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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120주년 재평가, 역사왜곡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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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이 새롭게 부각되고 있다. 망국책임론을 벗기고 자생적 근대국가의 기틀이었다는 주장이 학계 일각에서 흘러나오고 있다. 10월12일 대한제국 선포일 120주년을 맞아 대한제국을 기념하는 각종 행사가 넘쳐나며 대중적으로까지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시대착오적 왕조사관의 부활 아니냐는 우려는 가려졌다.

쇄국정책을 펴다 1876년 강화도조약으로 개항한 조선은 서구열강과 이를 모방한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에 대처해야했다. 1897년 10월12일 고종은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바꾸고 자주국가임을 대내외적으로 선포했으나 불과 8년만인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이 박탈된다. 통감정치를 시작한 일제는 1910년 마침내 한일병합조약으로 국권을 약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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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은 실질적 근대성을 갖추지 못한 허울뿐인 제국이라는 게 지금까지의 평가다. 100주년이던 1997년에도 별다른 소식이 없었는데 갑자기 120주년을 기억한다는 것도 어불성설이다. 신병주 건국대 교수처럼 "동양에서는 육십갑자를 중시해왔는데 올해는 1897년과 같이 정유년"이라고 의미부여를 한다고 쳐도 그렇다. 그런데 이러한 대한제국 폄훼가 일제가 국권침탈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날조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대한제국 재평가 작업은 내재적 발전론파의 계승자로 이명박 정부 시절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가 주도해왔다. 이 교수는 2000년 펴낸 '고종시대의 재조명'을 위시로 고종이 자주적 근대화를 위해 노력한 개명군주였다며 '광무개혁'을 주장한다. 올 들어 황태연 동국대 정외과 교수가 '갑오왜란과 아관망명', '백성의 나라 대한제국', '갑진왜란과 국민전쟁'을 연이어 펴내며 이러한 논리를 강화시키고 있다. 일부 보수언론이 가세하며 대한민국의 건국절을 대한제국 선포일로 앞당겨 정통성을 확보하자는 비약으로까지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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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이 근대문물을 받아들이는 등 긍정적인 면도 보였고 역사적 사실에는 양면성이 있다지만 "고종이 왕실의 유지·존속 밖에 관심이 없었다"는 점은 다수 학자들이 동의하는 바다. '이왕가'로 격하되긴 했지만 병합 후에도 지위보장과 천황가 다음가는 세비를 받았다는 것이 대표적 증거다. 하지만 '대한제국 띄우기'에 나서서 왜곡을 지적하는 후학은 거의 없다. 러시아 출신 박노자 오슬로국립대교수만이 꾸준히 쓴소리를 마다않고 있다. 최근 페이스북에도 "이태진 교수 류의 '고종 뻥튀기'는 결국 보수적 이데올로기의 역사화에 지나지 않는다"고 꼬집었다. 2007년 강준만 전북대 교수가 "타국의 박멸책이나 침략주의를 막아내지 못한 것 이상 더한 '무능'이 있을까"라며 이태진 교수의 '고종 살리기'를 전면 반박하는 글을 한겨레21에 기고한 것이 그나마 눈에 띈다.

이영훈 서울대 경제학부 명예교수가 "고종이 개명군주라는 주장은 사료분석 없이 사회적 명예를 낚기 위한 학문적 사기에 불과하다"고 목소리를 높였지만, 이 교수가 식민지근대화론을 주장하는 뉴라이트 계열인데다가 식민사관과 맥을 같이 한다는 점에서 그다지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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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사를 연구하는 한 중진학자는 민족주의를 강조하는 해석적 흐름을 막을 수 없다고 봤다. "경제가 안 좋을 때는 사회가 보수화되는 경향이 있다. 영·정조시대를 발견하며 나온 자본주의 맹아론은 1960년대 좌우파, 진보·보수에게 동일하게 돌파구 구실을 해줬다. 그 연속선상에서 고종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자는 동향은 '열하 복제버전'이 될 수밖에 없지만, 친일파·식민사관이라는 비난을 받을까 부인하기 쉽지 않다"고 짚었다. 도시 연구를 해온 한 사회학 교수도 "민족부흥을 보여주는 물질적 증거를 만들고 싶은 심리가 5대궁궐 복원으로 드러나고 있다"며 "국가부흥전략으로서도, 근대화의 원동력이 우리 안에 있었다고 믿고 싶은 대중의 바람 측면에서도 공개적으로 반기를 들기는 힘들다"고 했다.

실제 문재인 대통령이나 박원순 서울시장 등 진보 측도 대한제국을 기리고자 하는 발언과 행보를 보였다. 문 대통령은 당선 전인 올해 초 "1897 정유년은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한 해였다"며 "고종의 이루지 못한 새로운 나라의 꿈"을 언급했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지난해 "대한제국의 역사를 재조명해 정동을 활성화하겠다"며 "대한제국의 역사를 돌아보고 국권회복과 국민권력시대를 향한 대한민국의 길을 찾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정동, 그리고 대한제국 13' 계획의 일환으로 구 러시아공사관과 환구단, 덕수궁을 잇는 '대한제국의 길' 역사탐방로를 조성한다고 발표했다. 박근혜 정부 하 문화재청이 구 러시아공사관을 복원·정비하고 아관파천 때 통과했던 미국대사관저와 덕수궁 선원전 사이의 좁은 길을 '고종의 길'로 복구한다고 밝힌데 이은 것이다. 급기야 최창식 서울 중구청장은 최근 "국난을 헤쳐 나가고 자주적 정신을 함양할 때라고 생각한다"며 고종황제가 즉위식을 가지고 제사를 지낸 환구단을 복원하자고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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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정자로서는 지배층의 위로부터의 개혁이라는 이미지를 마다할 이유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1990년대 대표적 우익 작가 이문열의 희곡 '여우사냥'을 바탕으로 한 뮤지컬 '명성황후'가 히트를 치면서 황실 미화가 대중적 지지를 얻었다고 볼 수 있다. 2001~2002년 방송된 KBS TV드라마 '명성황후'는 역사왜곡이라는 우려에도 불구하고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며 국민적 호응을 받았다. 이후 이태진 교수를 중심으로 대한제국을 기념하고자 하는 사업이 차곡차곡 진행돼왔다. 2010년 '대한제국의 역사적 위상회복' 미명 하의 중명전 복원에 이어 2014년 대한제국의 법궁이었던 덕수궁에 대한제국역사관이 개관했다. 석조전 동관에 생긴 대한제국역사관은 "자주 근대국가를 염원했던 우리의 역사가 담긴 곳"이라며 노골적으로 '고종의 근대적 개혁'을 미화한다.

문화재청이 주최하는 '궁중문화축전', 서울시와 중구청에서 매해 봄가을 진행하는 '정동야행' 등은 대한제국 상업화에 여념이 없다. 정동야행은 어느 새 대한제국문화전파 프로그램들로 채워졌다. 덕수궁은 대한제국 황제 즉위식 '대한의 꿈', 대한제국 외국공사 접견례, 대한제국 음악회, 대한제국과 가배차 같은 이벤트의 무대가 됐다. 아예 정례화된 대한제국 외국공사 접견례는 서양인 연기자들이 고종에게 절하는 모습을 재현해 "세계열강과 나란히 서고자했던 대한제국의 꿈을 떠올리게 한다"는 해설과 함께 착시효과를 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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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에게 친숙한 인사들을 동원되는 것은 기본이다. 접견례의 사회는 KBS TV '역사저널'로 유명세를 탄 역사강사 최태성씨가 맡는다. 올가을 정동야행에서는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이 '대한제국의 유산'이라는 주제로 대중강연을 한다. 지난 5월 '정관헌에서 명사와 함께' 행사에는 이태진 교수가 직접 출연해 감개무량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고종이 조선역대 가장 크게 건축공사를 벌인 왕이라며 치켜 올리고 독립운동이 왕에 대한 예우를 빼놓지 않았다는 점 등을 내재적 근대화의 근거로 들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망해가는 나라를 상징물로라도 지탱하고자했던 몸부림과 당시 민중에게는 봉건체제 인식밖에 존재하지 않았던 시대적 한계가 있었음을 쉬이 간과하고 있다.

이러한 윤색의 정점에서 탄생한 것이 허진호 감독의 영화 '덕혜옹주'(2016)라고 할 수 있다. 어느 역사학자는 "울분이 터질 정도로 왜곡했다. 사실은 10%나 될까, 덕혜옹주는 독립군을 만난 적도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극중 손예진이 분한 덕혜옹주는 일제의 압박에 맞서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등 조선과 황실의 희망으로 그려진다. 흥행을 위해 의도적으로 허구를 조장했다는 비난을 피하기는 힘들지만 대중적 인기를 획득하며 남양주 덕혜옹주묘를 찾는 이들이 늘었다. 문화재청은 결국 덕혜옹주묘와 의친왕묘를 임시개방했고, 대한제국 선포 120주년을 맞아 전면개방을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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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일생과 마찬가지로 한 국가의 지나간 운명은 되 돌이킬 수 없다. 자력근대화를 할 수 있었으나 일제가 불공정한 방법으로 기회를 빼앗은 것이라는 가설은 '만약'이라는 상상으로만 가능하다. 요즘 한반도 정세에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이 대유행이다. 열강들에 둘러싸인 긴장상태가 구한말 외세에 시달리던 시기와 유사하다는 위기의식이 팽배하다. 지난 역사에서 배우지 못하면 과오를 되풀이할 수밖에 없다는 교훈을 되새기는 때다. '긍정적 역사창출'이라는 명분으로 자의적 해석된 민족적 자아도취만으로 암울한 국제정세를 헤쳐 나갈 수 있을지 의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