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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 허스트 '베니스' 개인전: 난파선에서 건져 올린 욕망의 보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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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년제 미술 축제 비엔날레에 새로움을 기대하는 미술 팬은 차츰 줄고 있다. 베니스에 도착해서 비엔날레 전시장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비엔날레 피로감'부터 느꼈다. 필자가 느낀 이런 낭패감은 무수한 비엔날레들이 반복하는 판에 박힌 비엔날레 포맷에 신물을 느낀 관객이라면 공감하리라. 비엔날레가 내놓을 새로움이 고갈된 것 같다. 때문에 베니스 비엔날레의 역할은 어느덧 같은 기간 베니스에서 열리는 다른 전시회들을 우회적으로 홍보하는 몫에 있는 듯하다. 올해 베니스에선 두 영국 작가 데이비드 호크니와 데미안 허스트의 개인전이 비엔날레 이상으로 입길에 올랐다. 선배 세대 호크니는 5년 전 <라디오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조수에 의존해서 작품을 제작하는 방법을 "장인에 대한 모욕적인 처사"라고 비판한 바 있는데, 언론은 호크니의 발언을 수백 명의 조수를 고용하는 데미안 허스트를 향한 비난으로 해석한 기사를 내보냈다. 그 둘이 올해 베니스에서 멀지 않은 거리에서 각자의 개인전을 열고 있었다. 하지만 호크니와 허스트는 동시대 미술가라는 동일한 범주 안에 분류될 뿐, 실상 서로 전혀 다른 차원의 미적 토대 위에 서있다. 데미안 허스트는 회사 여러 곳을 운영하는 사업가형 미술가며 고용된 직원이 150명, 바쁠 땐 250명을 넘기기도 한다. 이런 규모에서 생산되는 미술품이 흔히 떠올릴 수 있는 미술품과 같을 리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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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 허스트의 개인전이 열린 푼타델라도가나의 내부

비엔날레보다 1달 일찍 개막했으나 폐막은 며칠 늦게 하는 데미안 허스트의 매머드 급 개인전 <난파선 '믿을 수 없는'호號에서 인양한 보물들 Treasures from the Wreck of the Unbelievable> (2017.0409~1203 푼타 델라 도가나 + 팔라초 그라씨)은 프랑스의 백만장자 프랑수아 피노가 소유한 베니스의 대형 전시장 두 곳에 신작을 쏟아 냈다. 포름알데히드를 채운 유리 캐비닛에 상어와 포유류 동물을 담은 설치물로 충격미학을 선점한 데미안 허스트의 신작은 2천 년 전 인도양에 침몰한 '믿을 수 없는'호號라는 난파선에서 인양한 보물 이야기다. 전시장에는 바다 속에 2천 년 동안 잠겨 있었다는 듯 산호가 덕지덕지 붙거나 녹이 쓴 고대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물론 이 모두는 인양한 보물을 흉내 내어 3년 전부터 제작된 동시대 미술품들이다. 전시장에는 수심에서 잠수부들이 유물을 인양하는 장면을 담은 사진과 동영상 기록도 상영되고 있으나 이 역시 연출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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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초와 산호를 브론즈로 제작한 작품의 표면처리

작품 개수가 189점에 달하고 이 가운데 작은 장신구들을 모아놓은 캐비닛만 21개나 될 만큼 작품의 규모가 어마어마하다. 하지만 이 전시는 작품 개개의 완성도를 확인하기보다, 한 공간에 산재된 작품 전체를 한꺼번에 체험하며 바라볼 때 입체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전시다. 그 점에선 비엔날레와 흡사한 기획안과 규모를 갖고 있는 셈이다. 사업가처럼 미술을 다루는 데미안 허스트의 태도는 일개인이 온전히 감당하는 종래의 미술 개념과는 다른 차원에서 읽혀야 할 것이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미술가 데미안 허스트에게 거부감을 느끼는 이들이 많지만, 세상의 변화와 함께 동시대 미술의 개념도 변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허스트의 개인전은 미래에 나타날 동시대 미술의 여러 조류 가운데 하나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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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과 은으로 만든 '잘린 메두사의 머리'

이번 개인전을 위해 5천만 파운드(746억 원) 이상의 돈을 썼다고 BBC에서 털어놓은 허스트의 진술처럼, 이 전시는 금전적인 지원이 보장될 때 실현 가능한 미적인 상상력과 조형적 완성도의 결말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2천년 동안 수심에 잠겨있던 고대 유물을 흉내 낸 작품인 만큼, 작품의 재료로 금 은 금박 마노 공작석과 갖은 색을 띤 대리석같은 값나가는 재료들이 풍족하게 사용됐다. <잘린 메두사의 머리 The severed head of Medusa>는 금과 은, 초록색 공작석, 그리고 크리스털로 제각각 제작되어 유리관에 진열되었다. 소장이 불가능한 고대 유물을 상상력과 재력을 동원해서 미술품이라는 형식으로 연출해 내놨다. 이는 어쩌면 허스트의 개인전이 열린 베니스 미술관의 소유주 프랑수아 피노가 재력으로 예술에 투자하는 태도와도 닮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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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색 공작석으로 만든 '잘린 메두사의 머리'를 보고 있는 필자

출품된 신작 가운데에는 어떻게 전시장 안에 들여놨는지 어리둥절할 만큼 규모가 큰 작품도 있다. 팔라초 그라씨 1층 홀에 세운 <사발을 든 악마 Demon with bowl>는 18m의 높이에 부피도 상당해서 미술관 안으로 통과할 만한 입구가 통 보이지 않는다. 듣자하니 잘게 나눠 미술관에 들여온 부분들을 이어 붙여 전체를 완성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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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미터 높이의 '사발을 든 악마'

금기로 통하는 대상을 디테일까지 재현하는 점에서 허스트의 거의 모든 작업은 포르노그래피를 중후한 형식으로 다듬은 미술품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머리가 잘려 나간 농염한 여체 입상 <잠수부 The diver>는 성기와 젖꼭지의 디테일 묘사에 유독 신경을 쓴 것 같았고, 고대 여성상의 어깨 위에 파리의 머리를 올린 <변신 Metamorphosis>에서 파리의 얼굴은 포르노그래피에 단골로 출현하는 벌린 여성기의 모습을 하고 있다. 여성의 인체를 재현한 다른 작품들에서도 여성기의 갈라진 틈을 애써 강조하거나 젖꼭지를 사실적으로 묘사하려는 의도를 읽을 수 있었다. 일테면 성욕과 물욕 또는 잔혹함 추함 등 현실에서 겉으로 드러내기 어려운 원초적인 욕구를 세밀하게 구체화시킴으로써 보는 이의 욕구불만을 충족시키려는 의도가 읽힌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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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수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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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의 머리 부분

그리스 로마 신화에 출현하는 외눈박이 괴물 키클롭스를 실존하는 유골인양 재현한 <키클롭스의 두개골 Skull of a Cyclops>과 이집트 스핑크스의 캐릭터를 현대 아이돌 스타의 외모처럼 꾸민 <스핑크스 Sphinx> 에선 예술가의 능청맞음과 고대 도상을 현대적으로 수용하는 유연함도 보인다. 난해함의 늪에 빠진 현대미술이라는 미로 안에서, 거금을 동원해서 완성한 데미안 허스트의 허구적인 드라마는 인간의 원초적 감정과 장식 욕구를 과시적으로 충족시킨다. 바로 그 점 때문에 그의 신작은 미술의 원형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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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클롭스의 두 개의 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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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핑크스'

* 이 글은 <플레이보이 코리아>(10월호)에 게재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