툭하면 '종북몰이'를 일삼던 박근혜 정권의 정치 방식도 바로 그런 것이었음을 우리는 생생하게 기억한다. 이런 '민주주의'를 거부하기 위해 나타난 것이 촛불이 아니던가.

차별금지법은 단순히 일부 사람들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한 법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역할을 해온 차별을 없애기 위한 법이다. 이런 법에 관한 사회적 논쟁을 일으키는 것이야말로 촛불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길이다.

*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