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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비엔날레 리뷰의 매뉴얼 | 2016 광주비엔날레, 부산비엔날레, 미디어시티서울을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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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부산 서울 등지에서 짝수 해마다 격년제로 열리는 국내 미술 비엔날레를 다녀오고 나면, 나는 지역별 비엔날레를 개별적으로 다루거나, 비엔날레 전체를 묶어 총평을 쓰는 식으로 매회 비엔날레 리뷰를 한 회도 거르지 않고 발표해왔다. 한 회도 빼놓지 않는 비엔날레 리뷰는 내겐 일종의 직업적 인습인 셈이다. 올해도 미디어시티서울, 광주비엔날레, 부산비엔날레 순으로 개막식에 참석해 전시를 봤다. 이 정도면 올해 국내 비엔날레를 어지간히 챙겨본 축에 속할 게다. 화려한 개막식을 연 국내 미술 비엔날레들 중 11월6일 폐막한 광주비엔날레를 시작으로 이달 안에 모든 비엔날레들이 하나씩 폐막한다. 내가 본 세 편의 미술 비엔날레에 대한 총평을 아래처럼 요약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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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시티서울 2016

1. 비엔날레, 왜 이토록 많을까?

세계 유명 동시대 미술가들의 작품들을 결집한다는 점에서, 비엔날레의 고정적인 풍경은 현대 미술의 격전장이라는 인상을 줄 수도 있다. 그렇지만 비엔날레 개막식에 참석하러 광주나 부산으로 향하는 전문가의 마음이 늘 기대에 차있는 건 아니다. 전공자 입장에서 비엔날레는 2년 주기로 광주나 부산 등지로 떠나는 외유의 성격이 분명히 있다. 축제 분위기로 들뜬 외지에서 동료 미술인들과의 만남을 주선해주는 지방의 문화 행사라는 인상이 내겐 없지 않다. 드물게 남다른 기획안을 전시로 구현한 성공적인 비엔날레를 만날 때도 있지만, 그런 일은 어디까지나 드문 일이다. 매 회 광주 부산 서울 등지에서 개최되는 이 초대형 미술 축제에 대한 평가가 호평보다는 혹평으로 쉽게 기울 때가 많은 것도 비엔날레를 향한 기대감이 크지 않다는 점을 방증한다. 비엔날레 과잉은 관람의 피로감을 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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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비엔날레 2016

2. 미술의 사회적 역할

'제8기후대(예술은 무엇을 하는가?)'라는 전시제목 속에 공공의 가치를 표방한 2016 광주 비엔날레(2016.0902~1106)의 기획안은 누구도 탓하기 힘든 윤리적 진입장벽을 친다. 올해 광주의 예술감독 마리아 린드는 예술의 사회적 역할을 반영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해왔다. 비단 한국만의 사정은 아닐 터이나, 주류 미술계가 예술의 사회적 역할이라는 오랜 주제를 꽤나 오랫동안 신경 쓰고 있는 건 자명하다. 제도가 보장해 준 현대미술의 자리에 비해, 그 지위에 어울리게 미술이 동시대 공동체나 시대정신과 모종의 교감을 나눈다고는 전공자마저 느끼지 못하니 말이다. 그러니 가시적으로 사회 현상을 재현하거나 사회적 발언을 탑재하거나 불특정 관객에게 영문 모를 동참을 유도하는 관객 참여형 작품(이나 기획)이 어딜 가도 빠지질 않는 단골 프로젝트가 되지 않았겠나. 올해 광주는 연계 프로그램으로 올해 맨부커상을 수상해서 인지도가 높은 소설가 한강을 포함해서 발제자 4인을 초대한 포럼을 열었고, 비엔날레관 밖에서도 대인시장에 마련된 공간에서 월례회monthy gathering를 마련해서 독서모임 광주걷기 등을 진행하며, 광주 두암2동 커뮤니티센터에서 지역주민과 대화를 하는 워크숍을 진행한다고 소개되었다. 이런 전시 프로그램의 실행을 확인이라도 시키듯, 프레스 방문자들이 찾은 대인시장의 전시공간에는 외국서적들이 빼곡히 꽂혀있었고, 두암2동 커뮤니티센터에선 행사 관계자와 지역주민이 대화를 나누는 영상이 틀어지고 있었다.

공동체 친화적 기획안의 선포는 차츰 고립된 섬이 되어가는 동시대 미술의 외연 확장 의지를 자명하게 드러낸 것일 게다. 하지만 이런 기획들이 전시 내내 진정성을 갖고 관객을 맞이하긴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이번 행사를 위해 해외 미술기관들로부터 기증받은 외서가 대부분이어서 지역미술인이 함께 독서하긴 어려운 교재들로 보였고, 두암2동 커뮤니티센터에서 진행된 일시적인 주민과의 대화도, 광주비엔날레 행사가 끝나면 철수하는 프로그램이었다. 미술의 사회적 역할을 묻는 질문은 언제나 소중하다. 그렇지만 실행파일로 미술이 가동하기 힘든 이상주의를 설정하고 끝없이 열거하는 전시 기획에, 미학적으로건 윤리학적으로건 평균점 이상을 주긴 어렵다. 왜냐하면 기획안으로 채택된 사뭇 진지하고 무거운 주제들은 진정성 없이 소재주의로 쉽게 갖다 쓴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무거운 담론을 내세우는 담론 지향적 비엔날레는 초대형 미술전시가 거역하기 힘든 트렌드가 되었다. 사회학 담론을 취급하지 않으면 깊이 없고 경박해 보일까 근심이라도 하는 추세인 것 같다. 물론 의제를 누락한 기획은 어불성설이리라. 덕분에 담론으로 넘쳐나는 서문들은 사회학 서적을 방불케 하는 두툼한 도록으로 태어난다. 평소 사회학이나 사회참여와 거리를 두고 살았을 기획자들이 쏟아내는 장문의 글은 열등감의 반영 혹은 기획의 관행을 거역하지 못한 결과로 보인다. 그 누구도 온전히 감흥하지 못할 담론 과잉의 전시 기획은 어쩌면 동시대 미술이 거쳐야 할 과도기적 현상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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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비엔날레 2016

3. 관객 참여라는 신기루

비단 한국만의 사정은 아닐 터이나, 주류 미술계가 예술의 사회적 역할이라는 오랜 주제를 꽤나 오랫동안 신경 쓰고 있는 건 자명하다. 제도가 보장해 준 현대미술의 자리에 비해, 그 지위에 어울리게 미술이 동시대 공동체나 시대정신과 모종의 교감을 나눈다고는 전공자마저 느끼지 못하니 말이다. 그러니 가시적으로 사회 현상을 재현하거나 사회적 발언을 탑재하거나 불특정 관객에게 영문 모를 동참을 유도하는 관객 참여형 작품(이나 기획)이 어딜 가도 빠지질 않는 단골 프로젝트가 되지 않았겠나. 공동체 친화적 기획안의 선포는 차츰 고립된 섬이 되어가는 동시대 미술의 외연 확장 의지를 자명하게 드러낸 것일 게다. 미술의 사회적 역할과 지역공동체의 참여는 비단 올해 광주 비엔날레만 강조한 방침이 아니다. 2012년 광주 비엔날레에선 '대화와 협업'을 강조하며 역사와 사회현상을 주목하는 6개의 공공적 주제를 다뤘다. 2012년 부산 비엔날레는 일반 시민의 전시 참여를 '배움 위원회'이라는 그럴싸한 채널로 구현하려고 했다. 비단 관객을 끌어들이거나 관객 속으로 다가가는 기획안은 초대형 미술축제의 존립을 입증하는 제스처처럼 굳었다. 미술 비전공 관객을 배려하거나 사회 현상을 예술이 재현 주제로 다루는 게 문제일까? 당연히 문제일 리 없으며 권장해 마땅하다. 한데 관건은 이 선한 프로젝트가 그 수혜자인 한국 관객의 현실적 수준을 고려하지 않고 무분별하게 제시되고 채택된다는 데에 있다. 현대미술을 문화 속에 토착화 시키지 못한 한국에서 상부 구조(미술 전문인)와 하부 구조(일반인) 사이의 수준 편차는 실로 크다. 일반인의 보편적인 무지와 무관심 속에 상부 구조(제도 미술계)는 느린 속도여도 꽤 멀리 공동체로부터 이격되어 나왔다. 그러니 기본 문법조차 모르는 이들에게 참여를 유도하거나, 관계 미학 예술이 대상으로 간주하는 불특정 개인의 자발적 동참을 기대하는 건 무의미에 가까우며, 대개의 참여는 전시장에 적힌 지시대로 관객이 따라하는 수준에서 완성(!) 되곤 한다.

넘버링을 붙여 위에 올린 2016년 한국 미술 비엔날레들에 관한 총평은, 지나간 국내 비엔날레 행사 때마다 내가 기고했던 당시의 글들을 거의 고스란히 재활용해서 완성한 거다.

1. '비엔날레, 왜 이토록 많을까?'는 2014년 비엔날레 행사에 대한 총평 원고(광주와 부산의 격년제 미술축제 관전기: 비엔날레가 봉착한 포화점 <노블리안> 2014년 11월호)의 지문 일부를 고치지 않고 가져왔다.

2. '미술의 사회적 역할'은 2012년 광주비엔날레에 관해 주간지에 기고한 리뷰(<시사인> 2012년 한가위 합병호 263.264호)와 2012년 광주 비엔날레와 부산 비엔날레에 대한 총평(돌고 돌고 돌고: 견제 받지 않는 비엔날레'들'의 악순환 < 컨템포러리 아트 저널 contemporary art journal > 2012년 가을호)의 지문들을 적당히 섞은 후에 단어와 문장 일부만 2016년 행사에 적합하게 수정한 거다.

3. '관객 참여라는 신기루'도 2012년 <컨템포러리 아트 저널> 가을호 원고에서 지문 일부만 올해의 조건에 맞춰 조금 다듬었다.

'비엔날레, 왜 이토록 많을까?' '미술의 사회적 역할' '관객 참여라는 신기루'라는 세 개의 화두는 매회 방문하는 국내외 모든 미술 비엔날레 전시장 안에서 털어낼 수 없었던 의문점들로, 이 낯익은 화두는 예외 없이 반복된다. 올해 비엔날레 전시장들을 지배한 것도 단연 세 화두였다.

이 같은 이유로 광주 부산 서울에서 열린 비엔날레 셋을 둘러보던 중, 비엔날레 리뷰를 올해 처음으로 다루지 말지 고민했다. 반복적으로 만나는 화두이되, 외부의 비판을 피하는 일종의 안전장치처럼 굳은 낯익은 화두에 대해 대동소이한 논평을 쓰는 건 무의미하게 느껴져서다. 동일한 화두여도 매회 비엔날레들이 전회와 같을 턱이 없음을 나도 잘 알고 있음에도 그렇다. 내게 비엔날레 리뷰에 대한 동기부여를 앗아간 더 큰 주범은 통상 한나절 가량 주어지는 관람 일정 내에 비엔날레 본 전시장 말고 여기저기 산재된 전시장들로 확장되고 있는 비엔날레들의 추세 앞에서 느끼는 무력감과 고단함이었다. 본 전시장 외에 여러 공간으로 확장하는 비엔날레의 과유불급형 물량주의는 비평가 개인이 절대 소화할 수 없다. 여유를 충분히 두고 비엔날레를 관람하면 되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어떤 평론가도 지금의 비엔날레 행사를 시간 여유 충분히 두고 꼼꼼히 뜯어봐야할 과제로 여기지 않는다. 비엔날레가 유력한 미술행사로 간주되는 점과, 비엔날레가 업계에선 더는 비평적 매력을 주지 않는 점은 공존한다.

'미술 평론은 지는 해, 전시 기획이 뜨는 해'라는 말은 십 수 년 이상 유통된 이야기로, 한국에서 비엔날레 급 대형 미술행사가 출현한 1995년(1회 광주비엔날레가 열린 해)이후 기획자의 우세가 시작되어 지금에 이르렀다고들 본다. 기획자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는 한 인터뷰에서 "지난 20년간 '큐레이터'란 용어의 사용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이는 항해술과 관련이 있다. 이제 사람들은 정보의 홍수를 헤쳐 나가야 하니까, 길잡이와 편집자가 필요해진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평론(가)의 위기라는 낯익은 화두는 기획 전담팀이 만드는 초대형 규모로 실현되는 오늘날 전시장 풍경 앞에서 평론가 개인이 감당할 수 없는 물리적인 한계와 같은 말이기도 하다. 물량주의로 밀어붙이는 초대형 기획 전시들은 평론가 개인이 세심히 살펴 해석하기 어려운 구석이 많을 수밖에 없다. 한나절 가량 주어진 시간 안에 집중적으로 관찰한 결과를, 몇 개의 포인트로 뽑아서 거친 총평을 내놓거나 인상에 남은 대표작 몇 점을 짚어 논평하는 식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다.

'담론 과잉', '공동체에 대한 미술의 기여' '관객참여 프로그램의 전시행정'이라는 미술 비엔날레가 되풀이하는 안전장치 앞에서 평론가 개인이 할 수 있는 가장 경제적인 대응에 대해 생각해봤다. 그 결과 과거 비엔날레 때마다 내가 발표한 논평 중에 동어반복 되는 지문을 뽑아 현시점에 맞춰 재구성한 리뷰를 떠올렸다. 그 결과가 이 글이다. 이 글은 또한 지나간 비엔날레들을 읽어온 나의 해석을 넘어서는 색다른 해법을 스스로 찾지 못해 내놓은 자기 타협의 결과물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