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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남 대작사건을 읽는 법 | '관행'을 해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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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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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8%의 장벽 앞에서

대중의 공분에 맞서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공분의 비율이 인구 73.8%라면 설득으론 이길 수 없는 싸움이 된다. 내부 사정에 어두워서 생긴 공분이라면 더하다. 73.8%는 조수가 작업의 대부분을 완성한 조영남 작업은 '사기'로 봐야한다는 여론조사 비율이란다. 이런 비등한 여론에 편승해서 어떤 언론은 조영남 대작을 성토하는 전문가의 짧은 지적을 인용하거나 숫제 칼럼을 실어 승세를 굳히려는 분위기다. 나는 사건 폭로 직후 보도된 초반 기사들에서 미술계의 관행에 비춰 조영남을 탓할 수는 없다는 데에 의견을 보탠 평론가 중 일인이었다.

두둔하는 쪽과 비난하는 쪽의 공방을 지켜보면 조영남 대작 소동은 일개인의 윤리적 옳고 그름을 따지기 앞서, 동시대 미술의 풍경 속에 굳게 자리한 비밀스런 작동 원리가 본의 아니게 미술계 바깥으로 노출된 지극히 희귀한 사건이다. 그 점 때문에 경솔히 다룰 수 없는 문제적인 과제가 됐다. 첫 보도 당시, 조영남 대작과 미술계 관행을 비판적으로 다뤄달라며 출연을 요청한 KBS의 제안을 내가 거절했던 이유는 이랬다. "조영남 대작 논란이 실시간 검색어로 오르내리고 언론이 앞다퉈 다루는 현실은, 동시대 미술의 생리에 관해 정상적인 일반인과 언론이 평소 얼마나 무지한 상태인지 보여주는 거다."

여론과 언론을 급속히 악화시킨 데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어 보인다. 보도 초기에는 조영남의 대작에 집중된 여론과 언론의 분노가 그를 두둔하는 미술계 전문가와 관행을 지향했다. 나를 포함한 전문가 집단이 사용한 '관행'이 기폭제가 된 거다. 관행이란 합리적인 비판에도 흔들리지 않는 구습의 뜻으로 흔히 통용된 용어니 그럴 만도 했다. 거기에 더해 작품 주문을 넣는 카톡 화면도 도화선이 됐다. 홀로 고독하게 작업에 몰입하는 한 명의 창작자를 머릿속에 그렸을 대중과 언론의 '관행적 사고'는 일반인의 일상적 의사소통 수단인 카톡으로 주문을 넣는 이미지와 정면으로 충돌했을 게다.


관행을 부인하거나 비난하는, 별나라 비평들

조영남 대작을 미술계 관행을 들어 변호하는 진영과 비판하는 진영의 논의를 압축해보자.

작업의 아이템 혹은 콘셉트를 작가가 제시하고 그것을 물리적으로 구현하는 몫을 외부인에게 일임하는 전통은 상징적으로 마르셀 뒤샹이 등장한 100년 전으로 돌아갈 것이다. 작가의 아이템을 주문-제작으로 완성하는 개념주의 미술의 전통은 현재 동시대 미술 창작의 주류로 이미 자리를 굳혔다. 이런 개념주의 미술 변호에 맞서, 회화는 개념미술이 아니므로 해당될 수 없다는 비판이 등장했다. 이에 더해 제프 쿤스, 무라카미 다카시, 데미안 허스트 같은 공장형 미술과 혼자 완성할 수 있는 조영남의 경우가 비교될 수 없다는 비판까지 가세했다.

그렇지만 조수가 작업을 대행하는 관행은 오늘날 공장형 아티스트의 맹아 격으로 지목되는 1960년대 앤디 워홀의 팩토리나 개념주의 미술은 차치하더라도, 더 멀리 르네상스 화가 루카스 크라나흐, 바로크 화가 루벤스 그리고 현대적인 조각가 로댕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또 공장형 미술가가 아니고 개념주의 미술가가 아니어도 조수들에게 일을 분담시키는 동시대 생존 작가는 수도 없이 많다. 어째서 미술계 바깥에선 모를 이런 미술계 내부 사정을 쏙 누락시키고 비판을 할 수 있는가?

홀로 창작하는 미술가가 절대 다수인 점을 들어 공분을 자극하는 비난은 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예컨대 "재료와 씨름하며 고뇌하고, 작품에 혼을 불어넣는 예술가"들의 존재를 거론하면서, 이런 작가들은 "조영남의 작품은 '사기'라는 게 중론이다"라고 파악한 CNB저널의 <[기자수첩] '스타 금수저' 물고 미술 입문한 조영남, 손으로 일하는 작가 모욕말라> 같은 기사가 그렇다. 대중의 공분을 자극하면 일이 쉽게 풀린다. 그 점을 악용해서 제 주장을 관철시키려는 이런 편향된 기사는 "작가의 진실한 고민을 알아보고 인정해주는 평론가와 관객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비장한 질문으로 글을 마친다. 조영남 소동과 작가들의 고민을 듣고 인정하는 문제는 전혀 별개의 사안인 걸 이 흥분한 기자는 앞으로도 모를 게다. 내가 평소 그토록 혐오했던 조영남의 전매특허가 대중추수주의였는데, 이제는 그를 비난하는 자들이 고스란히 그의 장기를 반격의 칼로 빼들고 있으니 아이러니다. 대중추수주의는 대중추수주의로 흥하다가 대중추수주의로 망한다.

미술계의 절대 다수가 홀로 작업을 감당한다는 건, '관행'을 두둔한 나 같은 평론가도 잘 안다. 그럼에도 왜 나는 '관행'을 계속 두둔할까? 동시대미술은 '미술'이라는 동일한 자장 안에서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한 제작 방식으로 구현된다. 홀로 작업하는 이가 절대 다수라는 현실로 인해 100명을 고용한 공장형 작가의 존재감이 평가절하되지 않는 것도 이런 다양성을 미술계가 시인하고 수용했기 때문이다. 공장형으로 제작되건 소수의 조수가 완성하건 작가 개인의 아이템을 남의 손으로 구현하는 점에선 차이가 없다. 전자는 체계적으로 수행한 것이고, 후자는 영세하게 운영했다는 차이만 있다. 단품요리와 뷔페는 규모와 제작 방식이 다르고 맛도 다르지만, 미각과 허기를 충족시키는 음식이라는 점에선 같다. 뷔페보다 단품요리를 훨씬 선호하는 나 같은 사람마저 뷔페 애호가를 평가절하하거나 음식이 아니라고 부인하진 않는다.


장막 뒤에 감춰진 정답

관행을 변호하는 쪽과 비판하는 쪽 모두가 장막에 가려 알지 못하는 대전제가 있다. 내 의견을 취재하러 온 MBC <리얼스토리 눈>의 PD가 준비해온 문항 중에 이런 게 보인다.

Q. 현대미술에서 '조수, 보조 작가'의 역할은 무엇인지?
Q. 조수, 보조 작가의 작품 참여. 어디까지 '관행'이라고 용인할 수 있는 걸까?

조영남 대작과 관행을 두둔하는 진영과 비판하는 진영이 다투는 최전선에 '조수의 작업 관여 비율'이 놓여있다. 그러니 이 질문에 답하면 이번 사태의 옳고 그름을 가르는 잣대가 될 게다. 그렇지만 이 질문의 답은 두둔하는 쪽도 비난하는 쪽도 거의 알지 못한다. 이 점이 이번 사건의 포인트다. 비판하는 쪽에선 작가의 치밀한 아이템을 조수들이 이행하는 거라면 괜찮다고 양해하는 모양인데, 현재까지 보도된 바에 따르면 대작을 맡은 송씨는 "새로운 그림을 내가 창조적으로 그려서 주는 것은 아니다. 조씨가 아이템을 정해서 알려주면 나는 그 그림을 똑같이 여러 장 그려서 조씨에게 가져다준다."라고 진술했단다. 조영남 작업을 좋아하건 싫어하건 화투 도상은 조영남이 수십 년 전에 개발한 독자적인 아이템인 게 맞다.

공장형 아티스트들이 작업 과정을 공개한데 반해, 조영남은 그 사실을 비공개로 뒀다는 점도 비판의 쟁점으로 떠오른다. 그렇지만, 무라카미 다카시, 제프 쿤스, 데미안 허스트처럼 공장형 주문-제작 시스템을 갖춘 '회사' 대표야, 규모가 너무 방대해져서 숨기려야 숨길 수 없는 형편이 되어 공개한 것에 가깝다. 제프 쿤스의 스튜디오는 매달 손님을 초대해서 조수들의 작업 제작 광경을 공개하는 '스튜디오 투어'까지 연다.

이에 반해 공장형이 아닐지언정 조수를 고용하는 무수한 개인 작가들이 현존하며 이들의 스튜디오는 공개되지 않는다. 이 경우 조수의 규모와 조수의 역할이 무언지 풍문만으로 짐작할 뿐, 장막 안의 실상은 알 수 없다. 10여명 내외의 조수를 거느린 국내 유명 화가 중에 작업실 규모와 조수의 존재를 '공개'하는 경우가 어디 있나? 이들 모두는 공장형 미술가도 개념미술가도 아니다. 조수의 존재는 암암리에 윤곽만 알려질 따름이지, 어떤 작가도 내부를 소상히 공개하지 않으며 사정을 아는 미술계 관계자도 그 점을 상세히 캐묻지 않는다. 실례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이런 불문율마저 여론과 언론이 다시금 격노할, 미술계 '관행'이다. 이 미술계 내부의 진실마저 부인하는 이라면 지구가 아닌 다른 별나라에서 온 미술 관계자일 게다.


관행은 루비콘 강을 건넜는데 '미적 러다이트'들은 뒷북 난동을 부린다

조영남과 미술계 관행을 맹공하거나 부인하는 평론가들에게 되묻는다.

그들이 성토하는 주문-제작의 관행을 개인 창작의 낭만적 전통으로 되돌릴 수 있을까? 단연코 없다. 불가능하다. 왜 되돌릴 수 없을까? 자명하다. 이번 사태와 주문-제작 관행을 비판하고 부인하는 평론가들에게 그들이 남긴 지난 강연과 글을 되돌아보라고 말하련다. 그들의 강연과 지면에서 공공연하게 격찬한 미술가 중에, 정확한 규모를 가늠할 수 없는 조수를 고용한 미술가가 아마 절대 다수를 차지할 게다. '장막에 가려 규모와 실상'을 파악할 수 없는 개인 스튜디오 화가를 포함하면 그 수는 더 많아진다. 지구촌 평론가라면 여기에 토를 달지 못할 것이다.

지금 성토되는 '관행'의 시작점은 아마 이렇게 출발했으리라 추정된다. 일손이 달려 작업 일부를 보조하는 조수를 둔 것이 시작이리라. 흔한 일이니까. 그러다가 호평과 수요가 잇따르자, 작업을 효율적으로 수행할 조수와 전문 인력의 채용이 하나둘 늘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러다 어느덧 작가는 '관리자'에 가까운 위치가 됐을 것이다. 주문-제작에 가까운 이런 결과물은 작가가 홀로 감당했던 과거 작품보다 완성도 면에서 훨씬 개선됐을 게 분명하다. 이는 작품을 전시하는 기획자 입장에서건 작품을 거래하는 갤러리 입장에서건, 작품을 평가하는 평론가 입장에서건 거스를 수 없는 흐름으로 굳었다. 더구나 주문-제작의 오랜 관행이 미술사에 꾸준히 존재해 왔다는 고증마저 전문적 분업과 관리 체계에 정당성을 줬을 게다. 관행은 작가 개인이 아니라, 작품에 직간접적으로 가담한 미술계 공동체가 오랜 세월 함께 만들어간 게 맞다. 작가들마다 조수의 규모에 차이가 나고, 조수가 작업에서 기여하는 역할에도 차이가 있지만 그 내막을 정확히 아는 이는 '스튜디오의 장막 안'에 있다. 조영남 소동은 장막 안에 있는 이가 외부에 터트린 지극히 드문 폭로 사건이다. 그래서 이번 사건의 관전 포인트는 조영남 개인이 아니라 흔들릴 수 없는 관행에 있다.

이름 석 자만 꺼내도 일반인까지 알법한 수두룩한 유명 화가들의 명단을 꼭 늘어놔야 할까? 이건 여론과 언론을 혼란에 빠트릴 테고, 무엇보다 지목된 화가와 그와 연루된 갤러리가 사실을 축소하거나 부인할 게 분명하며 법적 대응까지 거론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장막 안의 사실을 장막 밖의 사람이 입증할 방법이 없으니까. 바로 이 점이 '관행을 변호하는' 이의 고충이다. 조영남 대작 소동을 맹공하는 평론가와 언론은 이런 고충을 감당하지 않고 내려놓은 채, 여론과 언론이 유구하게 믿어온 미술가의 '이상'이라는 방패의 뒤에 숨어, 주문-제작 관행이라는 '현실'과 조영남이라는 개인을 맹공하고 있다. 무지하고 불공정하다.

주문-제작 관행을 되돌릴 수 없는 현실에 대해, 조수를 고용한 작가 개인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다. 주문-제작으로 얻은 완성도 높은 작업을 기획하고 감상하고 호평해온 갤러리와 관객과 평론이 부지불식간에 연루된 결과물이 바로 미술계의 관행이다. 유능한 개인 요리사의 명성이 알려지자, 수요가 급증해 전문 보조원 여럿을 두고 그의 이름을 단 매장을 확대했다 치자. 흔한 일이다. 이전보다 완성도가 높은 요리가 제공될 것이고 고객과 언론의 만족과 평가도 상승할 것이다. 이때 누군가가 '요리사 개인기'를 향한 낭만을 환기시킨다 한들 이미 탄탄히 구축된 협업 체계가 원점으로 되돌아올까? 불가능하다. 입맛이 천정부지로 올라간 고객과 언론부터 그걸 원치 않을 것이다. 이번 사태에 빗대면, 대중적 공감을 살 법한 '수공의 미덕' 따위를 내세우면서 기계를 파괴하자고 외치는 미적 러다이트들은 그들 스스로 과거에 가담했던 사실을 까맣게 잊고 진실을 호도하고 있다.


스티브 잡스 : 무라카미 다카시 = 애플 : 카이카이 키키

"스튜디오 명칭을 작가 이름 대신, 서명으로 쓰는 건 어떨까요?"

수년 전에 미술계의 주문-제작 관행에 대해 수업에서 다룬 적이 있다. 대중은 스티브 잡스와 아이폰을 동격으로 이해하지만, 실제 아이폰의 디자인과 기능은 스티브 잡스가 아니라 애플에 소속된 디자이너와 엔지니어 같은 전문 인력의 머리와 손에서 나오는 거라며, 미술계의 주문-제작 관행에 빗대어 강의를 한 바 있다. 동시대 미술을 구성하는 하나의 부인할 수 없는 풍경은 작품 창작의 물리적인 노동은 전문 인력이 대체하고 작품의 브랜드를 작가의 이름으로 사용한다는 거라고 설명하자, 수업을 듣던 한 학생이 위와 같은 의견을 냈다.

스티브 잡스와 아이폰, 화가와 조수가 관여한 작품은 유사한 관계이니 저런 제안은 합리적이다. 하지만 저 제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다. 무라카미 다카시 작품의 물리적인 완성 대부분을 100여명의 조수가 대행하니, 그가 운영하는 회사 이름을 따서 'ⓒkaikai kiki'라는 서명이 ⓒmurakami takasi보다 객관적인 사실일 게다. 그럼에도 회사명을 쓰는 서명은 작가 본인은 물론이고 그걸 전시하는 기획자, 작품을 거래하는 아트딜러나 급기야는 그걸 감상하고 구입하는 관객과 구매자마저 원치 않는 바다. 이런 판단은 '부지불식'간에 이뤄진다. 스튜디오가 공개되어 주문-제작의 관행이 엄연한 사실로 확인됐음에도 그렇다. 왜일까?

설령 아이폰과 무라카미 다카시의 작품이 제작 공정에서 유사하다 한들, 그 둘의 차이는 공산품과 예술품이라는 세상의 분류법에 있다. 이 차이점이 모든 걸 결정한다. 예술의 감동은 작품 자체의 완성도에서 오지만, 감상자의 믿음에도 크게 좌우된다. 대중과 전문 평론가마저 작품의 완성도를 작가의 이름이라는 브랜드로 읽고 평하려 든다. 알면서 속아주는 거다. 이 점이 예술의 진면모를 만천하에 공개할 때 부딪히는 난처한 지점이다. '정보 공개'라는 세속의 미덕은 예술의 감동을 작동시키는 암묵적 합의를 깨는 일이 되기도 한다. 빗대자면 예술은 천상의 무릉도원을 현실에서 체험하기다. 무릉도원에 감명을 받았거나 깊게 연루된 처지라면, 현실의 무릉도원이 속세의 건설업자가 구축한 인공물인 점을 잘 알고도 전부 인정하지 않으려 들 것이다.

진실을 보려거든, 조영남이 아니라 관행을 면밀히 살펴야

어디부터 손봐야 할지 난감할 정도로 형편없다. 나는 세상에 해악이 되는 저술 행위가 존재한다고 믿는다. 불충분한 정보와 부정확한 지식으로 문약한 독자에게 막연한 지적 사행심을 심어주는 도서, 흥미 위주의 편성으로 독자의 값싼 영합을 유도하는 도서, 빈약한 근거로 단정을 남발해 기묘한 후련함을 독자에게 안겨주는 도서, 거기에 덧붙여 필자의 이름값으로 비평으로부터 면죄부를 얻어낸다면 그야말로 최악이다. 조영남의 신간은 이 모두를 갖추고 있다. 그렇기에 나쁜 대중 미술서다.

2007년 출간된 조영남의 <현대인도 못 알아먹는 현대미술>에 대해 당시 내가 쓴 서평의 일부다. 이 서평 말고도, 조영남의 미학과 언행에 관해선 훨씬 가혹한 글을 쓴 적도 했다. 이런 나의 과거사까지 털어놓는 건, 73.8%의 대중적 공분이 엉뚱한 곳으로 던져진다고 통감해서다. 평소 비호감 예술인의 대작 소동이 세간에선 초대형 비리 사건인양 취급받는 모양새다. 대중적 공분에 편승해서 '손가락'만 지탄했다가는, 그것이 가린 '달'의 실체를 드러내기 위해 나중에 두 번, 세 번 말을 바꿔야 한다. 그게 내가 믿는 경험칙이다.


ps. 조영남 대작의 풍랑이 잦아든 후 벌어질 현상을 단정적으로 예측해본다.

1. 주문-제작이 미술계를 구성하는 엄연한 풍경이건 말건, 대중의 73.8%는 작업을 완성하는 천재 개인 예술가의 신앙을 품은 채 살아갈 것이다.

2. 주문-제작이 미술계를 구성하는 엄연한 풍경이건 말건, 미술가를 다루는 교양 방송 프로그램과 미디어는 작업실에 고독하게 서있는 미술가의 모습을 대중에게 전파할 것이다.

3. 주문-제작이 미술계를 구성하는 엄연한 풍경이건 말건, 조영남과 대작 관행을 성토했던 평론가들은 강연과 지면에서 조수를 고용한 수많은 예술가들을 이전처럼 인용하고 격찬할 것이다.

4. 주문-제작이 미술계를 구성하는 엄연한 풍경이건 말건, 홀로 작품 제작에 임하는 절대 다수의 미술가들은 유명 작가들의 주문제작 관행이 불공정하다고 느낄 것이다. (이런 반응은 자연스럽다.)

5. 대중적 공분과 언론의 맹공과 사법적 판단이야 어떠하건, 십 수 명을 거느리고 주문-제작으로 작업을 완성해온 무수한 미술가들은 평시처럼, 해오던 공정대로 작업을 완성해 전시장에 걸 것이다.

6. 끝으로. 사법적 판단이야 어떠하건, 조영남은 물의를 일으킨 데에 고개 숙여 사죄한 후, 그가 진행했던 방송 무대로 복귀할 것이다.


* 이 글은 <미술세계> 6월호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