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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자유로움에 관하여 | 말분씨, 또는 버지니아에게 보내는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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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카테 칼럼]

헤카테 칼럼은, 여성주의 세미나팀인 <헤카테>가 페미디아와 협력을 통해 정기적으로 기고하는 칼럼입니다. 헤카테[Hecate]라는 이름은 '자신의 의지대로 행동하는 여자'라는 뜻의 그리스어 hekatē에서 유래했습니다.


미끄럼틀을 처음 보았을 때, 그 거대한 강철 구조물에 압도되었던 순간이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지금의 반 토막도 되지 않게 작던 시절, 미끄럼틀은 내게 너무나 크고 차가운 구조물이었습니다. 얇은 강판 위에 몸을 맡기고 위에서 아래로 떨어져 내린다는 것은, 계곡 사이에 위태로이 놓인 외나무다리를 건너는 것처럼 위험하며 감히 시도할 수 없는 행위로 느껴졌습니다. 때문에 또래 친구들이 미끄럼틀에 몸을 맡기고 자유롭게 몸의 하강을 즐길 때 나는 차마 거기에 끼지 못하고, 멀거니 떨어져 그 모습을 부러워하며, 무서워하며, 체험하지 못하는 그 하강의 느낌을 상상하며 홀로 서 있곤 했습니다.

아버지는 그런 내가 안쓰러웠나 봅니다. 미끄럼틀을 타지 못하고 근처에서 늘 서성이는 딸이 눈에 밟히셨던지, 비번이던 어느 날 아버지는 어린 딸을 데리고 집을 나섰습니다. 그 시절 나와 부모님이 살던 동네의 가장 높은 언덕에는 신축한 성당이 있었고, 성당에서 조금만 내려오면 늘 친구들과 어울려 놀던 놀이터가 넓게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하얗게 겁에 질린 나와 함께 미끄럼틀 위에 올라가셨습니다. 나는 아버지의 다리에 필사적으로 매달렸습니다. 그 까마득히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노라면 금방이라도 몸이 쏠려 아래로 떨어질 것만 같았습니다. 미끄럼틀 위에 앉아 하릴없이 얼어붙어있자 아버지는 지금 미끄럼틀 아래로 내려가지 못하면 앞으로도 계속 다른 친구들이 노는 모습을 바라만 봐야 한다며 달래셨습니다. 타 보고 싶지 않니? 생각보다 무섭지 않고 재미있을 거라며, 한번만 내려가 보면 분명 아무것도 아닌걸 알게 될 거라며, 지금은 다 기억나지 않는 희미한 말들로 아버지는 나를 달래셨습니다. 못하겠다고 아버지에게 어리광을 피워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당신께서는 자식들이 시도조차 하지 않고 '못 한다'는 말을 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버지는 나를 그 위에 혼자 두고 미끄럼틀 아래로 내려가셨습니다. 아래로 내려오면 아빠가 잡아주겠다며 기다리는 아버지를 바라보며 홀로 억겁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마침내 손을 놓았을 때, 무슨 용기로 그럴 수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미끄럼틀 타는 것을 성공하면 사주겠다고 약속하셨던 홈런볼 과자 때문인지, 여기서 포기하면 친구들과 어울려 미끄럼틀 타는 것과 영영 멀어져야 함을 어렴풋이 깨달았던 탓인지, 훈육의 결과인지 타고난 천성인지 모를 오기가 발동해서인지,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나는 몸에 잔뜩 들어가 있던 힘을 빼고 손을 놓기로 결정했습니다. 꼭 붙잡고 있던 미끄럼틀의 날개를 놓고 마침내 온 몸이 바람에 스칠 때, 마치 날아갈 듯이 몸이 아래로 흘러 내려갈 때, 해방감이 육체를 관통했습니다. 이것이 내게 있어 몸의 해방과 더불어 정신 또한 하나의 벽을 넘어선 최초의 체험입니다. 아래에서 아버지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당신께서 나를 붙잡아 주실 것이라는 믿음 또한 나의 작은 도전에 크게 기여했을 것입니다. 아버지께서는 모험에 성공하고 도착한 나를 들어 올리며 크게 한 바퀴 돌리셨습니다.

미끄럼틀은, 아버지의 말씀대로, 별 것 아니었습니다. 겨우 이런 것에 그토록 겁내했던 자신이 부끄러워 나는 어색하게 웃었습니다. 별것 아니지, 라는 아버지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며 또 타보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집으로 가는 길, 슈퍼에서 아버지께서 사주신 홈런볼의 맛, 입안에서 사르르 녹던 그 달콤함을 잊을 수 없습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어머니께 큰 소리로 자랑했습니다. 오늘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미끄럼틀을 타 보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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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말분씨, 안타깝게도 나는 미끄럼틀의 체험 이후에 자유로운 순간을 그리 많이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물론 몇 번의 자유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허나 몸과 정신이 함께 해방되는 경험을 진정한 자유라고 한다면, 그러한 자유로운 순간을 맞이하기 이전에 나는 내 몸을 옹송그리고 움츠려야만 하는 경험을 더 많이 해야 했습니다. 몸이 움츠러들 때마다 나의 정신도 축소되어야 했습니다. 내 몸이 '어떠한 성'의 성적 특질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아주 어린 시절부터 성적 특질을 가진 주체가 겪어야만 하는 특정한 사건들을 경험해야 했고,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채 모를 어린 시절부터 내 몸이 가진 위험한 속성에 대해 배워야만 했습니다. 낯선 사람이 과자를 주며 따라가자고 하면 절대 따라가선 안 된다, 모르는 사람이 신체의 중요한 부위를 보여 달라고 할 때 절대로 그래서는 안 된다는 엄마의 목소리와 어조는 나를 주눅 들게 했고 내 몸을 무서워하게 했습니다. 나의 몸은 내게 공포스러운 체험을 가져다줄 수 있는 어떤 것이었습니다. 내 몸은 내가 나 자신이 아닌 다른 무엇으로 변모하게 하는 껍질이었습니다. 이 껍질을 쓰고 살아가는 동안에는, 내가 원치 않는 끔찍한 체험을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엄마의 표정과, 목소리와, 눈빛에서 배워야만 했습니다. 미끄럼틀의 마법에서 미처 벗어나기도 전에, 더 많은 미끄럼틀의 마법을 경험하기도 전에.

여성의 몸은 이처럼 어린 시절부터 그들 스스로에게조차 두려움의 대상이 됩니다. 여성들은 채 철이 나기도 전에 TV화면에서, 영화에서, 음악에서, 그림에서, 그리고 모르는 남자 어른들의 시선이 머무는 우리 몸을 통해, 우리 육체의 '성적 특질'을 목도해야만 합니다. 누구에게도 보여주어선 안 된다고 교육받곤 하던 우리의 몸이, TV화면에서는 훤히 드러나고 왜곡되고 비틀어지고 있음을 깨달을 때, 어린 영혼의 혼란은 더욱 가중됩니다. 나의 어떠한 '성적 특질'로 인해 내 몸을 드러내서는 안 되지만, 사회가 바로 그 '성적 특질' 때문에 여성의 몸을 전시하는 것을 발견할 때, 우리는 우리 몸에 대한 수치심과 무력감을 동시에 느끼게 됩니다. 이 같은 이중적인 신호를 받으며 자란 여성의 몸이 사랑을 할 나이가 될 무렵 상대방에게 가지게 될 모순적인 감정은 더 설명할 것도 없겠지요. 몸의 주인으로서 사랑을 하고 싶은 욕구와 훈육된 강박관념 사이에서, 우리의 욕망이 순수한 우리 내면의 목소리인지, 오랫동안 주입받아 온 남성적 시선 속의 여성을 연기하는 것인지, 좀 더 시간을 두고 상대방을 알아가고 싶은 자연스러운 주저함인지, 주입된 도덕관념 때문에 죄책감에 시달리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져 여성들은 혼란에 빠져들게 됩니다. 소녀에서 성인여성이 된다는 것은 이처럼 성장과정 내내 오랫동안 손상되어 온 여성성과 직면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과정 속에서 뜻하지 않게 스스로를 대상화시켰다는 것을 깨닫고 나면 자신을 함부로 대했다는 자책감마저 가지게 됩니다. 그와 같은 원치 않는 경험들은 뜻한 바가 아니었는데도 말입니다.

대상화된 여성의 몸은 '가임기 여성'이라는 껍질을 뒤집어쓰면서 다시 한 번 사회와 힘겨루기하게 됩니다. 여성의 몸은 임신을 할 가능성이 있기에 함부로 술을 마셔도 안 되며, 담배를 피워서도 안 된다고 합니다. 임신과 출산을 겪지 않은 여성의 몸은 인구 재생산을 통한 사회적 기여를 아직 하지 않았기에 반항적이며 정복되어야 할 대상입니다. 나이가 찼는데도 남편을 맞이하지 않거나, 혹은 결혼을 하고서도 남편의 아이를 낳지 않는 여자는 배우자의 집안은 물론 그녀의 집안까지, 양가 모두에게 이기적이라는 비난을 받게 됩니다. 이 이기적인 여자라는 비난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참으로 기이합니다. 남성(남성중심적인 가정)은, 남성의 몸으로는 자손을 생산할 수 없기에 반드시 여성과 결혼하여 여성의 몸을 빌려 자손을 얻어야만 하는데, 이 '자손을 대신 생산해 주는 행위'를 하지 않는 여성이 이기적이라는 말인즉슨, 여성이 그녀 자신의 몸에 대한 통제권을 놓지 않는 것이 곧 이기적이라는 뜻이 됩니다. 남편 없이 자신의 자손을 얻기 위해 정자만을 제공받아 임신한 여성 또한 똑같이 이기적이라는 비난을 듣는 것을 보면(그 명분이 아버지 없이 살아가게 될 자식에게 무책임하다는 것인데, 사실 자녀양육에 대한 전적인 책임이 모성에게 있으며, 아버지가 경제적인 면을 책임지고 있는 것이 가부장적 사회의 자녀양육에 대한 기본 개념이라고 본다면, 그들이 주장하는 이 개념에 의거, 자녀양육과 경제적인 면을 모두 책임지는 양육자의 탄생이 어째서 이기적이라는 오명을 써야 하는 것인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가부장적 사회는 여성의 몸이 언젠가 남성(으로 대표되는 가부장적 가정)의 자손을 생산하는 장소가 되리라는 것을 당연시 여기고, 이 당연시 여겨지는 '진리'로부터 벗어나는 여성의 몸을 참을 수 없어 함을 알 수 있습니다. 가부장적 사회에서 여성은 영원히 아버지의 자식의 '대리모'입니다. 현대에 들어와 양육권에 관한 법률이 현저히 개선되기 이전까지 여성이 자식에 대한 권리를 거의 주장할 수 없었던 배경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결국 여성은 아이를 품고 낳는 과정에서는 '아버지의 자식에 대한 대리모'이며, 아이를 낳고 기르는 과정에서는 '아버지의 자식에 대한 유모'였을 뿐임을 알 수 있습니다. 모성은 '유모'가 아버지의 자식을 키우는 것에 충실하게끔, 그 노동력의 착취를 더욱 용이하게 하기 위해 '신화'가 되었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여성의 신체가, 미끄럼틀의 자유를 누리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몸과 정신의 한계를 극복하고 감히 성장하는 여성의 자유로운 신체가, 가부장적 사회의 재생산이라는 제1 목표 아래에서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입니까? 우리 몸은 그렇기에 가둬졌고, 길들여졌고, 억압되었습니다. 말분씨, 당신께서 일평생 자식을 낳아 기르고 소처럼 일하셨던 것처럼, 여성의 몸은 아버지의 자식을 낳고 키운 이후에야 재생산 도구로서의 역할에서 해방됩니다. 그러나 출산과 육아를 홀로 견뎌낸 여성의 몸은 이미 젊고 건강한 시절의 몸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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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여성의 몸에서 주체성을 박탈하고 철저히 가부장적 사회의 놀잇거리로 전락하게 하는 전략과 경로는 더욱 더 다양해 졌습니다. 자본주의와 결합한 가부장적 사회의 소비문화는 여성의 몸을 더욱 잘게, 더욱 세밀하게 쪼개서 판매하고 있으며 기묘하게 왜곡된 여성적 육체의 특질은 마치 공공재처럼 거리에서 시선이 닿는 곳마다 총천연색으로 내걸려 나부낍니다. 엉덩이와 가슴이 부각된 입간판, 전단지, 광고 화면 속 맥락 없이 비키니를 입은 소녀들, 예술, 개인적인 취향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소아성애적 포르노 이미지, 인터넷 포털 사이트 첫 화면마다 'S라인' '찰진' '아슬아슬한' '물오른' 이라는 단어와 함께 우리 몸이 전시되어 있는 세상. 성적인 욕망 그 자체를 문제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의 욕망을 건강하게 드러낼 수 있을 만큼 정신이 채 자라기도 전에, 너무나 어린 시절부터 너무나 오랜 시간동안 이처럼 여성의 몸을 유희거리로 삼는 가부장적 소비주의 문화에 길들여지고 있습니다.

여성의 몸이 주체성을 박탈당한다는 것은 인류의 절반이 그 존재의 완성을 추구하지 못하고 의미 없는 탄생과 죽음을 반복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의 몸과 정신은 결코 분리될 수 없으며, 우리는 몸의 자유를 통해 정신의 자유를 육체적으로 체험합니다. 몸이 구속당하고 억압당하는 주체는 결코 진정한 정신의 자유를 체험할 수 없습니다. 머릿속으로만 결단하는 것은 상상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우리 존재의 완전성을 추구하기 위해 몸의 자유를 체험하는 것은 인간 존재가 그 바탕을 물질로 하기에 필수적인 조건이며 그 자체가 성장의 과정입니다. 억압된 신체가 자유를 향한다는 것은 하나밖에 없는 팔로 수영을 하거나 두 다리를 묶은 채로 달려야 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물론, 장애가 곧 성장의 불가능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자유로운 신체에 비해 그렇지 못한 신체가 보다 많은 시간과 보다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겨우 그의 완전성을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으며 부인해서도 안 됩니다. 이는 어떠한 자기비하도 아니며, 여성적 주체가 처한 어려움을 사실 그대로 기술하는 것입니다.

현대 사회는 빠른 기술 발전을 토대로 합니다. 끊임없이 밀려드는 파편화된 육체의 이미지 속에서 우리 자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우리는 현실에서 눈을 돌리거나, 정신의 어딘가를 늘 얼마쯤 잠궈 두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날아드는 칼날정도는 마치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연기하며 견뎌내야 합니다. 여성이 인고의 세월 속에서 키워 내는 인생의 열매 대부분은 폄훼되거나 가로채입니다. 여성 대중들은 생의 대부분을, 어둠 속에서 홀로 나아갈 길 더듬고 미처 발견하지 못한 턱에 걸려 넘어지는 것을 반복하며 살아갑니다. 우리 중 많은 이들이 결국 그 과정 속에서 길을 잃고 침잠하는 생으로 삶을 마감하고 있습니다.

말분씨, 자유에 대해 말하고 싶지만 기실 여성의 자유에 대해 거의 모릅니다. 자유에 대해 쓰고 싶다고 생각했을 때 가장 괴롭고 힘들었던 것은, 자유로운 삶이 무엇인지 거의 모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토록 자유를 갈망함에도 불구하고 자유가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설명할 수 없다는 괴로움에 자신의 무능과 무력감을 절감해야 했습니다. 그런 이후에야 새삼 자유에 대해 알기 위하여 자유로워져야만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우리 몸을 위협함으로써 우리 정신을 구속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육체가 세상과 맞닿은 지점 어느 곳을 향할 때조차 위협에 맞서 움츠러들어야만 하는 숙명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도록, 여성들은 반드시 자유로워져야 하며, 자유에 대해 말해야 하며, 자유를 체험해야만 합니다. 인류의 절반이 자유롭지 못하다면 인류는 자유롭지 못합니다. 여성이 자유로워지는 순간이 인류가 자유로워지는 순간이며, 여성이 자유로워지는 순간이 비로소 인류에게 '문명'이 시작되는 순간이라고 단언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완전성을 향하는 걸음을 비로소 같은 출발선에서 시작할 때, 그때서야 비로소 우리는 자유로운 주체의 탄생에 대해 말할 수 있을 것이며, 새로운 상상력을 토대로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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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분씨, 제가 미끄럼틀에서 겪었던 자유로움 이후에 몇 번의 자유를 더 경험했다고 말했었지요? 이후의 자유 중 가장 강렬한 자유로움들은 대부분 당신의 시골집에서 경험하였습니다. 방학 때마다 방문했던 당신의 시골집에서 나는 매일 밤 잠들기 전마다 안달이 나 있었습니다. 새벽이 걷히고 아침이 오는 모습을 홀로 학교 운동장에 달려 나가 바라보는 것이 나의 큰 행복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없는 시골 분교 운동장 한가운데서 뜀박질을 멈추고 숨을 고르고 세상을 둘러보면, 안개 너머에는 푸른 산이 아른거렸고 밤이슬 젖은 풀은 샌들위로 솟아 발바닥을 촉촉하게 했습니다. 멀리서 까치가 울었고 뺨에 닿는 공기는 차고 맑았습니다. 훤히 밝아오는 하늘을 바라보며 아침을 맞던 그 때, 그 때 나는 그 무엇도 아닌 오직 하나의 생명으로 세계와 마주했습니다. 내 가장 자유로웠던 기억은 당신께서 주신 것입니다. 나의 자유의 근원에는 당신이 있습니다.

말분씨, 여성의 자유로움은 인간의 자유로움입니다. 인간이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에 어떤 의심이 끼어들 수 있을까요? 춤추고 달리고, 온 몸에 달라붙은 위협과 억압과 두려움과 결별하고 영원히 도약하여, 그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고 우리가 누구인지, 생을 통틀어 무엇을 할 것인지, 어떤 제약도 받지 않고 내면의 목소리만을 나침반 삼아 추구하는 존재,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자유로운 인간입니다. 우리 생은 우리가 선택할 수 없는 괴로움과 고통으로 가득합니다. 인간의 삶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롭다는 것은, 그 괴로움과 고통을 받아들인 이후에 그것을 어떤 경험으로 내 영혼에 기록할 것인지 선택할 권리만큼은 우리 자신에게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 삶의 괴로움과 고통을 행복이라는 이름으로 기록할 수 있는 힘, 그 힘은 우리들이 남자도, 여자도 아닌, 존재의 완전성을 회복하는 삶을 살아갈 때야 비로소 주어지는 것이리라 믿습니다.


글쓴이: 희원(Agnes)

* 이 글은 <페미디아>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