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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대통령의 올림픽 축전을 살펴봤다

‘나라의 명예’ 대신 ‘사랑합니다’라고 말하기까지 40여년이 걸렸다.

  • 김성환
  • 입력 2018.02.21 15:33
  • 수정 2018.02.21 15:34
ⓒTom Pennington via Getty Images

스피드스케이팅 여자 500m에서 은메달을 딴 ‘빙속 여제’ 이상화 선수는 2006 토리노겨울올림픽에 첫 출전을 시작으로 2018 평창겨울올림픽까지 4번의 올림픽에 출전했습니다.

2010 벤쿠버·2014 소치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고, 평창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따며 세개의 메달을 목에 걸다 보니 이상화 선수는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에게 각각 축전을 받았습니다.

자연스레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중심으로 이상화 선수가 받은 세 명의 전·현직 대통령의 축전을 비교하는 글이나 기사가 눈길을 끌었습니다.

ⓒ청와대

세 명의 전·현직 대통령의 축전의 차이는 ‘나라와 국민의 명예’란 표현의 유무였습니다.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의 축전에는 ‘나라와 국민의 명예’란 표현이 있고, 문재인 대통령의 축전에는 이 표현이 없습니다.

문 대통령은 “벤쿠버에서는 도전자로 금메달을 목에 걸었고 소치에서는 챔피언으로 수성을 이뤘다. 이번 평창은 ‘우리나라 올림픽’이라고 남다른 애정으로 다시 도전했다. 그것만으로도 우리 국민은 이상화 선수를 사랑한다”“(이상화 선수는)국민 마음속에 언제나 세계 최고의 빙속 여제”라고 축전을 보냈습니다.

물론 ‘국민’이나 ‘나라’라는 표현이 있지만 ‘선수 개인’으로 무게중심이 옮겨갔습니다. “사랑합니다”는 표현도 눈에 띕니다. 이전 대통령의 축사가 딱딱한 문구로 채워져 있다면 문 대통령은 이상화 선수뿐만 아니라 다른 선수들에게도 선수 개개인의 사연과 그동안의 노력을 높이 평가하고 찬사를 보내는 축전을 보냈습니다.

ⓒ뉴스1

이상화 선수의 강인한 정신력과 탁월한 기량이 국민모두에게 큰 감동과 기쁨을 안겨주었다. 이상화 선수는 대한민국 스피드 스케이팅 역사를 새로 쓴 우리나라의 보배이다. 나라와 국민의 명예를 드높인 이 선수에게 거듭 축하와 감사를 드린다.

ⓒ청와대

올림픽은 여전히 국가주의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하지만 과거와 달리 메달 색깔에 연연하지 않고 개인의 도전과 성취를 점점 중시하기 시작하는 시대의 변화가 문 대통령의 축사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국가주의가 지금보다 더 강했던 과거의 대통령 축전은 어땠을까요?

역대 대통령의 축전을 돌아보면 ‘조국과 민족’ 등의 표현이 가득하던 축전이 ‘선수 개인의 도전과 성취’로 무게중심이 이동하는 흐름이 보입니다.

ⓒKTV/youtube

일단 레슬링의 양정모 선수가 정부 수립 이후 최초로 금메달을 획득한 1976년 8월1일로 시간을 돌려보겠습니다.(패럴림픽(장애인올림픽)까지 포함하면 최초로 금메달을 따낸 선수는 1972년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회 휠체어 탁구에 출전한 송신남 선수입니다.)

양정모 선수는 이날 오전 몬트리올 올림픽 레슬링 자유형 62㎏급 결승리그에서 몽골의 오이도프와 미국의 존 데이비스를 물리치고 금메달을 땄습니다. 방송사는 정규방송을 멈추고 긴급 뉴스를 내보냈고, 신문도 호외를 찍었다고 합니다.

당연히 박정희 전 대통령도 축전을 보냈습니다. 박 전 대통령은 “금번 우리 레슬링의 양정모 선수가 올림픽 레슬링 자유형경기에서 강호들을 물리치고 당당히 금메달을 차지한 것을 온 국민과 더불어 경하해 마지 않는다”“아울러 국가의 명예를 위해 선전분투하고 있는 선수 임원 여러분의 노고를 치하해 마지않는다”고 밝혔습니다.

이후에도 대통령의 축전은 올림픽의 출전한 선수들이 “국가의 명예를 위해 싸우고 있다”는 시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1984 로스앤젤레스여름올림픽 당시 대통령이었던 전두환씨는 복싱 미들급에서 금메달을 딴 신준섭 선수, 여자양궁에서 금메달을 딴 서향순 선수 등에게 “선수의 투혼과 집념은 온겨레의 가슴마다 다시 한 번 조국을 일깨우고 한민족의 저력과 감투정신을 세계만방에 떨친 쾌거로서 크게 경하한다”(1994년8월12일)는 축전을 보냈습니다. 조국과 민족, 겨레가 모두 등장한 축전으로 지금 시각으로 보면 조금은 ‘손발이 오그라들기’도 합니다.

1988 서울 올림픽(노태우 전 대통령) 당시 기사를 보면 메달을 딴 선수들의 내외신 기자회견이 대통령의 전화 때문에 늦어지고, 전화나 축전을 받고 굳은 자세로 “각하 덕분에~”를 연신 입에 올리는 선수들의 풍경이 묘사돼 있기도 합니다.

계속되는 질문 공세에도 대답할 틈도 없이 김재엽은 임원들의 채근을 받고 대통령으로부터 걸려온 전화기 앞에 ‘앉혀졌다’ 수화기를 든 김 선수는 갑자기 표정이 굳어지며 “격려해준 덕분에…감사합니다”라는 도식적인 말을 읊조리며 식은땀을 흘렸다. 지난 21일 우리나라에 첫 금메달을 안겨준 레슬링의(중략) 그 기쁨의 표현도 잠시 뿐 김은 본부석에 있는 한 임원의 손짓에 따라 급히 본부석 위로 뛰어 올라가 굳은 자세로 ‘대통령의 전화’를 받아야 했다.

ⓒ한겨레 1988년 9월27일 10면

권위주의 정권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문민정부가 들어서도 조국과 민족, 국민을 앞세우는 대통령의 축전은 유지됐습니다.

탁월한 기량과 강인한 정신력으로 조국의 명예를 세계에 드높인 쾌거를 온 국민과 함께 축하한다

대한민국의 명예를 드높인 자랑스러운 쾌거를 온 국민과 함께 축하한다

탁월한 기량으로 금메달과 동메달을 수상한 것을 온 국민과 함께 축하한다. 앞으로도 더욱 노력해서 대한민국의 명예를 드높여 줄 것을 바란다

앞서 대통령의 축전들이 다소 딱딱한 표현으로 ‘국가의 명예’에 방점을 찍었다면, 이명박 전 대통령 이후 축전들은 다소 ‘말랑말랑’해집니다. 올림픽이 가진 국가주의적 색채가 조금씩 옅어지면서 축전도 선수 ‘개인의 도전’에 신경을 쓰기 시작한 것이죠.

이명박 전 대통령은 2012년 8월3일 런던 올림픽에 출전해 메달을 획득한 양궁의 기보배 선수에게 “개인전 우승은 한국 양궁이 여전히 세계 최강의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계기가 됐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 이후 8년만의 위업이며, 기보배 선수 개인적으로도 개인전과 단체전에서 모두 우승한 의미 있는 성취이기도 하다. 대한민국의 명예를 드높인 기보배 선수에게 따뜻한 격려를 보내며, 함께 애쓴 부모님과 지도자 여러분에게도 축하를 드린다”라고 축전을 보냈습니다.

2016년 8월8일 박근혜 전 대통령도 리우여름올림픽 남자 유도 66㎏급 은메달을 획득한 안바울 선수에게 보낸 축전에서 “올림픽 첫 출전임에도 탁월한 기량과 집중력으로 끝까지 최선을 다해 경기에 임하는 안바울 선수의 모습은 국민들에게 큰 감동과 자긍심을 줬다. 앞으로도 변함없는 도전 정신으로 대한민국의 명예를 드높여 우리 국민들에게 기쁨을 줄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선수 개인의 이야기도 담았습니다.

결국 문재인 대통령의 축전에서 ‘나라와 국민의 명예’라는 표현이 사라졌습니다. 선수들은 자신의 에스엔에스 계정에 대통령의 축전에 “감사하다”는 뜻을 자유롭게 밝히기도 합니다. 여전히 올림픽을 향해 ‘국가의 명예’로 바라보는 시각이 지배적이지만, 우리 사회가 중시하는 가치가 국가에서 개인으로 조금씩 이동하는 시대의 흐름이 대통령의 축사부터 반영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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