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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른 년생' 딜레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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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akozhan via Getty Im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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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처음 만날 때가 늘 애매하다. 83이라고 하면 나중에 '빠른 년생'인 게 우연히 밝혀졌을 때 "족보가 좀 꼬였네... 애매하다"는 말을 듣고, 그렇다고 82라고 하면 거짓말이 돼 버리고, 빠른 83이라고 하면 '동갑에게 굳이 빠른 년생 대접 받고 싶어 그걸 자기 입으로 미리 밝히는' 사람이 돼 버린다. 사람에 따라 반응이 매우 다르므로 도대체 어느 장단에 춤춰야 할 지 모르겠다. 난 아직도 "몇 살이세요?"라는 이 흔한 질문이 싫다.

졸업 후, 특히 직장까지 그만둔 후엔 빠른이고 뭐고 떼고 그냥 83이라고만 하고 있다. 대부분 무탈했지만 이야기를 하다 보면 아주 사소한 부분에서 밝혀지는 경우가 있다. "89년도에 대만 건너가서 한인학교 입학했어요, 내가 6학년 때 성수대교 무너졌었어, 나 중2 때 H.O.T 데뷔했는데" 같은 얘기들이 툭 나올 때. "89년이면 저희 유치원생인데요", "성수대교 94년인데? 그럼 5학년 아냐?", "이상하다. H.O.T 나 중1 때 나온 걸로 기억하는데?" 같은 반론이 나오면 "아, 내가 빠른이라..." 하고 말을 얹을 수밖에 없게 된다. 그때의 묘한 짧은 침묵이란... 그 자리에 하필 82년생이 있거나, 갑자기 학번 얘기까지 나오면 더하다. ✌️교통정리✌️를 다시 해야 하는 거 아니냐는 말이 반드시 나온다. 아마 그들도 내가 '83이 되고 싶어' 하는지, '82가 되고 싶어' 하는지 모르기에 당황스러워서 그랬을 것이다.

2000년부터는 빠른 년생 제도가 없어졌다니 그나마 다행이다. 그러나 한 번 빠른 년생으로 살아온 나 같은 이들은 계속해서 위와 같은 애매한 상황을 신경 써야만 한다. 애초에 나이주의가 만연한 이 나라에서 왜 '이듬해 2월생까지는 같은 학년'이라는 기준을 만든 건지 알 수가 없다. 아예 언니/누나, 오빠/형 같은 호칭을 없애 버리든가... 가까워지고 싶은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자 할 때 한 살이라도 많으면 형 누나 따위로 불러주어야 하니 초면에 나이를 반드시 묻게 되고, 그 한두 살 차이로 수직적 위계가 생기니 서열 좋아하는 작자들이 그렇게 목을 매잖나.

예전 모 TV 프로그램에 출연한 DJ DOC의 이하늘이 빠른 년생 때문에 본인이 속한 모임의 '족보가 꼬인' 상황을 얘기하며 입에 거품을 문 적이 있었다. 모 연예인이 실제로는 자기보다 1살 어리면서 빠른 년생임을 속이고 말을 놓은 것이 건방지다는 것이었다. "좀 봐줄 수도 있는 거 아닙니까? 그래도 같은 해에 입학하고 같은 시기 졸업했는데." MC가 다독이듯 건넨 말에 불혹의 나이를 넘긴 이하늘이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으며 쏘아붙이던 말이 잊혀지지 않는다. "나랑 같은 학교 나온 거 아니잖아요."

어잌후야. 이 나이 먹고도 저런 사람한테 걸리지 않으리란 보장 없구나 싶으니 씁쓸하더라.

다같이 늙어가는 처지에 한두 살 차이에 광분하는 것 솔직히 매우 웃긴다. 아니, 생일 케이크에 초 꽂아줄 때 말곤 애초에 나이가 뭐 그리 중요한 지 모르겠다. 상대방의 나이를 알아두면 어떤 면에서 도움이 되나요? 뭐가 달라집니까? '언니/누나, 오빠/형이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르니까'라는 이유를 제하고 나면, 초면에 상대방의 나이를 꼭 알아둬야 할 필요가 있나요?

서로 나이부터 까지 않고도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사교모임 같은 게 있다면 가보고 싶다.


* 이 글은 필자의 페이스북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