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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페미니스트 논란’이 아니라 ‘사이버불링’이었다

"때아닌 페미니스트 논란"은 대체 무슨 말일까?

  • 박수진
  • 입력 2018.03.23 21:37
  • 수정 2018.03.23 21:38
ⓒ뉴스1

[토요판]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가수 아이린을 둘러싼 어떤 폭력에 관하여

아이돌그룹 ‘레드벨벳’의 멤버 아이린이 휴가 동안 읽은 책으로 <82년생 김지영>을 꼽자, 어떤 남자들은 그게 ‘페미니스트 선언’이라며 분노를 금치 못했다. 이게 시작이고 앞으로 쭉 피해의식 키울 일만 남은 거라고, 남자 팬들이 열심히 소비해준 덕분에 레드벨벳이 성공할 수 있었는데 이게 팬들에게 할 짓이냐고, 진지하게 결혼까지 꿈꿨던 내가 바보라고. 아이린이 인쇄된 포토카드를 가위로 자르고 사진을 불에 태우며 자신의 분노를 알아 달라고 절규하는 이 남자들을 향한 세간의 반응은 대체로 “비싼 밥 먹고 할 짓도 참 없다”는 쪽으로 모이고 있다.

 

관련 기사: 아이린이 ’82년생 김지영’을 읽었다고 하자 생긴 일

 

선택적 분노 쏟아내는 꼴사나운 남자들

지극히 상식적인 반응이다. 이 책을 읽은 사람이 어디 한둘인가. 오늘날의 한국을 살아가는 여성들이 겪어온 크고 작은 차별과 여성혐오의 경험을 기록해 수많은 독자들의 공감을 산 <82년생 김지영>은, 2016년 10월 출간 이후 4개월 만에 1만5000부, 7개월 만에 10만부, 10개월 만에 27만부를 찍으며 신드롬을 불러일으킨 메가톤급 베스트셀러다. 문화방송 <무한도전>에서 얼핏 보인 유재석의 책상 위 올려져 있던 책도, 방탄소년단의 아르엠(RM), 배우 박신혜, 모델 한혜진, 방송인 노홍철, 소녀시대 수영이 감명 깊게 읽었다고 밝힌 책도 이 책이었다. 작년 노회찬 정의당 원내대표가 청와대 오찬에 초대되었을 때 문재인 대통령에게 선물한 책도, 금태섭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사비를 털어 동료 국회의원 전원에게 선물한 책도 <82년생 김지영>이었다.

국회의원들이 서로에게 책을 선물할 때에도, 유명 서점 엠디(MD)들이 추천도서로 <82년생 김지영>을 꼽았을 때에도, 에스비에스(SBS)가 그 제목을 빌려와 <에스비에스 스페셜>을 만들고 제이티비시(JTBC)가 <한명회>에서 책을 소개했을 때에도 이렇게 격렬한 알레르기 반응이 있었던가? 내가 과문해서 그런지, 문재인 대통령이 페미니스트 대통령을 자처하며 여성인권을 이야기했다는 이유로 그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거나, 에스비에스와 제이티비시의 불매를 선언하고 교보문고 불매운동을 조직했다는 남자들의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유재석의 사진을 찢고 불태운 남자들이 있었다거나, 방탄소년단을 규탄하며 조직적으로 악플을 달고 다니는 남자들이 있었다는 이야기 또한 들어본 바 없다. 결국 이 분노한 남자들은 자신들이 보기에 만만하게 느껴지는 젊은 걸그룹 멤버에게만 선택적으로 화를 내고 있는 건데, 길 잃은 분노조차 사람 봐가면서 만만한 상대에게만 토해내는 행태는 참 꼴사납다. 이 꼴사나움에 질린 수많은 연예 매체는 기자 칼럼을 통해 아이린의 편에 서서 이 못난 남자들을 질타했다.

그런데 어떤 칼럼들은 그 논조가 좀 이상하다. 몇몇 칼럼들은 아이린을 옹호하는 논리로 그가 <82년생 김지영>을 읽었다고 했을 뿐 책에 대해 어떠한 입장이나 감상도 밝힌 적이 없다는 점을 내세운다. 아이린이 스스로 페미니스트라고 밝힌 적도 없는데 책을 읽었다는 말만 가지고 그걸 페미니스트 선언이라고 해석하고 사이버 테러를 가하는 건 부당한 확대해석이라는 이야기다. 그 말을 뒤집으면 이런 논리가 나온다. 만약 아이린이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수식했다면, 남자들이 몰려가 난리를 피우는 것도 어쩔 수 없다는 논리 말이다. “만약 아이린이 책을 읽고 페미니스트 강연을 하거나 사이비 활동을 한다면 문제가 될 수도 있는 상황. 단지 책 한권 읽었을 뿐인데 그로 인해 비난받을 이유는 1도 없다.”(<스포츠월드> 윤기백 기자. ‘아이린은 책도 못 읽나’. 2018년 3월19일) 책을 읽고 느낀 바가 있으면 그에 대해 강연을 할 수도 있는 것이지, 그게 문제가 될 이유는 또 뭐란 말인가?

몇 개월 전 에이핑크의 손나은이 “Girls can do anything”(여성은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이라는 문구가 새겨진 스마트폰 케이스가 보이게 찍은 사진을 소셜미디어에 올렸다가 몇몇 남성 팬들로부터 공격을 당했을 때에도 손나은을 옹호하는 글 중 적지 않은 수가 이와 같은 논조를 띠고 있었다. 소속사는 해당 케이스가 손나은을 광고모델로 한 브랜드 ‘쟈딕 앤 볼테르’가 협찬해준 제품이었을 뿐이라고 해명했고 많은 언론은 이를 두고 “때아닌 페미니스트 논란, 알고 보니 협찬…”이라는 내용의 제목을 달아 올렸다. 사태의 핵심은 젊은 여성이 조금이라도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것 같은 기미가 보이면 억압하려 드는 몇몇 남성우월주의자들의 난동이었는데, 수많은 기사의 제목은 이를 ‘페미니스트라는 이야기가 아니었는데 오해를 사서 뜻하지 않은 봉변을 당한 해프닝’인 것처럼 기술했다. 마치 걸그룹의 멤버가 정말로 자신이 페미니스트라고 주장했으면 이런 봉변을 당해도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하기라도 하듯.

이런 일이 생길 때마다 “○○○, 때아닌 페미니스트 논란”이라는 표현을 고수하는 언론의 태도는 페미니스트라는 단어를 대하는 우리 사회의 인식 수준을 자꾸만 후퇴시킨다. 누군가 자신이 페미니스트라는 신념을 밝혔는데 그게 논란이 될 수 있는가? “사람은 피부 색깔에 상관없이 모두가 존엄하게 태어났으며, 피부 색깔에 따라 사람을 차별하는 습성을 버리지 못한 사회는 꾸준히 개혁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신념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가정하자. 보통의 우리는 비난을 퍼붓는 자들을 ‘인종주의자’라 지칭하고 그들의 행위를 혐오 발언이라고 규정할 것이다. 굳이 ‘논란’이라는 단어를 쓴다면 논란을 불러온 이들을 문장의 주어로 삼아 “인종주의자 혐오 발언 논란”이라고 수식하겠지, “때아닌 평등주의자 논란”이라는 식으로 수식하진 않을 것이다. 그런데 “사람은 성별에 상관없이 모두가 존엄하게 태어났으며, 성별에 따라 사람을 차별하는 습성을 버리지 못한 사회는 꾸준히 개혁의 대상이 돼야 한다”는 신념인 페미니즘을 비난하는 이들이 모여서 사이버불링을 가하면, 왜 그 일은 사이버불링을 당한 사람을 주어로 삼아 “○○○, 때아닌 페미니스트 논란”이란 제목을 달고 전해지는가?


언론은 왜 남성우월주의자를 대변하나

 

이런 보도는 기자나 매체의 본의와는 무관하게 기사를 접하는 젊은 여성에게 이런 메시지를 보낸다. ‘페미니스트’라는 정체성을 밝히면 ‘때아닌 논란’을 겪게 되니 몸을 사리라고, 심지어는 페미니스트라고 오해를 살 일만 생겨도 안 되니 조심하라고. 물론 나도 언론계 언저리를 떠돌며 절반쯤은 이 업계에 발을 걸친 입장인지라, 설마하니 기자 개개인이 젊은 여성 독자들을 위축시키고자 하는 악의를 지니고 그렇게 글을 썼을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저 오랫동안 그런 식으로 제목을 뽑고 기사를 쓰는 게 너무 당연하게 굳어진 관행이니까 그렇게 보도해왔으리라. 그러나 언론부터 이런 관행을 고치지 않는다면 페미니즘에 덧씌워진 부당한 낙인은 좀처럼 지워지기 어려울 것이다. 우리는 이제라도 부당한 공격과 사이버불링을 ‘논란’이라는 단어로 수식해 마치 공격과 사이버불링이 나름의 합리를 지닌 ‘주장’인 것처럼 착시를 유도하는 일을 그만둬야 한다. 논란의 대상이라 할 만한 게 있다면 그건 페미니즘을 향한 근거 없는 분노와 젊은 여성 연예인의 발언권을 제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수 있다고 믿는 소비자본주의와 남성우월주의의 기괴한 결합이지, 페미니즘이 아니다.

이제라도 잘못 쓰인 헤드라인들을 다시 고쳐 쓸 때다. 아이린은 “때아닌 페미니스트 논란”을 겪은 게 아니라 “남성우월주의자들에게 사이버불링”을 당했다. 손나은 또한 “때아닌 페미니스트 논란”을 겪은 게 아니라 “남성우월주의자들에게 사이버불링”을 당했다. 그들이 정말로 페미니스트인지 아닌지는 문제의 본질이 아니며, 젊은 여성 연예인이 조금이라도 자신과 다른 목소리를 내려 하면 애먼 포토카드를 잘라서 인증하고 사진에 불을 지르며 소셜미디어 계정으로 몰려가 악성 댓글을 퍼붓는 남성우월주의자들의 폭력이 문제의 본질이다.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오로지 문제의 본질을 정확하게 파악할 때에만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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