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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예술인지원사업 최종 면접을 보고 왔다

활동비를 지원한다기에 홀린 듯 서류를 작성했다

  • 홍승은
  • 입력 2018.02.21 17:29
  • 수정 2018.02.21 17:31
ⓒhuffpost

얼마 전 한국여성재단의 여성예술인지원사업 최종 면접을 보고 왔다. 예술인지원사업은 1년 간 여성 예술인의 활동을 지원하는 사업이다. 사업 위주의 지원이 아니라 활동비를 지원한다기에 홀린 듯 서류를 작성했다. 다행히 1차 서류 심사에 합격해서 최종 면접을 볼 기회가 생겼다. 책이 나오고 지난 1년 간 사람들 앞에서 말할 기회가 많았기에 왠지 자신감이 생겨서 큰 걱정 없이 면접장에 들어갔다.

‘ㄷ’모양의 테이블에는 심사위원, 재단 관계자 다섯 명이 둘러 앉아있었다. 면접장 내의 조금은 차갑고 딱딱한 분위기를 느끼고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차, 이 사람들은 내 이야기를 들으러 온 게 아니라 나를 심사하러 왔구나. 준비한 발표 내용 중 활동 계획과 성과에 관한 뼈대만 휙휙 발표했다.

질의응답 시간이 이어졌다. 한 심사위원이 물었다. “글쓰기 모임을 진행하는데 600만원이나 들어요?” 예산에 관한 질문은 예상했지만, 날카로운 목소리에 몸이 움츠러들었다. 당황한 기색을 숨기고 대답했다. “저는 글 모임을 진행하기 위해서 매달 50만원의 활동비를 책정한 게 아니에요. 저는 집필 노동을 위한 최소한의 경제적 시간적 여유를 확보하기 위해서 지원했어요. 책상 앞에 앉는다고 글이 뚝딱 나오지는 않잖아요. 저는 올해 ‘페미니즘 글쓰기 안내서’와 ‘다양한 사랑의 가능성’에 관한 글을 쓸 예정이고, 그 글을 쓰기 위해서 문헌을 연구하고, 인터뷰하고, 탐방 가고, 글을 쓸 수 있는 시간과 경제적 여유가 필요해요. 집필 노동만으로도 먹고 살고 싶지만, 그게 어렵기 때문에 지원하게 된 거고요. 지금은 생계노동을 따로 해야만 집필을 할 수 있어요. 앞으로는 집필 노동이 제 생계와 조금 더 연결되길 바라고, 그 기반을 마련하고 싶어서 지원했습니다.” 

ⓒRBOZUK via Getty Images

정확하진 않지만, 이런 내용을 전달했다. 약간 목소리가 떨렸고, 조금 울먹였다. ‘글 쓰는 것만으로 먹고 살기 힘들다’는 말을 할 때, 심사위원들이 공감한다는 듯 눈을 마주치고 고개를 끄덕여주어서 그랬던 것 같다. 기획안에 최대 신청 치인 600만원의 지원금을 신청했다. 2월부터 11월까지 집필을 위한 활동비를 50만원씩 책정하고, 결과물로 독립출판물 두 권을 제작하겠다고 밝혔다. 매달 50만원은 누군가에겐 크지 않은 돈이지만, 소득이 일정하지 않은 나에게는 적지 않은 안정을 주는 돈이다.

작년 여름, 통장을 개설하러 은행에 갔다가 거부당한 적이 있다. 이유는 내 직업이 확실하지 않아서였다. 은행원의 말에 따르면, 대포통장 확산을 막기 위해 통장 개설 자격을 높여놔서 ‘재직증명서’가 있어야 개설할 수 있다고 했다. 당시 나는 두 곳에 글을 연재하고 있었고, 출간도 했고, 가끔 강연에 다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나는 재직 증명서를 뗄 수 없었고, 꼬박꼬박 월급이 들어오지도 않았다. 은행원은 다른 곳에 아르바이트 등록을 하면 재직 증명서를 떼어올 수 있다고 조언했다. 결국, 통장 만들기를 포기했다. 그때 나는 내 위치를 깨닫고 이후에도 내가 은행과의 거래에서 어떤 제약을 받을지 여러 번 생각했다. 올해 수도권으로 이사하게 되면 더 많은 보증금이 필요할 텐데, 나는 대출 자격요건을 조금도 갖추지 못했다. 대출은커녕 통장 하나도 개설하기 어려운 위치라는 데에서 오는 우울감에 휩싸였다.

누군가 “요즘 뭐 하고 살아?”라고 물으면, 선뜻 대답하기가 어렵다. 가끔 청탁을 받아 글을 쓰고, 가끔 강연에 다니고, 각종 모임을 진행하고, 집에서 책을 읽거나 사람들을 만나며 지내는 일상. 이런 내 일상을 돌아보면 의문이 든다. 나를 글 쓰는 사람이라고 소개해도 되는 걸까. 글을 쓰는 일이 ‘노동’일까.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의 ‘성/노동’ 특강을 갔을 때, 출퇴근 시간이 정해진 임금노동자만을 노동자라고 부르는 좁은 노동 관점에 대한 문제의식을 들었다. 그간 내 고민이 척척 정리되는 느낌이었고, 앞으로 누군가 뭘 하는 사람이라고 묻는다면 ‘집필노동자’라고 당당하게 대답해야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다짐은 은행 문턱 앞에서 자꾸만 꺾인다. 돈이 막히니 생각도 막혀버린다. 나는 노동을 하지만 수익이 보장되지 않고, 여전히 동거인들에게 월세와 생활비 대부분을 의존한다. 그들이 없다면 지금처럼 여유를 가지면서 책을 읽고 글을 쓰고 다른 활동을 해나가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 점을 생각하면, 자꾸 올라오는 생각이 있다. 나는 글 쓴다고 의미를 부여하는 그냥 게으른 인간 아닌가. 아마 아빠가 나를 바라보는 인식이 딱 이럴 텐데. 나 역시 아빠의 시선으로 나를 한심하게 바라보곤 한다.

다시 면접상황으로 돌아가서, 더듬더듬 내 대답이 끝나자 다른 질문이 이어졌다. 글쓰기 모임은 어떻게 진행할 것이며, 지방에서 활동하며 느끼는 점은 어떤 것인지. 다행히 분위기가 점차 풀려서 끝에는 웃으며 나올 수 있었다. 오랜만에 심사를 받으며 잔뜩 긴장했더니 기운이 쭉 빠졌고, 결국 뻗어버렸다. 불면증인가 의심될 정도로 요즘 통 잠을 못 잤는데, 서울에 다녀오고서는 초저녁부터 잠들어서 다음 날 아침까지 푹 잠들었다.

며칠 전 합격자 발표가 났다. 여성재단 지원사업에 최종 합격했다. 덜 게으르게 집필 노동을 할 장치를 마련했다 생각하고 열심히 글을 쓸 예정이다. 이번 여성재단의 면접을 준비하면서 주문처럼 외웠던 말이 있다. 집필은 노동이다. ‘작가’라는 말은 왠지 돈과는 무관한 어떤 숭고함 같은 느낌이 있는데, 그런 의식을 나부터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 비록 출퇴근 시간이나 작업 시간이 뚜렷하게 정해진 게 아니고, 결과물도 일정하지 않고, 수입도 불안정하고, 생계노동을 따로 해야 유지되는 상황이지만 내가 하는 이 작업이 노동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 나는 꾸준히 글을 쓰고 싶고, 글을 통해 사람들에게 작은 세계를 연결하고 싶다.

아무래도 부족한 보증금은 아빠에게 빌려야 할 것 같다. (안 빌려줄 가능성이 크지만.) 이사할 날이 다가올수록 시뮬레이션을 그려본다. 아빠에게 보증금을 보태줄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아빠는 심사 위원처럼 대번 내게 “너 요즘 뭐 하고 살아?”라고 물을 것이고, 나는 “집필 노동으로 생계가 유지되도록 열심히 글 쓰고 읽으며 살아가고 있어요”라고 말할 것이다. 아마 아빠는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의아할 것이고, 뚜렷하지 않은 내 직업이 마음에 들지 않을 것이고, 이제라도 공무원 준비나 하라고 할 것이다. 그럼 나는 말해야지. 근데 아빠, 요즘 9급 공무원 붙기가 얼마나 어려운데요. 저는 이 우물을 파볼게요. 보증금만 조금 빌려주세요.

 *필자의 페이스북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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