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허프인터뷰] 아이스하키 대표팀 박은정·이진규의 '꿈 같았던' 올림픽

"우리는 역사에 기록될 팀의 일원이었다."

한국 여자아이스하키 국가대표팀 이진규(왼쪽), 박은정 선수.
한국 여자아이스하키 국가대표팀 이진규(왼쪽), 박은정 선수. ⓒ허프포스트코리아

지난 20일, 강릉 관동하키센터. 경기 종료를 알리는 버저가 울렸다. 최종 스코어는 1대6. 남북 단일팀은 이날 7-8위 결정전에서 스웨덴에 1-6으로 졌다. 평창동계올림픽 마지막 경기였다. 어쩌면 다시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를 선수들이 한 팀으로 뛴 마지막 경기이기도 했다. 관중들은 한반도기를 흔들며 ”우리는 하나다!”를 외쳤다.

선수들은 쉽사리 링크를 떠나지 못했다. 센터 페이스오프 서클을 따라 둥글게 원을 그린 채 나란히 서서 스틱으로 바닥을 치며 ”하나! 둘! 셋! 팀 코리아!”를 외쳤다. 몇몇 선수들은 눈물을 흘렸고, 서로를 부둥켜 안았다. 눈물을 글썽인 세라 머리 감독은 북한 박철호 감독을 끌어 안았다. 박 감독의 눈도 몰래 벌겋게 달아올랐다.

남북 단일팀은 이번 대회에서 5전5패를 기록했다. 2득점, 28실점, 최하위. 그러나 이 팀이 역사의 한 페이지에 기록될 것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사람은 없다. 개막을 불과 3주 앞두고 꾸려진 단일팀 선수들은 세간의 논란과 우려 속에서도 묵묵히 최선을 다했다. 경기장 안팎에서는 그 어느 팀보다 많은 박수와 응원을 받았다.

ⓒDavid W Cerny / Reuters

 

사실 남북 단일팀 이전에도 여자 아이스하키 대표팀은 일종의 ‘단일팀’이었다고 해도 틀리지 않다. 해외에서 태어나고 자란 한국계 2세들이 팀에 합류해 손발을 맞췄다. 그럴 만한 사연이 있었다. 한국은 아이스하키 불모지다. 여자팀은 국내에 단 하나, 국가대표팀 뿐이다. 국제대회를 빼고는 경기를 뛸 기회조차 없었다.

평창동계올림픽를 준비해야 했다. 2013년 무렵, 대한아이스하키협회는 해외로 눈을 돌렸다. 아이스하키 인기가 높은 미국과 캐나다 학교 팀 명단에서 ‘김·이·박·정·최씨’ 성과 아시아계 외모를 가진 선수를 찾아 무작정 연락을 돌렸다. 한국 국가대표 선수로 뛰어보지 않겠냐고 물었다. 맨땅에 헤딩하는 꼴이었다. 

협회의 ”농담 같은” 제안을 받은 선수들이 그렇게 하나둘씩 한국 땅을 밟았다. 박은정(캐롤라인 박), 임진경(임대넬), 랜디 희수 그리핀은 귀화 절차를 밟아 한국인이 됐고, 미국으로 입양됐던 박윤정(마리사 브랜트)은 국적을 회복했다. 이중국적인 이진규(그레이스 리)와 교포 제니 김 노울즈도 제안을 받고 팀에 합류했다. 

한국이 낯설고 한국어가 익숙치 않은 선수들이 태극마크를 달고 땀을 흘렸다. 길게는 4년에서 짧게는 몇 개월 전부터 올림픽을 준비했다. 그러던 중, 갑작스레 남북 단일팀이 결정됐다. 올림픽 첫 경기를 불과 3주 앞둔 때였다. 북한 선수들이 팀에 합류해 처음 훈련을 시작한 건 불과 2주 전이었다.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허프포스트코리아

 

22일 강릉 올림픽플라자 인근 캐나다하우스에서 허프포스트와 만난 박은정·이진규 선수는 ”꿈 같았다”는 표현을 자주 썼다. ”모든 게 불확실”했음에도 결국에는 ”진짜로 팀이 된” 과정, 그리고 ”관중으로 가득찬 경기장”을 회상하면서다. ”모두가 우리를 지켜봤다. 그런 팀의 일원이었다고 말할 수 있게 되어서 좋았다.”  

박은정은 캐나다 토론토 브램튼에서 태어났다. 프린스턴대에 다니며 대학팀 공격수로 뛰었다. 컬럼비아대 의학대학원 진학을 준비하다가 협회의 이메일을 받고는 ”스틱 한 자루를 들고” 2013년 한국에 왔다. 생애 첫 한국 방문이었다. 일상생활에는 큰 불편이 없는데도 ”한국 국적을 받고 올림픽에 나가려고” 어깨 수술도 했다. 

미국 콜로라도주 덴버 인근 볼더 태생인 이진규는 뒤늦게 팀에 합류했다. 2016년 머리 감독의 눈에 들었다. 그는 당시 대표팀 연습경기 상대였던 아이스하키 명문 새턱 세인트 메리 스쿨 소속이었다. 국가대표 데뷔 첫 경기부터 1라인 센터 공격수로 뛰었다. 올림픽에서는 ”너무 화가 나고 서러워서” 눈물을 펑펑 쏟았다.

두 선수에게는 ‘꿈 같았던’ 올림픽이 끝났다. 허프포스트는 아직 기억이 선명한 그 이야기를 들었다.

ⓒ허프포스트코리아

 

- ‘올림픽 여정’이 다 끝났다. 우선 소감이 어떤지 궁금하다.

박은정(캐롤라인 박) : 다 끝났다는 게 약간 꿈처럼 느껴진다. 우리는 지난 4년 동안 이 순간을 위해 준비해왔고, 개회식장에 들어선 게 바로 어제였던 것만 같은데 모든 게 끝났다니 꿈만 같다. 하지만 이건 엄청난 경험이었다.

이진규(그레이스 리) : 맞다. 나는 지난해에야 팀에 합류해서 지난 6~7개월 동안 쭉 훈련만 했다. 순식간에 지나간 것 같다. (올림픽에는) 이제 막 온 것 같다. 캐롤이 말한 것처럼 올림픽에 왔다는 건 정말 엄청난 느낌이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 신소정 골리는 마지막 경기가 끝나자마자 맥도날드로 달려가서 7년 동안 참았던 햄버거를 먹었다고 하던데, 혹시 경기가 끝나고 꼭 하고 싶었던 게 있었나. 첫 번째 식사 메뉴는 뭐였나.

: 선수촌 안에 맥도날드가 있는데 동료들과 ‘마지막 경기가 끝나자마자 맥도날드에 가자’고 얘기했었다. 그렇게 거의 정해놓은 셈이었다. 감자튀김을 먹어본 게 7년도 넘은 것 같다. 이러다가 탈나는 거 아닌가 싶었다. (웃음) 그레이스랑 나는 완전 맥도날드에 빠져서 결국에는 종류별로 하나씩 다 먹었다. 단체로 맥도날드라니. (웃음)

: 캐롤이 말한 것처럼 마지막 경기가 끝나고 바로 맥도날드로 달려갔다. 종류별로 하나씩 다 먹었다. 완전 재밌었다.

: 그럴만한 가치가 있었다.

: 맞다.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는 만찬이었다. (웃음)

- 이진규 선수는 팀에 합류하기 전에 학교를 휴학했는데.

: 맞다. 고등학교를 1년 휴학했다. 이건 나한테는 좋은 기회였다. (학교 아이스하키팀) 코치님들이 매우 큰 도움이 됐다. 이 기회를 잡으려면 올해에는 (대표팀) 하키에만 집중하고 학교는 1년 휴학하는 게 좋겠다고 말해주셨는데 그것 역시 힘이 됐다.

- 미국에서 자라면서 북한에 대한 얘기를 많이 들었을 것 같다. 과거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은 북한을 ‘악의축’으로 지칭했고, 최근에는 트럼프 정부가 북한과 말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북한과 단일팀을 결성한다는 발표가 처음 나왔을 때 미국에 있는 가족이나 친구들의 반응은 어땠는지 궁금하다.

: (전지훈련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까지는 우리도 무슨 일인지 몰랐다. 이게 발표되기 전에 우리는 (전지훈련 끝나고) 휴가중이었고. 그래서 한국에 오기 전까지는 우리도 뭐가 어떻게 되는 건지 잘 몰랐다. 뉴스가 계속 쏟아져 나오는데 친구들과 가족들도 무슨 상황인지 몰랐고 ‘그래서 지금 어떠냐’는 문자 메시지도 엄청 많이 받았다. 이상한 상황이었다. 모두 처음 듣는 소식이었고 누구도 무슨 일이 벌어지게 될 것인지 알지 못했다.

사진은 세라 머리 감독이 선수들에게 훈련 지시를 하는 모습. 2018년 2월5일.
사진은 세라 머리 감독이 선수들에게 훈련 지시를 하는 모습. 2018년 2월5일. ⓒ뉴스1

 

- 캐나다에 있는 가족·친구들의 반응은 어땠나.

 : 그레이스가 말했듯 우리가 이 소식을 알게 됐을 때는 그래서 팀이 어떻게 될 건지 모든 게 불확실했다. 고향에 있는 가족과 친구들이 뉴스에서 듣거나 신문에서 접한 소식을 통해서 알아가게 됐던 것 같다. 처음 우려했던 건 하나였다. ‘이 모든 게 어떻게 풀려나갈 건가.’ 그런 것들이 처음 들었던 우려였던 것 같다. 우리는 그저 ‘새로운 팀’을 꾸리게 되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것도 역시 우려되는 점이었고. 그러나 전반적으로는 좋게 풀려나갔던 것 같다. 

- 한 팀이 되고 나서 북한 선수들에게 놀랐던 점이 혹시 있나.

: 개인적으로는 북한 선수들이 얼마나 평범하고 다정하고 훌륭했는지에 놀랐다. 그들은 매일 배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 우리 시스템을 배우는 것이나 우리가 4년동안 연습해왔던 걸 배우는 것에서나 그들은 적극적으로 임했다. 매일 최고였다. 새로운 걸 시도하고 배울 준비가 되어있었다. 우리의 생활 같은 것들에 대해 질문하기를 쑥스러워하지 않았다. 그들과 친해지는 게 정말 즐거웠다.

: 그들에게도 역시 이건 극복해야 할 낯선 상황이었다. 그런 점에서 우리와 어떻게 반응할지 지켜보는 게 흥미로웠다. 캐롤이 말했던 것처럼 그들은 팀에서 뛰고 싶어했고, 기회를 잡고 싶어했다. 그렇게 하기 위해 그들이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 모두가 깨닫게 된 뒤에는 모든 것들이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던 것 같다. 우리 모두는 그들이 우리와 매우 비슷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렇게 진짜로 팀이 된 거다.

- 언어장벽은 어떻게 해결했나. 두 사람 모두 한국어를 듣고 이해할 수 있는 걸로 알고 있다. 그래도 북한말은 남한과 많이 다르지 않나. 영어에서 한국어로, 북한말로 옮기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다.

: 팀 라커룸 벽에 종이를 걸어놓고 몇몇 단어를 번역해서 적어뒀다. 북한 선수들과 우리의 언어 차이를 좁히기 위해 팀이 같이 노력했다. (그 단어가 뭐였더라…?) 슛, 패스, 체인지 같은 기본적인 단어들도 달랐다. 한국 선수들은 영어 단어를 쓰고 있었는데 북한 선수들은 슛을 ‘쳐넣기‘라고 한다거나... ‘쳐넣기’ 맞나? 문자 그대로 번역해서 ‘골문 안으로 퍽을 쳐서 넣기’ 같은 뜻이었던 것 같다. 맞나? (웃음)

: 나는 (북한 단어) 잘 모른다. (웃음)

: 나도 잘 모른다. (웃음)

: 우리에게나 한국어를 쓰는 선수들에게나 흥미로운 일이었다. 예를들어 ”덤프(dump; 오펜스 지역으로 퍽을 쳐놓고 쇄도하는 것)”라고 하면 한국 선수들은 ”덤프”가 무슨 말인지 안다. 슛, 패스 같은 용어들도 영어 단어를 그대로 쓰니까 문제가 없었다. 북한 선수들이 합류했는데 영어를 전혀 몰랐다. 덤프, 패스, 슛 같은 단어들을 설명하는 순우리말을 썼다. 처음에는 소통에 어려움이 있었다. 그렇지만 북한 선수들이 지난 몇 주 동안 몇몇 영어 표현들에 적응을 잘 했던 것 같다. 이제는 패스나 슛 같은 단어들도 이해하게 됐다.

: 나는 ‘쳐넣기’ 밖에 기억 안 난다. (웃음)

ⓒ허프포스트코리아

 

- 엄청난 응원을 받았는데 선수로서 어떤 느낌이었나. 또 그런 응원이 있을 거라고 예상했었나.

: 누구도 예상 못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첫 경기에서 링크에 딱 들어서는 순간, 관중으로 가득찬 경기장과 응원단, 매진된 경기장을 보면서 비현실적인 느낌마저 들었다. 그렇게 큰 규모의 관중들과 부담 속에서 경기를 해본 적은 없는 것 같다. 그래서 더 재밌었고, 경기에 더 집중해서 최선을 다하고 즐길 수 있었던 것 같다.

- 이전에는 하키를 본 적이 없는 팬들의 피드백 같은 건 혹시 없었나.

: 스웨덴이랑 평가전을 했는데 그 경기가 매진됐었다. 그게 단일팀으로서의 사실상 첫 번째 경기였고, 그 다음부터 응원이 점점 커졌던 것 같다. 단일팀이 성사되기 전에 매진됐던 경기가 딱 하나였는데 일본전이었다. 그 후로 단일팀의 모든 경기, (예선전) 스위스, 스웨덴 경기 모두 매진됐고, 마지막 두 경기는 순위결정전이었는데도 모두 매진됐다. 경기장에 들어서면 매진된 경기가 어떤 건지 (알게 된다). 경기장이 꽉 차있다. 관중들 중 절반은 하키가 뭔지 잘 모를지도 모르지만.

: 경기장에 와서 관전한 팬들에게 ‘진짜 재밌었다‘는 전화나 메지시를 받는 거다. 점수가 어떻든 경기장에 가고, 또 우리 경기를 지켜보는 것 만으로도 즐거웠다는 얘기다. 하키를 경기장에서 직접 본 게 처음이었던 거다. 경기장에서 직접 보는 건 TV로 보는 것과 많이 다르다. 더 많이 이해하게 되고 몸싸움 같은 것들을 보면서 이게 얼마나 격한지, 또 얼마나 속도가 빠른지도 알게 된다. 아이스하키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지는 것이다. ‘점수가 어떻든 정말 재밌었다. 팀을 위해 최선을 다해줘서 고맙다’ 이런 메시지들을 받았다.

- 발표 직후부터 단일팀은 평화, 화해, 올림픽 정신에 대한 거대한 하나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선수로서 경기를 준비하면서 그게 방해가 되지는 않았나.

: 훈련을 진천(선수촌)에서 했는데, 바깥과는 거의 차단이 되어 있었다. 선수촌에서는 언론 접근도 차단됐다. 그래서 최대한 오랫동안 선수촌에 머무르다가 스웨덴 경기를 치르러 나왔던 것 같다. 스웨덴 경기에 나서면서 그제서야 이게 얼마나 큰 상황이었는지 알게된 셈이다. 경찰 호위를 받으면서 이동했고, (북한 선수들과) 버스를 따로 타긴 했지만 어쨌든 함께 움직였는데 링크에 도착할 때는 지나쳐가는 길이었지만 경기장 바깥에 수많은 시위대가 있는 것도 봤다. 이게 얼마나 큰 상황인지 깨달은 것이다. 또 모든 선수들은 당시 있었던 부정적 언론보도들과 거리를 두려고 했던 것 같다. 우리의 포커스는 하키였다. 다만 당시에는 외부와 격리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게 그렇게 큰 일인 줄 잘 몰랐다. 경기를 하러 나와서 그곳에 나와있는 모든 사람들을 보는 건 꽤 꿈같은 순간이었다.

ⓒBRENDAN SMIALOWSKI via Getty Images

 

 : 맞다. 이게 얼마나 큰 일이었는지 (나중에서야) 깨달았던 것 같다. 그 전에 선수촌에서 훈련할 때는 전혀 몰랐다. 모든 것으로부터 차단되어 있었으니까. 그러다가 ‘현실 세계‘로 진입했던 셈이다. 그러면서 이게 우리보다 훨씬 더 큰 일이구나, 이 나라와 세계에도 거대한 일이구나 하고 깨달았다. 우리에게 매우 높은 관심이 쏠렸다. 그래서 이걸 해내는 것의 중요성이 더욱 강조됐던 것 같다. ‘경기를 어떻게 풀어나가지?’ 같은 것들에 너무 집중하는 대신 ‘(성적도 중요하지만) 우리 팀에게는 더 큰 의미가 있다’는 식으로 받아들였다. 그런 것들이 이 팀에서 뛴다는 것에 대한 자긍심을 우리에게 심어줬던 것 같다. 

- 북한 선수들은 북한 선수단 자체의 엄격한 규칙을 따라야 했다고 알고 있다. 또 북한 선수들은 버스도 따로 타고 이동했고, 숙소도 따로 썼고, 제재로 금지된 미국 물품을 쓸 수도 없었다. 혹시 매일 같이 생활하면서 어려움 같은 건 없었나.

: 우리가 팀으로 뭉치는데 있어서 방해가 될만한 것들은 없었던 것 같다. 숙소를 따로 쓴다는 게 제일 큰 거였지만 우리는 밥도 같이 먹었고, 링크에도 늘 함께 있었다.

: 우리가 팀으로 하나가 되는 것을 막는 그런 것들은 없었다고 생각한다. 아까 말했던 것처럼 버스를 따로 타긴 했는데 큰 문제는 아니었다. 팀에 35명이 있는데 어차피 버스 한 대로는 안 되니까 버스 두 대가 필요했다. 어쨌거나 버스 두 대가 필요하긴 했던 거다. 우리는 같이 링크에 갔다가 같이 돌아왔다. 북한 선수들과 우리를 갈라놓는 그런 건 없었다. 

- 다양성의 측면에서 보면 아직 부족하기는 하지만 이번 올림픽은 이전에 비해 훨씬 더 넓은 스펙트럼의 사람들, 또 문화를 보여주는 것 같다. 아이스하키팀도 다양한 문화와 배경을 가진 선수들이 하나의 팀으로 뭉쳤다. 그게 어떤 의미로 다가왔는지 궁금하다.

: 나는 이 팀의 일원으로 뛰면서 게임의 다양성을 대표할 수 있어서 매우 자랑스럽고 영광스러웠다. 스포츠 경기에서 뛰고 올림픽에 나서는 것에는 경기 결과 만큼이나 더 큰 뜻 같은 게 있다고 생각한다. 그 기회를 내가 얻게 되어서 영광이었다.

: 역사의 일부로 기록될 일에 참여했다 건 특별한 감정이었다. 모두가 우리를 지켜봤다. 사람들이 우리 팀, 우리가 해낸 일을 기억할 것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에 매우 특별했다. 몇 년 뒤에는 사람들이 우리를 경기 스코어로 기록하는 게 아니라 단일팀 그 자체로 기억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팀의 일원이었다고 말할 수 있게 되어서 좋았다. 

ⓒBRENDAN SMIALOWSKI via Getty Images

 

- 일본전 얘기를 해보자. 다른 경기들보다는 훨씬 더 치열했고, 이길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대회 첫 골도 나왔다. 경기 당시에 어떤 느낌이었나.

: 아까 말했듯 단일팀이 결성되기 전에 이미 매진됐던 유일한 경기가 바로 일본전이었다. 지난 7월부터 모든 선수들의 초점은 하나였다. 우리가 스위스 같은 유럽 팀이랑도 붙겠지만 일본은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팀 전체가 그 한 경기에 초점을 맞췄다. 경기장에 들어설 때 분위기가 (이전 경기들과는) 다른 수준으로 고조되어 있었고, 그 덕분에 선수들도 초반에 경기를 훨씬 더 잘 풀어나갔던 것 같다. 막상막하의 경기였고 우리가 이길 수도 있겠다고 느꼈다. 그러나 (퍽이) 몇 번 불운하게 튀었고... 우리도 집중을 많이했고 첫 골도 넣었다.  

: 일본과 경기할 때는 약간 더 신이 나는 것 같다. 우리팀은 물론 다른 경기들도 준비했지만 일본전에 조금 더 집중했고 승리를 목표로 삼았다. 그래서 이번 대회 중 최고의 경기를 했다고 생각한다. 분명히 근접했던 경기였다. 이길 수도 있었다. 그러나 타이밍이 잘 맞지 않았던 부분들이 있었던 것 같다. 그래도 경기는 흥미진진 했고 마찬가지로 팬들에게도 더 재밌었던 것 같다. 관심도 훨씬 컸고.

- 첫 번째 골 넣었을 때 북한 동료선수들의 반응은 어땠나.

: 벤치에 있었던 선수들의 반응이 어땠는지는 잘 모르겠다. 나는 그 때 경기를 뛰고 있어서...

: 우리가 골을 넣었을 때 모두가 환호했다. 북한 선수들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대회 첫 골이었기 때문에 우리한테는 매우 큰 사건이었다. 그 때가 2대1이었나?

: 맞다. 

ⓒBRENDAN SMIALOWSKI via Getty Images
ⓒBRENDAN SMIALOWSKI via Getty Images

 

: 첫 번째 골이었으니까 다들 엄청 열광했다. 경기장에서도 그 기운이 느껴졌었다. 한 10분은 그대로 (분위기가) 유지됐던 것 같다. 모두가 열광의 도가니였다.

- 단일팀 선수로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을 꼽는다면?

: 스웨덴과의 마지막 경기가 끝나고 마지막으로 다같이 모였을 때였던 것 같다. 모든 선수들이 경기장 가운데에 모여서 마지막으로 서로 격려하는 시간을 가졌다. 꿈같은 순간이었다. 우리가 한 팀으로 얼음 위에 서는 마지막 순간이 될 것이었기 때문이다.

: 나도 그 때가 매우 특별한 순간이었다. 단일팀으로서 개회식장에 입장하던 때도 ‘우리가 진짜로 이 깃발 아래 같이 입장하는구나, 현실이 됐구나’ 싶었다. 그 두 순간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저작권자 © 허프포스트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연관 검색어 클릭하면 연관된 모든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

#평창올림픽 #북한 #올림픽 #아이스하키 #단일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