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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베 조각상'의 고차원 방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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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베 조각상'으로 알려진 <어디에나 있고, 아무 데도 없다>가 파괴된 모습.

이틀을 버티지 못하고 파손됐다. 논의 대상이 사라지니 논의의 여지마저 실종됐다. 세간에서 '일베 조각상'이라 불리며, 홍대 정문 앞에 세워진 홍대 미대 조소과 환경 조각연구 야외조각전에 출품된 홍기하 학생의 과제 <어디에나 있고, 아무 데도 없다>는 2016년 5월30일 세워졌지만, 언론 보도로 갑론을박이 시작된 31일 밤과 다음날 새벽까지 두 차례의 공격을 받아 파손된 모습으로 언론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비슷한 운명을 노정한 가까운 사례로 2015년 9월 서울시립미술관 남서울분관에서 전시된 홍성담의 <김기종의 칼질>이 떠오른다. 리퍼트 미국 대사를 테러한 사건을 묘사한 이 회화 작품이 미술관에 전시되자, 보수 언론은 폭력 미화라는 기사와 칼럼을 내보냈고, 기사가 나간 당일 전시감독은 작품을 전시장에서 떼어냈다. 논란이 일자 작가의 동의 없이 작품을 철수하는 바람에 작품을 둘러싼 논의의 여지마저 지워졌다. 이번 사태와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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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담의 <김기종의 칼질>

해외에서 벌어진 유사한 사례로 2015년 1월 프랑스의 시사 풍자지 <샤를리 에브도> 테러 사건이 있다. <샤를리 에브도>가 이슬람교만 배타적인 풍자 대상으로 삼았던 건 아니다. 전 세계 정치인과 종교 권력을 조롱하는 만평을 꾸준히 실어왔지만, 유독 이슬람 원리주의자들만이 만평에 총기난사로 응답했고 그 결과 12명의 사망자와 10명의 부상자를 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샤를리 에브도> 테러 사건, 홍성담 작품 철수 사건, '일베 조각상' 파손 사건은 모두 특정한 누군가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든 표현물에 물리적인 제압으로 화답한 경우다. <샤를리 에브도> 만평의 직설적인 풍자에 자신의 종교 신념이 훼손당했다고 믿은 일부 무슬림이 물리력으로 대응했고, 홍성담의 보수 정치에 대한 직설적인 풍자화에 자신의 정치 소신이 훼손당했다고 믿은 보수 언론과 여론이 그림을 전시장 밖으로 내쳤으며, 제작자의 의도야 어떻건 1차원적으로 일베의 표식을 담은 조각상에 일베의 행태에 불쾌감을 느껴온 이들이 작품을 파괴했으니, 이 세 사건은 유형적으로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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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주간지 <샤를리 에브도>에 2012년 9월 게재된 만평. 무함마드가 알몸으로 누워 "내 엉덩이가 마음에 드니?"라고 말하는 장면을 묘사했다.

<샤를리 에브도> 사건과 홍성담 작품 철거 당시 나는 해당 매체와 작가를 두둔하는 글을 썼지만, <샤를리 에브도>의 만평이나 홍성담 작품의 완성도를 높게 보진 않았다. 특히 홍성담 작품이 한국 사회에서 갑론을박을 일으킬 때마다 나는 그를 두둔하는 원고 청탁과 인터뷰에 응했지만 내 입장은 기본적으로 다음과 같았다.

"그린 이의 과거사도 이 소동에서 이해의 맥락을 제공한다. 홍성담은 독재정치 시절 그린 걸개그림이 국가보안법에 걸려 조사실로 끌려가 무려 25일간 물고문을 받은 전력이 있다. 그런 이라면 과거 회귀를 직면하는 공포감이 보통사람보다 갑절은 클 것이다. 과거 회귀의 공포감을 조장하는 자를 법적으로 어떻게 처벌할 수 있을까? 그 대안으로 정치 현실을 은유적으로 조롱한들 이런 비난까지 감당해야 할까? 권영세 새누리당 종합상황실장은 "예술은 예술이어야 한다"며 법적 대응을 암시했다. 풍자적 예술은 그냥 예술로 보면 된다. 취향 차이를 빌미로 민심 규합을 노려 작품을 정치적으로 악용하려는 게 정작 문제이다. 정치가 정치다웠으면 한다."
- [논쟁] 홍성담 화백의 '유신풍자화', 어떻게 봐야 하나 (한겨레. 2012년 11월29일)

"그러면 나는 홍성담의 미학에 공감하는 걸까? 그렇지 않다. (중략) <김기종의 칼질>처럼, 제목과 묘사를 직설법에 올인 시키는 미학을 평소 선호하지도 공감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이런 미적 직설화법을 특정 화가가 고수한다면, 그를 그렇게 만든 우리 사회를 돌아봐야 한다. 그게 예술 감상과 평가의 정상성일 게다. 이번 홍성담의 작품 철수를 비판하면서, 내 비평적 취향까지 고백하게 만드는 이 사회 분위기가 진짜 싫다."
- 홍성담 <김기종의 칼질> 철수 소동 (미술세계. 2015년 11월)

<샤를리 에브도>, 홍성담, '일베 조각상' 셋을 관통하는 논점은 '누군가의 마음에 상처가 될 가능성만으로, 어떤 표현이 제약될 수 있느냐'이다. 물리적인 상해나 인명 피해가 아닌 마음의 상처를 누군가 받을 가능성만으로 '다양한 해석의 층위'를 품은 예술 표현이 제약되어야 하냐는 게 관건이다. 요컨대 산 동물을 학대하거나 제 3자에게 물리적인 해악을 끼치는 걸 작품의 콘셉트로 포함시킨 작품이 있다면, 이는 표현의 자유를 논할 필요 없이 사법적 관리 대상일 것이다. 그렇지만 문제는 '누군가 불쾌하게 생각할 여지'만으로 예술 표현이 제약될 수 있느냐는 거다.

수업 나가는 미대의 이론 수업에서 '일베 조각상'을 주제로 다뤘더니, 부적절한 작품이라고 밝힌 학생들이 있었다. 이들 말고도 불쾌감을 느꼈다는 내 주변의 지인들도 있다. 이들의 견해를 종합하면 이렇다.

1. 일베 표식을 가감 없이 그대로 사용한 게 문제다. 변형을 가했어야 작품이 된다.

2. 작품을 홍대 정문에 대형 조형물로 설치한 게 문제다(이런 지적이 가장 많다).

3. '일베 조각상'을 세우고 파손되는 전 과정이 일베 회원이 좋아할 일이니, 결과적으로 나쁜 작품이다.

4. 작가의 의도("일베라는 건 실재하지만 그 실체는 보이지 않는다, 가상의 공동체 같은 것인데 그걸 보고 만질 수 있는 실체로 만들어보고 싶었다. 일베를 옹호 또는 비판하려는 의미가 아니다")가 전달되기 어려운 작품이다.

그렇지만 나는 '일베 조각상'이 바로 이 네 요건으로 인해 좋은 작업이라고 본다.

일베의 표식이 대학에 등장했다는 머리기사만 읽었을 땐 나도 어떤 철없는 일베 회원이 교내에 일베 조형물을 몰래 설치하고 달아났다는 얘긴 줄 알고 한심하다고 느꼈다. 한데 기사를 살펴보니 홍대 조소과에 개설된 과목에 출품된 과제물로서, 제작 의도와 작품 설치 장소 등에 관해 학과의 공식 허가를 받고 전시된 거였다. 더구나 학생의 제작 의도를 읽어보니 흔한 미대생의 과제작 치곤 보기 드물게 시의성을 띤 괜찮은 발상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위의 네 가지 문제 제기에 대한 내 입장은 이렇다.

1. '일베 조각상'은 이미 작가의 변형이 가해졌다. 일베의 손 표식은 자신이 저지른 패악을 신분을 숨긴 채 드러낼 때 쓰는 비겁한 제스처다. 이에 반해 '일베 조각상'은 제작자의 신분도 작품의 제목도 모두 명기 되어 있다. 또 비겁자들의 익명의 손들을 거대한 기념비로 부풀려서 공공장소에 세웠으니 이만저만 작가적 변형을 가한 게 아니다.

2. 현재 한국에서 벌어지는 일베라는 사회 현상을 다룬 이 작업이 일부 미대생만 드나들 협소한 교내에 전시되었다 치자. 이건 어떤 울림도 주지 않는 허망한 아우성이 되고 만다. 미술대학과 미대생의 존재감은 대외적으로는 물론이거니와 그 내부에서조차 논쟁을 만들지 못할 만큼 '온실 속 미학'에 갇혀있는 형편이다. 논쟁을 만들지 못하는 게 문제지, 논쟁을 만들어서 문제가 되는 일은 미대에서 거의 없다. '일베 조각상'의 변별점은 온실에 갇힌 미학을 외부의 장으로 확장시킨 데에 있다.

3. 어느 세상에건 익명 뒤에서 패악을 저지르는 비열한 사람들은 있게 마련이다. 화제가 된 '일베 조각상'으로 인해 비겁한 무리들이 어디선가 즐거워하는 꼴까지 근심해야 할까? 아마 자신들의 존재감을 환기시킨 이번 소동에 그들은 흐뭇해할 게다. 그래봐야 인생 낙오자들이다. 그런 섬세한 부분까지 연연하기보다, 홍기하 학생의 작품 제목처럼 '어디에나 있고, 아무 데도 없는' 일베의 존재를 애써 지우려는 태도가 더 문제다.

4. 가장 뜨거운 화두를 다룰 차례다. '일베 조각상'에 분개한 불특정 다수와 테러를 가한 소수는 이 작품에서 작가의 의도가 읽히지 않는다고 보는 모양이다. 당연히 읽히지 않는다. 손쉽게 읽힌다면 현대미술도 아니다. '일베 조각상'을 일베 기념비인 양 1차원적으로 읽었으니, 테러라는 1차원적인 대응으로 맞선 거다. 현대 시각예술을 1차원적인으로 해석하는 대중의 관성은 기본적으로 미술 전공자와 비전공자 사이에 놓인 건널 수 없는 '진도' 차이가 만든 것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해석의 층위가 한 겹뿐인 미술품만 접하면서 성장했다. 이런 작품은 생각할 여지를 남겨두지 않는다. A는 A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작품들 말이다. 멀리 갈 필요 없이 광화문 광장에서 방문자들이 기념사진 찍기 여념 없는 세종대왕상을 떠올리면 된다. 이 전형적인 공공 조형물은 해석의 층위가 단 한 겹이다. 나 같은 미술전공자는 대개 이런 한 겹짜리 조형물을 평가절하 한다. 해석에 수고를 들일 필요가 없는 한 겹짜리 조형물에 더해, 비전공 일반인들은 미술품이 아름다워야 한다는 굳은 믿음까지 품고 있으니, 전공자와 비전공자가 맞붙으면 풀어야 할 오해가 끝없이 많다. 일반인에게 우리 사회 극우 누리집의 표식을 재현한 '일베 조각상'이 어떻게 읽힐지는 불문가지다. 아름다운 외관도 아닌 '일베 조각상'이 1차원적으로 일베 기념비와 등가로 읽혔을 게다. 이 같은 대중의 독해법은 자연스럽다. 그렇지만 사회 구성원 다수가 '일베 조각상 = 일베 기념비'라고 굳게 믿었다 한들, 그 해석이 정당화되는 건 아니다. 더구나 현대미술 언어의 진도를 꾸준히 따라잡았을 턱이 없는 일반인의 해석이라면 오죽하랴. 밉건 좋건 '일베 조각상'은 여러 해석의 층위를 품은 작품의 자격으로 만들어졌다.

'일베 조각상'으로 알려진 홍기하의 공공조형물 <어디에나 있고, 아무 데도 없다>의 평가 지점을 나는 다음과 같이 정리해봤다.

1. 파손되어 사라진 작품
'일베 조각상'은 공개된 후 이틀을 버티지 못하고 사라졌다. 파손될 목적으로 제작되거나 사진 기록만 남기려고 완성되는 작품은 거의 없다. '일베 조각상'의 실체는 사라졌지만, 단 이틀의 짧은 동안 사회적 찬반양론을 만들었고, 향후 비슷한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반복해서 인용될 터이다. 그러니 비평적 의미는 보장받은 셈이다. 사진기록만 남은 현실을 안타까워할 일만은 아니다.

2. 동시대 한국성 투영
작가의 의도야 어떻건, 작품의 파손은 미술의 의미를 1차원적으로 읽고 1차원적으로 응대하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성급한 기질을 피드백으로 끌어냈다. 나는 작품이 달걀 세례를 받고 있다는 후속 보도를 읽고, 여론에 부담을 느낀 학교 측이 작품을 철수하면 어쩌나 하고 걱정했건만, 웬걸... 성미 급한 의분의 한국인들이 작품을 아예 내동댕이 쳐버렸다. 이처럼 동시대 한국성을 피드백으로 끌어낸 미술품이 어디 흔한가.

3. 동시대 패악 반영
평범한 미대생의 과제에 언론과 여론이 공분에 떨고, 급기야 작품 파손으로까지 이어졌다. 이는 일베라는 현존하는 패악 집단에 대한 불특정 공동체의 분개가 특정 조형물에 투사된 현상이리라. 의도됐건 안됐건 작품의 설치부터 파손까지 전 과정은 동시대 한국 사회가 품은 패악에 대한 공동체의 감정을 재현한 셈이 됐다. (그럼에도 나는 파손 행위를 규탄한다.)

끝으로, 작품에 뜻하지 않는 의미를 부여한 외부자의 파손 행위를 어떻게 처분해야 할지 얘기해보자. 파손된 작품을 보며, 평소 일베에 쌓였던 분노를 대리 해소한 이들도 여럿 있으리라 본다. 실체 없는 일베를 향한 분노가 일베 표식을 띤 실체의 파괴로 분풀이 되었으니 말이다.

"작품을 훼손하는 것도 표현의 자유라고 생각하지만, 그에 대한 책임은 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베 조각상'을 제작한 홍기하의 입장이라는데 내 생각과 일치해서 옮겨왔다.

마무리는 서두에서 밝힌 이번 사건의 논점에서 시작하련다. '누군가의 마음에 상처가 될 가능성만으로, 어떤 표현이 제약될 수 있느냐'가 그것이었다. 더구나 여러 해석의 층위를 품고 있는 예술품을 누군가가 1차원적으로 해석하고 분노했다면, 이런 표현이 제재 받아야 하냐는 거다. <샤를리 에브도>, 홍성담의 그림들, 그리고 '일베 조각상'은 바로 그 같은 이유로 물리적인 제재를 받은 최근 1년 사이의 실례들이다. "사회에 만연하게 존재하지만 실체가 없는 일베라는 것을 실체로 보여줌으로써 이것에 대한 논란과 논쟁이 벌어지는 것"을 제작 의도로 밝힌 홍기하의 의사야 어떻건, 공동체가 A=A 식의 1차원적인 작품 해석을 두둔한다고, 만장일치에 따라 '일베 조각상=일베 기념비', '작가=일베 회원'이라는 등식이 성립되는 건 아니다. '일베 조각상'을 파손한 이들을 법에 따라 처벌하면 이들의 소신이 바뀔까? 안 바뀐다. 처벌 않고 용서하면 바뀔까? 역시 안 바뀐다. 그래서 1차원적 해석이 만든 나쁜 선례의 본보기 차원에서 처벌하는 편이 1차원적으론 옳다. 그럼에도 파손한 이들의 '의분'이, 정작 현대 미술 언어에 대한 '진도 차이'가 만든 오해였다는 데에 처벌의 딜레마가 있다. 그러게 1차원적 대응으로 해결되는 인간사란 없는 거다. 인간사도 그럴진대 고차원을 다루는 예술이야 오죽하겠나.

* 이 글은 <미술세계> 7월호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