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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는 사람이 없는' 패션 속에서 길을 잃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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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잃었다.

가려던 곳은 학교인 샤링 크로스 로드(Charing Cross Road). 보통은 지하철로만 다니던 길이었지만 중간 목적지에서 거리가 그리 멀지 않았으므로 걸어가 볼까 했던 것이 화근이었다. 스마트폰이 대중화되지 않은 2008년, 지도 없이 런던 시내를 걷는 일은, 유학 온 지 1년 반이 지났지만 여전히 어려웠다. 되는대로 걷다 보니 어느새 뉴 본드 스트릿(New bond street)의 럭셔리 브랜드 스토어들이 즐비한 거리에 이르렀다. 급한 일은 없으니 도버 스트릿 마켓 / Dover Street Market (Comme des garçons이 런던 도버 스트릿에서 시작한 편집숍)이라도 가볼까? 하지만 이내 생각을 거두었다. 왠지 조금 시시해졌다.

한때는 '입을 수 없는 옷'만이 '진짜'라고 생각했던 시절도 있었다. 백화점이나 번화가 매장에서는 절대 볼 수 없는, 전혀 다른 미의 관점을 제시하는 '디자이너 브랜드'의 '작품'들은 그야말로 '진리의 문'을 열어준 것만 같았다. 옷의 흔한 개별 요소들을 전혀 다른 맥락으로 재조합해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준야 와타나베(Junya Watanabe)랄지, 상식적으로 추하다고 여겨지는 문화적 요소들을 당당히 미의 범주로 제시하는 알렉산더 맥퀸(Alexander Mcqueen)이나 언더커버(Undercover), 혹은 아예 일반적 옷의 범주를 훌쩍 뛰어넘는 파격을 제시하는 마르틴 마르지엘라(Martin Margiela)나 후세인 살라얀(Hussein Chalayan) 등, 나에게 있어 패션은 입고 싶은 옷을 쇼핑하는 즐거움이 아닌, 일종의 개념 미술을 감상할 때와 같은 지적 쾌감을 얻는 예술 장르였다. 한 달 내내 도쿄를 여행하며 아침부터 밤까지 유니크한 편집샵만을 훑고 다닐 정도로 채워지지 않았던 지독한 갈증과 허기는, 결국 나를 잘 다니던 대학까지 그만두고 런던으로 유학을 가게끔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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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야 와타나베 / Junya Watanabe / 2006 F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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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커버 / Undercover / 2004 FW

그렇게 입학한 런던의 센트럴 세인트 마틴 / Central Saint Martins 은 그때의 나와 똑 닮은 사람들이 모인 곳이었고, 그때의 내가 갈구했던 바로 그 가르침을 주는 곳이었다. 정해진 룰을 강요하거나 가르치는 수업이 아닌 프로젝트로 과제를 해결하는 자유로운 수업. 티셔츠, 셔츠, 혹은 화이트 패브릭 같은 제한된 틀만을 둘 뿐 그 안에서 무엇이든 상상하게끔 하는 커리큘럼. 항상 관점을 새롭게 하기를, 발상을 자유롭게 하기를 원하는 교수님들. 미술과는 전혀 상관없는 곳에서 전과한 터라 그곳에 모인 다른 동기들의 재능과 실력을 따라가긴 어려웠지만 누구보다 그곳에서 공부하는 것이 즐거웠다.

그랬었던 것이 불과 1년 전. 금세 열정이 식었다고 말하기엔 조금 성질이 달랐다. 여전히 디자인을 하는 일은 즐거웠고, 순도 높은 완성도의 디자이너 브랜드를 발견하는 것은 가슴 설레는 일이었다. 다만 끝끝내 채워지지 않는 한 조각이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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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슨 / Dyson 디자인 스케치

그런 회의감은 얼마 전 우연히 듣게 된 '프로덕트 디자인' 학과 수업에서 시작되었을지 모른다. 같은 '디자인'이라는 단어로 묶여있기만 할 뿐 그들의 발상은 근본적으로 패션과 달랐다. 패션 디자인은 '무드'를 잡는 것에서 시작한다. 주제는 뭐든 상관없지만 대체적으로 특정 시대의 스타일, 이국적인 문화, 혹은 패션 아이콘 등에서 시작한다. 그러한 특정 주제에 관련된 여러 가지 이미지들, 구체적인 아이템, 그와 관련된 소재, 부자재, 자유롭게 떠오르는 발상을 담은 스케치들을 한데 엮어 '무드 보드'를 만들게 되면 그것을 바탕으로 디자인을 시작하게 된다. 이는 '외형'적 형태를 신선한 방향으로 창조하는 데에 효과적인 작업 방식이다. 그러나 프로덕트 디자인의 시작점은 아예 차원 자체가 달랐다. 그들은 자신이 디자인할 제품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이 의자에 앉게 될 사람은 이런 편안함, 이런 감정, 혹은 이런 기능을 경험하게 됩니다 라는 식으로. 그리고 그 '경험'이 얼마나 보편적인지, 윤리적인지, 혹은 상업적인지에 관해 열띤 토론을 벌였다. 물론 최종 디자인으로 넘어갈수록 패션 디자인과 비슷한 '무드 보드'를 만들기도 했지만 그 근본적인 방향성은 잃지 않았다.

'입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그날의 수업 이후 이와 같은 의문이 떠나지 않았다. 내가 지금까지 열광했던 것, 배워왔던 것. 그 과정에 그것을 입는 사람이 어떤 '경험'을 할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물론 내가 원해 자발적으로 들어온 세계는 맞다. 세인트 마틴은 기본적으로 예술 학교. 패션을 사람이 입는 '라이프 웨어'가 아닌 일종의 조형 미술의 분파로 이해하는 곳. 그리고 하이패션이란 패션을 개념 예술로 이해하는 장르(쇼에 등장하는 모델이 최대한 비현실적인 프로포션을 지닌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이런 게 불만이라면 일본 쪽 기술 대학으로 갔으면 될 일이다. 사람이 입었을 때 편안한 1인치의 패턴 차이를 찾아내기 위해 밤을 새워 공부했을 거다.

아니. 오직 전통만을 습득하는 것은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다만 새롭고 혁신적인 디자인을 위해 쏟는 에너지의 반의 반만이라도 착용자의 '경험'에 대해 고민해야 하는 건 아닐까 하는, 지극히 당연한 물음에 대한 답을 구하고 싶을 뿐이었다. 그러나 동시대 가장 혁신적이고 완성도 높은 디자인이 모여있다는 도버 스트릿 마켓이나 브라운즈 같은 편집샵을 돌아다녀도 그와 같은 고민은 찾아볼 수 없었다. 반면 중저가 브랜드의 매장에선 '혁신'에 대한 고민은 조금도 없는, 과거의 답습만이 즐비했다. 어디서도 내가 원하는 그 방향으로 새로운 길에 대해 고민하는 옷을 찾아볼 수 없었다.

방향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헤매고 있었지만 조금이라도 새로운 길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소재, 퍼포먼스, 수납 등 옷과 가방 등이 가져야 할 기본적인 기능들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기 시작했고, 학교 수업에 발표하는 결과물들도 이런 연구 성과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지금은 스톤 아일랜드의 디자이너로 일하는 영국인 동기생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이전까지는 딱히 교류가 없었지만, 얼마 전 진행된 수업에서 사첼백 형태의 가방을 통째로 옷에 달아버린 코트 디자인을 발표한 이후 부쩍 내게 관심이 많아진 듯했다.

"아크로님(Acronym)이란 브랜드 알아?"

그는 자신이 리서치한 내용이라며 아크로님이란 생소한 브랜드의 사진들을 몇 장 보여주었다. 첫인상은 약간 독특한 모델을 쓰는 '다크 웨어 / darkwear' 브랜드였다. 그 당시 한창 최전성기를 맞고 있었던 릭 오웬즈 / Rick Owens 의 영향으로 그를 추종하는 수많은 브랜드가 우후죽순 생겨나던 시점이었고, 아크로님 역시 거의 올블랙으로 무장한 옷들이었기에 수많은 그저 그런 아류 중 하나겠거니 생각했다. 그는 비웃으며 영상 하나를 보여주었다.

조악한 화질의 홈 카메라로 찍은 영상 속에 한 동양계 모델이 메신저백을 매고 등장한다. 가방을 휙 돌려 앞으로 당긴 후 무심히 차곡차곡 접힌 자켓을 꺼내 펼쳐들더니 가방은 벗지도 않고 옷을 입는다. 지퍼를 열고 닫는 걸 몇 번 하더니 가방은 어느새 옷 뒤로 숨겨져 있었고 팔을 휙 내저어 휴대폰을 꺼내 메시지를 확인한다. 이어폰을 꺼내서 카라 쪽에 붙이더니 역시 가방은 벗지도 않고 자켓을 벗어내고는 가방 메듯 몸을 가로질러 내둘렀다.

브랜드의 홍보 영상이라고 하기에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엉성한, 이 옷과 가방에는 이런이런 기능이 있다는 설명만 심플한 몸짓으로 집어넣은 투박한 영상으로 나는 확신했다. 내가 원하던 바로 그 지점에 대한 고민을 하는 사람이 적어도 세상에 한 명은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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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Birth of ACRONYM

디자이너 에롤슨 휴 / Errolson Hugh 에 의해 독일 뮌헨에서 설립된 아크로님 / Acronym 은 처음부터 독자적인 디자인을 생산하는 브랜드는 아니었다. 공동 창립자이자 아내인 미하엘라 사첸바커 / Michaela Sachenbacher 와 함께 독일의 수많은 스키, 보드복 메이커에 외주 디자인을 담당하는 일부터 시작했던 에롤슨 휴는 스키, 보드복을 디자인하는 과정에서 문득 이런 의문을 갖게 된다.

"이런 테크니컬 한 스포츠웨어에 사용되는 수많은 기능들을 왜 일상생활을 위한 옷에는 쓰지 않는 거지?"

당시가 90년대 말이었으니 이런 생각은 지나치게 급진적인 생각이었을 것이다. 당연히 대부분의 사람들 반응은 냉담했다.

"무지 어려운 작업인 데다 가격도 엄청 비쌀게 뻔한데 누가 사겠어?"

그 어떤 투자자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자 그는 자비를 들여 독자적인 디자인을 개발하기로 결심했다. 자본금이 적은 만큼 풀 컬렉션과 같은 큰 스케일은 꿈도 꿀 수 없었다. 대신 그는 하나의 '완벽한 자켓'을 만드는 걸 목표로 작업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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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드 완더 / and Wander

우선 이런 의문이 들 수 있다. 첨단 테크닉을 보유한 '일상복'을 새롭게 만드는 것보다 이미 첨단 테크닉으로 무장한 등산복이나 스키복 등을 일상생활에 입으면 되지 않을까? 실제로 일본에는 앤드 완더 / and Wander 나 스노우피크 / Snowpeak 등 일상적으로 입어도 전혀 무리가 없을 정도로 심플하게 정제된 디자인을 선보이는 아웃도어 브랜드가 많다. 또한 원래 목적인 등산이나 캠핑 등을 즐기는 데 있어서도 기능적으로 무리가 없다. 물론 에롤슨 휴가 처음 아크로님을 기획했던 시점이 90년대 말임을 생각해본다면, 이러한 발상이 지금처럼 쉬운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설령 그가 지금 이 시대에 처음 아크로님을 기획한다고 해도 그는 기존의 하이테크 스포츠웨어를 컨버전 하는 수준의 디자인으로는 만족하지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기준에서 이러한 특수복들은 '일상생활'을 하는 데 있어 완벽한 기능을 제공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가 생각하는 '도시의 일상'을 위한 기능이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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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롤슨 휴가 디렉팅한 나이키의 'All Conditioned Gear' 라인

우선 방수, 방풍, 보온, 속건 등 외부 기후 환경으로부터 착용자의 몸을 보호하는 기능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에베레스트를 오르는 등반가보다는 필요한 방수나 보온의 기능적 레벨이 낮을 수 있고, 마라톤 선수들보다는 필요한 속건(원단이 물에 젖었을 때 빠르게 마르는 기능)의 기능적 레벨이 낮을 수는 있지만 도시에 사는 사람들 역시 겨울에는 춥고 여름에는 땀이 흘러내릴 정도로 덥다. 특히 에롤슨 휴가 살고 있는 독일 뮌헨과 같이 궂은 날씨인 도시는 예고도 없이 비가 시도 때도 없이 내리기 때문에 우산보다는 완벽하게 방수가 되는 자켓이 절실했을 것이다.

'활동성'도 빼놓을 수 없다. 스포츠를 즐길 때처럼 격렬한 움직임을 필요로 하진 않지만 옷이란 가벼울수록 피로하지 않고 움직이기 편할수록 만족도가 높은 법이다. 또한 에롤슨 휴는 가라데 유단자로서, 모든 가라데 동작을 수행할 수 있는 옷을 목표로 디자인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위에 언급된 두 가지 기능은 클라이밍이나 스키 등 아웃도어 스포츠웨어가 가장 오랫동안 연구해 왔던 분야이며, 원단, 부자재, 디테일 등 모든 방면에서 다양한 결과물을 내놓고 있다. 도시형 아웃도어 / Urban outdoor 브랜드가 우후죽순 생기는 이유도 '착용자 보호'와 '움직임'이라는 기능적 과제에 대해서는 완벽에 가까운 해답을 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도시에서 필요한 기능은 이에 그치지 않는다. 특히 가장 큰 과제 중 하나인 '수납'에 대해서 아웃도어 스포츠웨어는 충분한 해답을 제시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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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납에 대한 고민이 담긴 아크로님의 E-J4TS 자켓

우리는 집에서 나갈 때부터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다양한 소지품을 들고 다닌다. 스마트폰이나 지갑 등 자주 꺼내 써야 할 뿐 아니라 도난의 위험도 많은 중요 소지품도 있고, 자주 사용하지는 않지만 상황에 따라 필요할 수 있는 화장품이나 책, 이어폰 등과 같은 소지품도 있으며, 노트북과 같이 무겁고 충격에도 민감한 고가의 소지품도 갖고 다닌다. 이러한 소지품들은 각 특성에 따라 보관되는 방식도 알맞은 형태가 있기 마련이다. 예컨대 스마트폰, 지갑 등은 자주, 그리고 빨리 꺼내 써야만 하는 만큼 자켓이나 팬츠의 포켓에 지니고 다녀야 편하고, 노트북이나 태블릿 PC 등은 외부 충격에서 디바이스를 보호할 수 있을 정도의 충분한 쿠션을 지닌 가방 등에 보관해야 좋다.

이렇듯 소지품 특성에 따라 포켓의 모양, 적절한 위치 등이 있고, 가방 역시 내부 수납공간의 설계나 메는 방식 등에 있어 심도 깊은 연구가 필요하다. 그러나 테크니컬 아웃도어 스포츠웨어의 경우 옷에 있는 수납공간은 무게를 위해 되도록이면 삭제하며, 가방 역시 침낭이나 텐트 등 부피가 큰 형태를 담는 데 특화되어 있기 때문에 노트북이나 스마트폰 등 충격에 민감한 기기를 담아내기엔 적합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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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위해 에롤슨 휴가 연구한 분야는 밀리터리 웨어이다. 군인들은 전장에서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다양한 도구들을 소지해야 한다. 탄창이나 나이프, 권총과 같은 무기부터 비상구급약과 지도 등에 이르기까지 종류와 특성, 크기와 무게 등이 모두 제각각이지만, 모든 소지품은 필요한 시점에 아주 빠르게 꺼내쓸 수 있어야만 한다. 총알이 빗발치는 전장에서 스피드는 생명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밀리터리 웨어의 수납에 대한 연구는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연구가 진행된다. 얼마나 안전하게, 많은 양을 보관할 수 있는가, 그리고 얼마나 빠르게 꺼낼 수 있는가.

이 두 가지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밀리터리 재킷과 팬츠에는 곳곳에 다양한 포켓들이 자리 잡고 있는데 모두 손으로 꺼내기 쉬운 위치에 놓여있다. 형태 역시, 부피가 큰 카고 포켓 형태가 대부분이었던 빈티지 밀리터리 웨어와는 달리 물건이 없을 때는 납작하다 수납할 때 부피가 커지는 입체적인 패턴을 활용한 형태로 진화했다. 가방들 역시, 단순히 물건을 많이 넣는 데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고, 달리는데 무리 없을 정도로 밀착하는지, 필요할 때 재빠르게 소지품을 꺼낼 수 있는지를 세심하게 따져서 디자인되어 있다. 물론 전장에서 필요한 소지품들이 일상생활에서 쓰이는 소지품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수납공간의 위치나 형태, 수납 동작 등에 관한 연구는 충분히 일상적인 옷을 디자인하는 데 활용할 수 있는 훌륭한 레퍼런스가 된다.

아웃도어 스포츠와 밀리터리. 이 두 가지 방대한 영역을 바탕으로 에롤슨 휴는 도시 생활에 필요한 기능들에 대해 깊이 고찰하고 나름의 해답을 얻어낸다. 방수와 방풍, 투습 등의 기능에 있어 최고 수준의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는 고어텍스 / Goretex 스포츠 쉘 원단을 베이스로, 방수가 가능한 YKK 사의 아쿠아 가드 / Aquaguard 지퍼 등을 사용해 밀리터리 웨어에 기반을 둔 포켓 디자인을 접목시킨다는 큰 얼개를 잡은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소재 및 형태 등을 합치는 과정에서 에롤슨 휴는 일반적인 패션 디자인 방법론을 전복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바로 20세기 초 산업 디자인 계를 휩쓸었던 기능주의 / Functionalism 의 방법론을 접목시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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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셀 브로이어 / Marcel Breuer - 바실리 체어 / Wassily Chair

2. Functionalism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 / Form follows function'

건축가 루이스 설리반 / Louis Henri Sullivan 에 의해 유명해진 이 명제는 20세기 초반 기능주의 / Functionalism 의 정수를 담고 있는 말로 널리 회자되어 왔다. 인위적이고 장식적이었던 전근대 디자인들을 비판하며 등장한 이 사조는 충실히 기능만을 따라가다 보면 형태는 자연스럽게 따라온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기능주의 건축가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던 사진가 칼 블로스펠트 / Karl Blossfeldt 의 식물 사진들처럼, 자연은 그저 생존과 번식을 위한 기능에 충실할 뿐이지만 복잡하고 정교하며 아름다운 형태가 뒤따라온다는 논거를 제시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자연물이 수억 년에 걸친 진화를 통해 지금의 형태가 됐다는 것을 상기시킬 필요가 있다. 한 사람이 일정한 기간 동안 해낼 수 있는 영역이란 한계가 있고, 우선적인 가치를 기능성의 진화에 둔다면 나머지 영역은 소홀해질 수밖에 없다. 영화 '아이언맨' 1편을 생각해보자. 테러리스트들에 의해 납치된 토니 스타크는 동굴 속에서 탈출을 위한 기계 갑옷을 만들고자 한다. 동굴에서 구할 수 있는 한정적인 재료만 사용 가능한 데다 만들 시간도 적었기 때문에 외형은 제쳐두고 일단 기능적인 부분만 완성을 시키게 된다. 따라서 그 외형은 후에 완성된 아이언맨 마크 2 슈트와 비교하자면 조악하기 이를 데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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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터람스 Dieter Rams 가 디자인한 브라운 Braun 사의 라디오

이와 같은 이유로 초기 기능주의 디자인은 어딘지 건조하면서 생경해 보이는 디자인들이 많다. 기능적 발전과 혁신에 중점을 두었을 뿐 그것을 완성하는 소재나 컬러 등은 별다른 컨셉없이 가장 저렴한(기능적인 완성도를 놓치지 않는 선에서) 혹은 구하기 쉬운 것들로 채워 넣었기 때문이다. 또한 과거 디자인 아카이브를 배격하고 조금이라도 더 기능적인 방향으로 형태를 맞춰나갔기 때문에 당시 기준으로는 굉장히 기괴한 모습도 많았다. 초기 기능주의가 후대 디자이너들에게 비판을 받았던 이유도 이러한 '형태 / Form' 에 대한 무관심 때문이었으며, 이후 디터 람스 / Dieter Rams 등의 디자이너들에 의해 미니멀리즘과 결합되면서 비로소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게 된다.

그러나 에롤슨 휴는 거칠고 엉성했던 초기 기능주의에 주목한다. 건축가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부터 르 코르뷔지에 / Le Corbusier 를 비롯한 20세기 초 기능주의 건축가들의 이론서를 탐독해왔던 그는, 형태에 대한 일체의 컨셉없이 기능적인 요소들만을 완벽하게 완성시키는 그들의 방향성에 공감했다. 더불어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얻게 되는 생경한 외형들 역시 심플한 옷이 지배적인 패션계에서는 오히려 신선한 느낌을 줄 것이라고 판단했다. 물론 이런 결정을 한 데에는 경제적인 이유도 컸다. 고어텍스와 같이 고가의 원단을 주로 판매하는 업체는 대부분 일정 수량 이상을 주문해야만 발주가 가능하다. 그러나 블랙과 같은, 대부분의 업체가 자주 발주하는 흔한 컬러의 경우 재고를 남겨두기 마련이고, 규모가 작은 업체인 아크로님은 이런 재고 물량을 소량 발주해 디자인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즉, 형태에 대한 컨셉을 정하고 특정한 느낌과 컬러를 지정하는 동시에 기능까지 완벽한 재료를 구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던 것이다. 때문에 그는 아예 형태에 대한 컨셉은 철저히 무시하고 기능적인 완성도를 추구하는 방향을 선택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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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1A-GT

이런 과정으로 처음 디자인한 결과물이 'J1A' 재킷이다. 스웨덴 모터사이클 부대의 유니폼 재킷을 기반으로 한 디자인으로 보이지만 기능적인 필요에 의해 형태를 과감히 삭제하고 변형시켜 전혀 다른 결과물을 만들어 내었다. 고기능성 고어텍스 스포츠 쉘 원단, 움직임을 고려한 입체 패턴, 밀리터리에서 영향받은 합리적인 포켓 형태와 위치 등 아웃도어와 밀리터리에서 도출한 연구 성과들을 짜임새 있게 구성했지만 가장 놀라운 부분은 따로 있다. 등산이나 전투와 같은 특수 상황에서는 절대 알 수 없는, 오로지 도시에서 생활하는 사람들만이 느낄 수 있는 기능적 편의를 제공하는 아이디어를 포함시켰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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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에서는 날씨 변화에 따라 혹은 장소를 이동함에 따라 재킷을 벗거나 입어야 하는 상황이 생기기 마련이다. 비 오는 쌀쌀한 거리를 걸을 때는 방수 재킷을 입어야 하지만 지하철 역으로 들어가면 실내가 더워지므로 벗고 싶어 지는 것과 같이 말이다. 그러나 스트랩이 몸을 가로지르는 크로스백을 맸을 때는 재킷을 입고 벗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때문에 'J1A' 재킷은 뒷부분을 자르듯 분리시키는 긴 지퍼가 존재한다. 이 지퍼를 위로 올리면 옷이 반쯤 잘리는 형태가 되기 때문에 잘린 앞부분을 크로스백의 안쪽으로 통과시키면 가방을 벗지 않고도 재킷을 입을 수 있다(위 사진 참조). 물론 재킷을 벗을 때도 가방을 벗지 않아도 된다. 게다가 재킷 안쪽에 있는 스트랩을 이용해 크로스백처럼 재킷을 몸에 걸칠 수 있어 비에 젖은 재킷을 손으로 들고 다녀야 하는 불편함을 해소했다.

또한 휴대폰은 벨이 울리는 순간 재빠르게 꺼내야 하는 소지품이지만 보통은 재킷 주머니나 가방에 보관하기 때문에 아무래도 꺼내는 데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에롤슨 휴는 이런 불편을 해소하고자 손목 쪽에 지퍼 포켓을 만들고 팔을 힘차게 휘두르면 무게로 인해 휴대폰이 손 안으로 쏙 들어오도록 설계된 '그래비티 포켓'을 개발한다. 아울러 이어폰을 잠시 붙일 수 있는 자석 패널을 카라나 후드 옆면 쪽에 부착하는 등 도시 생활자를 위한 세심한 디테일들을 추가시켰다.

이렇듯 어떤 옷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세심한 아이디어까지 결합한 'J1A' 재킷은 도시 생활자를 위한 완벽한 기능을 제공하는 결과물로 탄생되었다. 에롤슨 휴는 이 성과를 바탕으로 좀 더 과감한 디자인 실험에 돌입한다. 수납 형태, 여밈 형태 등 다양한 기능적 디테일들을 개발하고 실루엣 역시 블루종, 파카, 코트, 테일러드 재킷 등 현존하는 모든 옷의 카테고리로 확장한다. 그 후 이런 요소들을 경우의 수 조합하듯 무한대로 자유롭게 결합하는 방식을 사용해 새로운 디자인을 창조해냈다. 큰 규모의 브랜드라면 상업성 때문에 망설였을 과감하고 생경한 형태까지 모두 수용하면서 말이다. 그 결과 과거의 그 어떤 옷들과도 연결점을 찾아낼 수 없는 맥락 없는 옷들이 매년 발표되었다. 내가 소유하고 있는 'J53TS-GT' 역시 이런 디자인 실험의 결과로써 등장한 2016년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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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J53TS-GT

전체적인 외관은 탈부착이 가능한 후드를 제외한다면 전형적인 맥킨토시 코트 실루엣을 차용한 싱글 카라 코트 형식이다. 그러나 전면부의 눈에 띄는 금속 지퍼부터, 사선으로 5 각형 형태를 띠는 손주머니와 그 위에 위치한 기묘한 테잎들까지 오밀조밀 구성되어 있어, 어떤 기능들이 숨겨져 있을까 하는 묘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우선 가장 눈에 띄는 검은색 테잎은 현용 밀리터리 기어에서 사용되는 몰리 시스템 / Molle System 을 아크로님의 취향에 따라 깔끔하게 변형시킨 '테크 시스템 그리드(ACRONYM® TEC SYS GRID)' 이다. 몰리란 Modular Lightweight Load-carrying Equipment 의 약자로 파우치와 같은 외부 부착형 장비를 가방이나 옷 등에 부착하는 방식을 통일된 규격으로 시스템화한 것을 말하는데, 보통 25mm의 웨빙 테잎을 35mm 간격으로 봉재해 부착한다. 이 시스템이 갖춰져 있는 파우치 등의 장비는 몰리가 적용된 그 어떤 가방이나 옷 등에도 부착이 가능하기 때문에 상황에 따라 수납공간을 효율적으로 커스터마이징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에롤슨 휴는 이 통일된 규격은 그대로 둔 채 조악해 보일 수 있는 스티치 형식 대신 열접착 방식으로 만든 자신만의 새로운 몰리 시스템을 개발했다. 아크로님에서 나오는 모듈러 파우치들도 있지만, 몰리 시스템이 적용된 파우치라면 그 어떤 것도 부착이 가능하기 때문에, 아크로님을 착용한 사람들의 스트릿 사진들을 보면 다양한 용도로 응용을 한 것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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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열 충전 패널을 이용해 스마트폰을 충전하고 있는 모습

손목은 벨크로를 이용해 바람을 막도록 처리되어 있다. 아웃도어 재킷에서 흔히 쓰이는 방식이지만 벨크로가 사선으로 올라가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보통은 스트랩에 맞춰 수평으로 붙어 있다). 이는 손목 부분을 접고 여미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스트랩이 사선 윗 방향으로 향하게 된다는 것에 착안한 것으로, 수많은 현장 경험이 없다면 나올 수 없는 디테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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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쪽에도 역시 테크 시스템 그리드가 수평으로 부착되어 있다. 아래쪽 사선으로 뻗은 기다란 지퍼는 J1A 재킷부터 이어져 내려온 디테일로 크로스백을 벗지 않고 재킷을 입고 벗을 수 있게 도와주는 용도로 사용된다. 무광 방수 지퍼로 이루어져 있어 물이 지퍼 사이로 새어 들어가는 것을 방지한다.

등산복이나 스키복 등 아웃도어 재킷 분야의 전문가인 에롤슨 휴이지만 본작에서 특별히 자유로운 움직임을 위한 입체 패턴적인 요소는 보이지 않는다. 분할면이 많아 왠지 복잡해 보이지만 일반 패턴을 수평으로 잘라놓은 수준인데, 이 등부분의 팔 이음새 역시 그다지 의미가 있는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다만 재킷을 입은 상태에서 뒤쪽을 봤을 때 몸과 팔이 하나로 이어져 있는 듯 보여 깔끔한 느낌을 준다. 하지만 그 정도의 효과를 얻는 것치곤 잃는 것이 꽤 크다. 몸통과 팔 패턴 전체가 이어지는 큰 조각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커팅 후 원단의 로스량이 꽤 많을 것으로 예상된다. 철저히 소량 생산만 하는 브랜드만이 가능한 스웩이 느껴지는 부분이다. 소매산을 거의 주지 않은 둥근 어깨와 약간 휘어져 있는 팔 패턴 등 스포츠 패턴의 요소가 군데군데 보이긴 하지만 다른 아크로님의 작품에 비해서는 얌전한 편이다. 아무래도 코트라는 형식이 주는 포멀함 때문에 최대한 절제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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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단은 고어텍스 프로 / Goretex Pro이다. 대부분 사람들이 '고어텍스'를 등산복에 흔히 쓰이는 폴리에스테르 느낌의 특정 원단을 지칭하는 것으로 잘못 생각한다. '고어텍스'는 겉면 원단 밑에 부착되는 방수, 투습 기능을 가진 멤브레인(membrane) 필름을 부착하는 기술에 특화된 브랜드 이름이다. 즉 멤브레인 필름을 부착해 방수, 투습 기능을 갖게 된다면 겉면은 면이나 울 등으로 자유롭게 선택이 가능하다는 얘기다. 그러나 히말라야와 같은 극한의 고지대를 등반하기 위한 재킷들은 모두 겉감으로 폴리에스테르가 쓰이는데 그 이유는 물이 침투하지 못하게 하는 발수 코팅을 더 용이하게 할 수 있으며, 설령 물이 겉감 쪽으로 침투가 돼도 금방 마르는 특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고어텍스 프로는 최고 등급의 클라이밍 재킷에만 쓰이는 최고 스펙의 원단으로, 기능성 원단이 갖고 있는 4대 요건, 방수, 투습, 발수, 속건의 모든 요소를 극한으로 끌어올린 원단이기 때문에 겉감으로 폴리에스테르가 쓰였다(개인적인 견해로, 도시에서 입는 옷을 지향하는 아크로님이 왜 고어텍스 프로까지 써야 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최고 스펙에 대한 로망이라는 측면에서 이해해야 할 것 같다).

안쪽에 보이는 회색 원단은 멤브레인 필름을 보호하고 살갗에 닿는 감촉을 좋게 하기 위해 부착한 안감이다(겉감, 멤브레인 필름, 안감을 고열, 고압력으로 접착시켰다고 해서 3 레이어 원단이라고 부른다). 절개선마다 테이핑 처리한 것을 '심실링(seamsealing)'이라고 하는데, 봉재선 사이로 물이 침투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극단의 기능성 디테일이다. 디자인이 얌전하기로 유명한 나나미카 / Nanamica 나 비즈빔 / Visvim 도 이 심실링 테이프만큼은 배색이나 로고 등을 눈에 띄게 인쇄해 포인트를 주기도 하는데, 기능과 무관한 장식을 철저히 배격하는 아크로님 답게 안감 색과 동일한 컬러로 무덤덤하게 처리했다.

고리에 걸려 있는 스트랩은 재킷을 벗어 크로스로 몸에 맬 수 있도록 도와주는 용도로 사용되며, 길이를 조절할 수 있는 어드저스터를 이용해 몸에 꼭 맞는 길이로 조절할 수 있다. 게다가 탄력 있는 밴드로 제작되어 흔들림 없이 꼭 맞는 핏으로 매는 것이 가능하다. 모든 디테일이 단지 폼이 아닌 실제적으로 쓰이는 것을 염두하고 설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는 세심한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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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 쪽에는 아크로님 로고가 새겨진 패널과 자석이 두 개 포함된 패널이 벨크로 탈부착 형식의 패치로 제공된다. 자석 패널에는 이어폰을 붙여 놓을 수 있어 잠시 보관하기 위한 용도로 편리하다. 카라 쪽에는 5호 비슬론 지퍼가 마감이 되지 않은 상태로 매달려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지퍼는 카라를 세운 뒤 여미는 용도로 사용된다. 보통의 맥코트는 이 역할을 원단으로 만든 플랩과 단추로 대신하지만 본작에서는 지퍼를 채워 올리는 것만으로 카라를 세워 목 쪽으로 바람이 들어오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 주목해야 할 점은 이 지퍼를 끝까지 마감하지 않고 마치 미완성인 것처럼 매달리는 형태로 두었다는 사실이다. 방법을 만들어보자면 깔끔하게 마감을 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 다만 그렇게 하면 지퍼를 결합시키는 행동이 조금 어려워지는 데 이런 점 때문에 차라리 마감을 하지 않는 선택을 한 것으로 보인다. 최상의 기능성을 위해서라면 기존의 형식을 구태여 따르지 않는 아크로님의 디자인 철학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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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드포켓은 두 개의 수납공간이 겹쳐져 있는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한쪽은 지퍼로 개폐가 가능해 소지품을 수납하기 적당하며 뒤쪽의 공간은 기타 여밈 장치가 없기 때문에 손을 편하게 넣기 적당하다. 여기서도 지퍼가 살을 노출한 채로 봉재 된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미완성'의 미학은 마르지엘라부터 꼼 데 가르송 등 수많은 디자이너에 의해 제안된 형식이긴 하지만, 아크로님의 경우 미학적인 실험이 아닌 기능적인 이유로 선택된 방식이라는 점에서 다른 디자이너들과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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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Beyond the real world

J1A 재킷을 개발한 후 2002년 아크로님이란 이름으로 소규모 캡슐 컬렉션을 진행하기 시작했고, 2003년에는 파리의 유명 편집샵 콜레트 / Colette 에서도 바잉해 판매를 하는 등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지만 그는 오랜 시간 동안 패션계에서 아웃사이더로 머물렀다. 2008년까지 파트너 미하엘라 사첸바커와 단둘이 모든 일을 처리했을 정도로 브랜드는 확장되지 못했다. 그러나 외연이 확장되지 못했을 뿐 아크로님의 디자인 세계는 더 깊고 단단해졌다. 그들은 주류 시스템에 편입되지 못한 단점을 오히려 장점으로 생각해 자유롭게 그들이 하고 싶은 디자인과 프레젠테이션 형식을 실험한다. 그들이 원하는 최고급 원단과 부자재를 이용해 파격적인 디자인을 시도할 수 있었으며, 화려한 컬렉션 쇼를 하는 대신 에롤슨 휴 자신이 직접 모델로 등장하는 담백한 룩북과 영상으로 브랜드를 홍보했다.

일반적인 수준의 홍보나 판매를 거의 하지 않은 은둔자였지만 최고의 기술력과 유니크한 디자인 방법론으로 무장한 그를 알아본 건 메이저 브랜드 들이었다. 스톤 아일랜드 Stone Island 쉐도우 프로젝트 Shadow Project 라인, 에르노 Herno 의 라미나 Laminar 라인 등의 독립적인 캡슐 컬렉션을 총괄 디렉팅 하는 직책을 맡았고, 나이키의 아웃도어 스포츠 라인인 ACG(All Conditioned Gear)를 현대적으로 부활시키는 역할도 담당하게 된다.

그리고 나이키와 스니커즈 컬래버레이션으로 진행하면서 그의 이름은 대중들에게 깊이 각인되게 된다. 2015년 발매된 나이키 루나 포스 1을 시작으로, 프레스토, 에어포스 1 을 히트시키며 아크로님은 스트릿 웨어 분야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특히 아크로님 특유의 검은 컬러와 올리브 컬러 스트랩, 화려한 색감의 콜라보 스니커즈가 합해져 '테크 웨어'라는 새로운 장르를 탄생시킨다. 형태에 대한 그 어떤 컨셉도 없이 디자인된 그의 옷이 아이러니하게도 하나의 스타일을 만들어 낸 것이다. 중국, 대만, 홍콩 등을 중심으로 그를 추종하는 마니아 층이 점차 넓어지고 있으며 특히 사이버 펑크스러운 3D 캐릭터에 아크로님 옷을 입힌 팬아트가 그려지는 등 그의 디자인은 현실 세계를 넘어 가상현실 공간으로 무한히 확장 중이다(메탈기어 솔리드로 유명한 코지마 히데오 감독도 그의 팬임을 밝혀 비디오 게임에서도 그의 디자인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증폭시키는 상황이다).

아크로님의 디자인은 누구나 보편적으로 즐겨 입을만한 스타일은 아니다. 나 역시 아크로님 코트를 입고 거리나 백화점을 돌아다니다 보면 신기한 듯 쳐다보는 눈길을 종종 받는다. 이런 높은 취향의 벽 때문에 아크로님을 단순한 스트릿 웨어로 규정짓고 크게 관심을 갖지 않는 사람들도 많으리라 생각된다. 그러나 아크로님의 결과적인 디자인에 대한 호불호는 갈릴 수 있지만 그가 제기했던 문제의식, 그리고 치열한 고민 끝에 내놓은 절차탁마의 해답들을 한 번쯤 진지하게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당신이 지금 입고 있는 옷은 과연 기능적으로 완벽한가?'

최종적인 방향성에 있어 차이는 있지만 나 역시 그를 처음 알게 된 순간부터 지금까지 이 질문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연구하며 나만의 해답을 조금씩 내놓고 있는 중이다. 작게나마 디자인을 발표하고 생산, 판매하는 과정을 거치며, 독보적인 실력을 지닌 그가 왜 그리도 오랫동안 주류 시스템으로 편입될 수 없었는지 뼈아프게 깨달을 수 있었다. 그렇기에 이 모든 어려움을 자신만의 방법으로 극복하고 현재는 당당히 메인스트림으로 이름을 알리고 있는 그의 숨겨진 저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도 알 수 있다. 현존하는 디자이너 중 그의 미래가 가장 궁금한 이유이기도 하다.

* 유인양품은 아이소플럭스의 디자이너 이강일의 패션, 디자인 칼럼입니다. 디자이너의 신념과 철학을 걸고, 좋은 제품을 만들어내는 브랜드에 관한 이야기를, 그들의 '작품'과 함께 이야기합니다. 본 글에서 소개하는 제품 및 브랜드로부터 그 어떤 금전적인 지원이나 보상, 추천도 없었음을 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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