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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셋 2

[소설 '리셋' 챕터 2]

ⓒhuffpost

조광희 작가의 미발표 신작장편 ‘리셋’은 새로운 감각의 스릴러 소설로, 현직 서울시장의 요청을 받고 전임 시장이 연루된 비리를 파헤치는 변호사의 이야기를 속도감 넘치는 필치로 그리고 있다. 이 과정에서 주인공은 뜻하지 않은 음모에 휘말리면서 21세기 한국사회의 다양한 민낯과 부패의 심연을 들여다보게 된다. 매주 월, 수, 금 오전에 업데이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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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변호사, 잘 지내시지요?

미국에서 얼마나 고생이 많습니까? 자세한 이야기는 직접 만나서 하기로 하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지요. 전임 시장 시절의 서울시 비리에 관한 문제입니다. 물론 아직 확인된 것이 아니지만 흉흉한 이야기가 자꾸만 들려옵니다. 그런데 지난달에 어느 부동산 개발 회사의 전무가 비서실장을 찾아왔습니다. 실장이 보고한 내용에 따르면, 그 전무가 담당 실무자뿐만 아니라 전임 시장에게도 분명히 무슨 비리가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결정적인 단서를 주지는 않았답니다. 단서를 주는 대가로 시에서 사업상 무언가 배려해주기를 바라는데, 그런 것을 약속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검찰에 수사를 의뢰하자니 너무 막연하고, 여당 눈치를 보는 검찰이 조사를 제대로 할 리도 없습니다.

연 박사와 상의한 결과, 우선 강 변호사에게 부탁하여 비밀스럽게 조사하는 것이 좋겠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강 변호사가 일하는 사무소의 마이클 김 대표 변호사는 저도 서울에서 한 번 만난 적이 있습니다. 한 달 정도 휴직하는 것을 양해해달라고 부탁할까 합니다. 물론 시에서 적당한 국제자문 업무를 의뢰하면, 강 변호사가 더 편히 움직일 수 있겠지요. 사실은 비서실장을 통해 마이클 김 변호사에게 이미 허락을 받았습니다. 일주일 정도만 주어지면, 현재 강 변호사가 진행 중인 사건들을 재배당 할 수 있다고 하더군요. 제가 너무 일방적으로 정했나요? 아무튼 허락해주실 것으로 믿습니다. 실무적인 사항은 실장이나 연 박사와 상의해주세요

참, 제가 처음 당선될 때 흑색선전에 대한 방어를 잘 진행해준 점에 대해서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2015.7. 고윤석 드림] 

ⓒsvetikd via Getty Images

동호는 노트북을 닫았다. 앞으로 적어도 몇 년간은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 너무 바쁘지 않게 일하고 월급으로 임대주택 월세를 밀리지 않으면서 잘 지내왔다. 앞일을 생각하지 않고 남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생활을 영위하는 것은 마음의 균형을 잡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 균형이 체념일 수도 있겠지만 일단은 비틀거리지 않는 것이 중요했다.

가급적 깊은 생각을 하지 않고 일상을 성실하게 재생산하면서 주어진 기능적인 일에 집중한 채 보내는 하루하루가 제법 괜찮았다. 마음에 어떤 회한이나 두려움이 일어나는 밤이면 수면제를 반 알씩 먹고 곧 잠들었다. 알약을 삼키고 몇 분이 지나면 가볍게 퍼져나가는 약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아침이 왔다. 아침이면 어쨌든 빛이 있었고, 새의 지저귐과 거리의 소음도 있었다. 식빵 한 조각과 우유, 요구르트 따위로 허기를 달래고 서둘러 맨해튼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버스에서 바라보는 허드슨강 건너의 마천루는 늘 위압적이고 생경했다. 어린 시절에 사진으로 보며 경탄했던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54층으로 올라가면 하루가 온전히 시작된다.

동호는 온갖 걱정과 두려움과 권태를 바이러스로 생각했다. 면역력이 떨어지지 않도록 과로를 피하고 병균 감염을 막기 위해 깨끗하게 손을 씻듯, 그는 부정적인 감정이 침입하지 못하도록 애썼다. 감기 몸살처럼 일주일씩 자신을 휩쓸고 가는 감정의 동요 같은 것이 없기를 원했다. 한두 번을 빼고는 잘 피해갔다. 정신위생의 승리라고나 할까. 그러나 ‘한국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은 순식간에 동호의 의식을 불안하게 했다. 동호의 마음이 휘청거렸다. 기억이 타올랐다. ‘돌아간다. 돌아가지 않는다. 아니 돌아간다……’

스마트폰의 진동이 울렸다. 10분 후 자기 집으로 오라는 니나의 메시지였다. 동호는 알았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잠시 후 찾아간 니나의 집 식탁에는 뜻밖에도 밥이 차려져 있었다. 미소수프, 장조림, 콩나물무침, 달걀부침, 그리고 김치까지. 대단한 요리라고 할 만한 것은 아니었으나 동호는 강렬한 식욕을 느꼈다. 열어놓은 창으로 이른 아침 바람이 시원하게 밀려왔고, 줄무늬가 있는 하늘색 커튼은 바람에 나부끼면서 햇빛을 반사했다.

“행복해지는데.”

니나를 바라보며 중얼거리던 동호가 물었다.

“니나, 한국에 마지막으로 간 게 언제였지?”

“나는 매 여름마다 가잖아. 그래도 벌써 1년이 됐네. 그런데 이번 여름은 그냥 뉴욕에 있으려고. 시카고에 사는 언니에게 잠깐 다녀올까 해. 왜?”

“잠시 서울에 다녀올 수도 있어서.”

“가면 되지 왜? 아, 미국에 온 이후 처음인가? 그러고 보니 한국에 가끔 다녀올 만도 한데, 전혀 안 갔네. 한국에는 누가 있어? 부모님? 설마 와이프가 있는 건 아니지? 싱글이라고 했잖아.”

“있으면 있다고 했겠지.”

니나가 갑자기 궁금해 못 견디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한국에서 뭔가 일이 있었구나. 그러고 보니 한국 얘기 하는 걸 거의 못 들었네. 언제 한번 들려줘.”

“기회가 되면 얘기할게. 아침에 할 이야기는 아니고, 술 마시면서 말할 기회가 있겠지.”

“그때 저도 끼워주세요.”

손으로 턱을 괴고 대화를 듣고 있던 줄리가 말했다. 동호는 열어놓은 창을 통해 흘러 들어오는 공기에서 꽃향기를 느꼈다. 식사를 마칠 무렵 동호는 한국에 가기로 마음먹었다.

마이클은 카키색 면바지와 회색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동호는 마이클과 월요일에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데, 니나의 집에서 돌아와 잠시 낮잠을 자다가 마이클의 전화를 받았다. 토요일인데도 급한 업무가 있었는지 사무실에 출근한 모양이었다. 사십 대 나이인 마이클은 한국계로 뉴욕에서 검사 생활을 짧게 하다가 마약범들이 서로 총격을 벌인 살인 사건 현장에서 구토를 일으킨 후 바로 변호사로 개업했다. 영어와 한국어를 완벽하게 구사하는 것은 물론, 언변과 수완도 좋은 그는 미국에 진출한 한국 대기업들의 뉴욕 비즈니스에 제법 관여했다. 동호는 그중 일부 업무를 배당받아 처리했다. 마이클은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비서실장이 전화했길래 승낙을 했습니다. SK가 다음 주 중에 달라는 의견서 초안만 작성해주시면 나머지 일은 당분간 제가 데이비드하고 분담해서 처리하지요.”

“감사합니다. 일단 한 달 정도면 될 것 같습니다. 급한 연락은 이메일이나 전화로 주시면 되고요.”

동호는 마이클의 머리 위로 멀리 헬리콥터가 날아가는 것을 보았다. 마이클은 쥐고 있던 수성 펜을 엄지와 검지 위로 한 바퀴 돌렸다.

“그런데 어떤 일인지요? 비서실장이 자세한 이야기는 안 하고, 서울시의 방대한 서류들을 조사할 필요가 있다고만 하더라고요. 그런데 왜 굳이 미국에 있는 강 변호사를 불러야 하는지는 모르겠네요.”

“오히려 미국에 있기 때문에 요청하는 것일 수도 있지요. 저도 아직 내용을 잘 모릅니다만, 외부에 알려져서는 안 되는 사안인가 봅니다. 시 내부에서 딱히 누구에게 맡기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정식으로 한국 내 법률사무소와 계약하여 맡기는 것도 내키지 않는 모양입니다. 일단 저도 이야기를 자세히 들어봐야 하는 형편입니다. 혹시 제가 처리하기 곤란한 사안이라고 판단되면 곧바로 돌아올 수도 있습니다.”

동호는 더 민감한 질문이 들어오기 전에 사무실을 나서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때 마이클이 일어섰다.

“급여는 그대로 지급하겠습니다. 시가 보상 차원에서 우리 사무소에 다른 국제자문 업무를 하나 맡긴답니다. 뭐, 강 변호사가 한 달쯤 휴직한다고 해도 크게 문제될 것도 없고요. 다시 이야기할 것이 있으면 월요일에 마저 하기로 하지요.”

동호는 가볍게 눈인사를 하고, 자기 방에 들러서 가방을 챙겼다.

 

동호는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부근의 한인 타운을 걸어서 통과해 워싱턴 스퀘어 공원 방향으로 계속 걸었다. 아직 달아오르기 전인 7월 초의 햇볕은 언제나 분주한 이 도시를 빛으로 감싸서 활기를 더해주었다. 조금씩 비대해지기 시작하는 가로수와 빌딩의 그늘, 그리고 신호등을 헤치고 계속 맨해튼의 남쪽으로 걸어갔다. 동호는 워싱턴 스퀘어 공원의 빈 벤치에 앉았다. 주말 오후를 즐기는 사람들 사이에 섞여 오랜 시간 분수를 바라보았다. 뉴욕에서 안식년을 보내고 있는 대학교 동창 부부가 느닷없이 다가와서 인사를 하기도 했다. 동호는 2년 전 뉴욕에 도착하자마자 이 공원에 와서 분수를 바라보던 때를 떠올렸다. 그때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영어는 서툴렀고, 마음은 텅 비어 있었으며, 잔고는 간당간당했다. 뉴욕에 아는 사람이라고 사촌 형밖에 없었는데, 기질이 맞지 않아서 왔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지도 않았다. 아니, 어느 누구하고도 인연으로 엮이고 싶지 않았다. 결국 포기하고 말았지만, ‘강아지를 한 마리 기를까?’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외국인 법률가들을 위해 단기간으로 제공되는 1년간의 로스쿨 과정을 마치고 뉴욕주 변호사 자격을 얻었을 때, 다시 이 공원의 벤치에 앉았다. 마이클 김 변호사의 법률사무소에 입사 지원을 하고 저녁 무렵에 면접을 보러 가던 길이었다. 이런저런 경력이 이미 전달되어 사실상 입사는 정해진 상태였으나, 이 나이에 면접을 다시 본다고 하니 긴장감이 없지 않았다. 그때에는 오늘과 반대로 노을이 물든 이 공원에서부터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까지 걸어갔다. 보안 검색을 거쳐 말로만 듣고 사진으로만 보던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경험은 신기했다. 낮에 마이클을 만났던 54층 회의실에서 바라본 뉴욕의 노을은 얼마나 장엄했던가. 제법 길었던 면접을 마쳤을 때에는 이미 어둑해져 있었고, 주변 빌딩들은 무수한 불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54층의 코너에 자리를 잡은 데다 두 벽면이 통유리였던 회의실로 쏟아져 들어오던 마천루들의 찬란한 불빛을 동호는 언제까지고 잊지 못할 것이다.

동호는 오늘은 페리를 타고 허드슨강을 건너 집으로 가기로 마음먹었다. 남쪽 11번 부두로 걸었다. 부두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허드슨강 건너의 위호켄으로 가는 페리를 탈 수 있었다. 위호켄에 도착할 때까지 뉴저지를 등지고 계속 맨해튼을 응시했다. 동호는 위호켄에서 다시 강변을 달리는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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