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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주권시대'가 안겨주는 불편함

헌법은 ‘현상‘을 담은 지도가 아닌 ‘방향’에 대한 한 국가의 설계도다

ⓒhuffpost

나는 정치고관여자였다. 여러 정당을 거친 당원이었고, 아직도 여러 시민단체에 돈을 낸다. 활동가를 직업으로 가져본 적도 있다. 주위의 평범한 눈으로 볼 때 나는 분명 이상한 사람이다. ”당신 참 대단하다”는 비아냥 섞인 칭찬도 들었다. 내가 경험하기에 보통 사람에게 정치란 투표 이상의 의미는 아니었다. 몇 개의 선택지 안에서 인물을 뽑고, 정책에 대해 칭찬과 비판을 하고, 그러다 인물이 저물고 또 떠오르는 과정의 연속이었다.

그러던 우리에게 새로운 선택지가 생겼다. 아니 원래 있었는데 비로소 써먹게 된 거다. 우리는 작년 이맘때쯤 우리 귓가를 울렸던 ”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는 헌법재판소의 주문을 기억한다. 한국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으며, 전 세계적으로도 희귀한 일이었다. 이날 이후로 시민들은 제손으로 대통령을 ‘뽑을‘ 수도 ‘파면’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우리가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선택지가 넓어진 셈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당선됐다. 그는 여러 의미에서 부정할 수 없는 촛불대통령이었다. 취임 1년여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현재, 그의 성적은 정말 놀라울 정도다. 사회는 빠르게 안정을 찾았다. 우리는 성공적으로 올림픽을 치렀으며, 두 전직 대통령의 죄를 물을 수 있었고, 급격하게 입장을 선회한 북한을 볼수 있었다. 역대 세 번째 남북 회담을 앞두고 있고, 또 처음으로 이뤄진 북미정상회담의 숨은 감독이기도 했다.

그는 개헌도 추진했다. 조바심을 냈다. 꼭 해야 할 과제라고 생각했는지 당선 초기부터 논의를 이어갔다. 나는 그의 개헌도 지지했다. ‘왜 지금 시점이냐’에 대해 정치공학적인 해석을 할 수도 있겠지만 해야 할 일은 맞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지방선거를 석 달 정도 앞둔 20일, 개헌안 첫 뚜껑이 열렸다.

 

ⓒ뉴스1

 

문재인의 개헌안에는 좋은 내용이 많았다. 기본권의 주체를 국민이 아닌 사람으로 표기했고, 노동자의 권리도 한층 강화됐다. ”동일가치 노동에 대한 동일수준의 임금 지급”은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비정규직이라는 큰 문제를 해결할 단초가 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나는 한 대목에서 멈칫했다. ‘국민발안제‘와 ‘국민소환제’다.

국민발안제는 국민이 직접 중요한 법률안을 제출할 수 있는 제도로 다수 국민이 요청하면 국회를 거치지 않고도 입법을 제안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국민소환제는 선거에 의하여 선출된 대표 중에서 유권자들이 부적격하다고 생각하는 자를 임기가 끝나기 전에 국민투표에 의하여 파면시키는 제도다. 둘 다 직접민주주의의 변형된 형태다.

정부는 이번 개헌안을 준비하면서 국민의 의견을 수렴할 공간을 마련했다. ‘국민개헌’ 웹페이지에서는 국민발안제에 대해 ”대의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경우 국민들의 직접 참여를 통해 대의제를 보완하기 위한 취지”라고 설명했고 국민소환제에 대해서는 ”직접민주주의적 방법을 통해 국회의원의 책임성을 확보하기 위한 취지”라고 설명했다.

‘국민발안‘과 ‘국민소환‘을 보면 떠오르는 것이 있다. 문재인 정부는 당선된 이후 청와대 홈페이지에 ‘국민 청원‘이라는 공간을 만들었다. 여기에는 국민이 정부에 직접 각종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요청할 수 있다. 국민 청원에는 입법이 필요한 내용, 사법부가 해야 할 일들이 자주 올라왔다. 개인에 대한 처벌도 종종 요구됐다. 선해 하자면 그렇다. 그런 요구가 ”이뤄질 것”을 기대한다는 게 아니라 이런 ‘문제’가 있다는 문제의 환기 때문에 청원을 한다는 것.

이는 반대로 말하면 여론이 각 권력에 제대로 전달되지 않음을 의미함이다. 조국 수석이 개헌안을 소개하며 밝혔듯 ‘세월호 특별법’ 입법 청원에는 600만 명의 국민이 참여했지만 당시 정부와 국회는 아무 답변을 하지 않았다. ‘정권이 바뀌기 전에는 정부의 앞잡이 노릇이나 하던 여당이, 야당이 된 지금 사사건건 정부에 발목을 잡고 입법을 제대로 처리하지 않는다’는 말은 해를 바꿔가며, 또 주체를 바꿔가며 계속 있었던 이야기다.

나는 정부가 그 해결책으로 ‘국민 발안‘과 ‘국민 소환‘을 꺼내 든 것으로 해석한다. 국회의 강력한 견제로서 시민을 두겠다는 것이다. 국회가 제대로 일하지 않으면 국민이 언제든 ‘해고‘할수도, ‘대신 입법을 제안’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 같은 의지는 문재인 대통령의 과거 발언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는 작년 8월에 “이제 국민들은 주권자로서 평소 정치를 그냥 구경만 하고 있다가 선거 때 한 표를 행사하는 이런 간접민주주의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며 ”그렇게 한 결과 우리 정치가 이렇게 낙오됐다, 낙후됐다 생각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일단 그의 문제 제기에는 동의한다. 맨 처음 이야기처럼, 우리가 여태까지 했던 정치는 ‘선거 때 한 표’ 이상이 아니었다. 시민은 정치에 더 폭넓게 참여해야 한다. 그런데 방법으로 꺼내든 게 ‘국민발안‘나 ‘국민소환’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못한다.

다시 한번 탄핵을 생각해보자. 탄핵이 왜 일어났는지. 의회는 정부가 하는 일을 제대로 알지도 못했다. 단서를 잡은 소수가 있었지만 해결을 볼 수는 없었다. 대한민국 정치권력에서 행정부가 갖는 힘은 막강하다. 최장집 교수는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한국의 대통령제에 대해 ”제왕적 대통령제가 될 수밖에 없는 구조다. 대규모 촛불집회를 통해야만 겨우 대통령의 권력을 제어할 수 있다”고 말했다.

최장집 교수는 이게 ‘대통령이 누가 되는 문제가 아니’라고도 지적했다. 그는 ”문 대통령 개인을 제왕적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그런데 대통령이 권력을 행사하고 정부를 운영하는 구조 자체가 대통령의 권력을 견제할 수 없게 돼 있다”며 ”우리 사회에는 개인의 권리를 존중하는 자유주의적 전통이 취약하다. 개인의 권리를 잇는 시민 사회가 국가의 공적 영역과 비교하면 너무나 약해 (대통령직이) 구조적으로 제왕적으로 될 수밖에 없다”고 이야기했다.

힌트는 여기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대통령의 부패를 ‘의회‘가 제대로 견제할 수 없었음이 지난 탄핵 국면으로 증명되었고, 의회와 시민사회의 거리가 매우 크게 벌어져있음은 우리가 피부로 느끼고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시민에게 의회를 향한 ‘최종적‘이며 ‘종국적‘인 제재 권한인 국민발안과 국민소환만 쥐여주는 것이 아니라 시민사회가 직접 정당에 정치에 개입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야 한다. 한국의 거대 양당은 주요 선거 후보조차도 당원이 아닌 ‘국민참여경선‘으로 뽑는다. 우리의 정치는 정당이 제대로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과 동떨어져 있으며, 여전히 ‘최종적‘이며 ‘종국적’인 선택을 국민에게 맡기는 정도로만 갈음하고 있는 현상이 보여주는 단면이다.

대의제 민주주의는 단순히 의회만 포괄하는 게 아니다.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민주주의 체계가 완성되어야 한다. 의회를 넘어 정당에서도, 중앙당이 아니라 각 시도당에서도 이뤄져야 한다. 시도당이 어떻게 지역사회를 조직할 수 있을지도 같이 고민해야 한다. 정당만 필요한 것도 아니다. 앞서 최장집 교수의 말처럼 ‘시민 사회’ 자체의 힘을 키워야 한다.

시민은 ‘최종적‘이며 ‘종국적‘인 결정만 할 것이 아니라 정치의 아주 기초적인 것까지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정치의 최종 선택을 ‘결정‘하는 게 아니라 그 과정부터 만들어나가야 한다. 그게 이상이라고 하더라도 설계는 그렇게 하고 가야 한다. 헌법은 ‘현상‘을 담은 지도가 아닌 ‘방향’에 대한 한 국가의 설계도다. 우리는 의회, 그리고 권력 구조를 다시 설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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