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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즈트리'와 공공미술 수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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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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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일간지가 서울로7017의 기념설치물 슈즈트리에 대한 의견을 묻는 전화를 걸어왔다. 문제될 게 없는 작업이라고 길게 설명해줬다. 다음날 뉴스를 보니 내 긴 변호는 통편집 되었더라. 뉴스는 프레임을 정하고 의견을 선별한다. 슈즈트리를 다룬 타 언론사도 비난의 프레임을 쓰는 점에선 같았다. 언론은 옳고 그름보다 독자를 낚는 선정적인 미끼에 주력한다. 비난 일색으로 치우친 기사들은 불평하는 시민의 진술로 편집해서 천편일률적이었다. 슈즈트리를 둘러싼 불평은 크게 셋. 1억4천만원 세금. 9일이라는 짧은 전시. 공공미술의 부적절성. 풀어 말하면 고작 9일 간 헌신 3만 켤레의 넝마를 보려고 세금 1억4천만원을 썼냐는 것. 시민의 불평만 편집한 보도나 대중영합적인 칼럼을 읽고 있자니, 차라리 이 작업을 추진한 공무원의 예술 감각이 한결 나은 게 분명하다. 편향된 기사와 칼럼은 시민과 현대 미술 사이를 멀리 갈라놓는다.

불평 셋을 다시보자. 신발과 타이어는 폐품을 재활용했고 작가는 무급여로 일했다. 1억4천만원의 거의 운반과 지지대 설치에 썼다. 이 정도 규모면 현실적인 예산이다. "내 세금으로 뭘 한 거냐."라는 선정적인 제목의 기사도 봤다. 슈즈트리가 문제될 게 없다 믿는 나 역시 세금을 납부한 시민이니 작품을 볼 권리가 있다. 거금을 들여 고작 9일 열리는 짧은 전시기간도 도매금으로 비난받는다. 우리의 취향은 바뀐다. 전국에 무수한 공공미술은 반영구적으로 설치되어 우리의 취향마저 고정시킨다. 좌대 위에 여러 작품을 1년 또는 2년 주기로 교체 설치하는 런던 트라팔가 광장의 '네번째 좌대 프로젝트'외에도 일시적인 전시를 목적으로 설치되는 유연한 공공미술은 차츰 늘고 있다. 짧은 기간은 문제가 아니라 미덕이다.

흉물 논란은 슈즈트리를 변호할 때 가장 큰 난관이다. 취향은 사람마다 다르다. 미적 취향과 정치 소신은 설득으론 돌려놓기 어렵다. 개인의 존재감과 연관된 가치관이어서다. 설령 공공미술이라 한들 만인의 취향을 충족시킬 순 없다. 군말 나오지 않게 하려면 광화문 이순신과 세종대왕처럼 위인상 혹은 포항 과매기, 영덕 대게, 금산 인삼, 청양 고추처럼 곧잘 웃음의 소재로 전락하는 지방 특산품 조형물같은 무색무취한 공공미술만 살아남는다. 있는 듯 없는 듯 무난한 조형물은 충격과 불편한 문제를 제기하는 예술의 본질과도 먼 거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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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즈 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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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즈트리 앞에서 기시감이 든다. 작년 홍대 앞 '일베조각상' 올해 국회에 걸린 '더러운 잠'은 공분한 시민의 손에 파손됐다. 20년 전에도 같은 일이 있었다. 1997년 삼성동 포스코 사옥 앞에 세운 프랭크 스텔라의 아마벨이다. 작년 국제 미술지 아트넷뉴스는 가장 미움 받는 공공 조형물 10선에 아마벨을 올렸다. 당시 시민이 철거를 요구한 이유는 비행기가 추락한 잔해처럼 흉측해서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다는 것과 고철덩이에 불과한 공공미술 가격이 17억 5천4백만 원에 설치비 1억 3천만 원이 투입된 점이었다. 슈즈트리가 직면한 비난과 거의 흡사하다. 나는 현대미술이 시민에게 꼭 필요한 문화 소양일 리 없다고 믿는다. 그러나 현대미술의 이해를 날로 먹을 순 없다. 작품 파손으로 자신의 분노를 표현하고야 마는 의분의 시민이나, 작품을 폄훼하는 선동적인 칼럼과 기사 앞에선 비평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강연 중에 자주 하는 말이 있다. 문화적 소양은 인내력과 관대함을 요구 한다고. 기사를 찾다 흉물 논란에 슈즈트리를 만든 황지해의 입장을 발견했다. "슈즈트리가 흉물인지 어떤 예술가가 마음 담아 이야기하려고 것인지 조금만 인내심을 가져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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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대 앞 '일베조각상' 훼손 전, 후.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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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크 스텔라의 '아마벨'. ©hello posco

* 이 원고는 〈캠퍼스 씨네21〉 6월호에 실린 칼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