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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두언 회고록] 11. 인수위 시절의 어두운 비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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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정무부시장, 3선 국회의원 등을 역임한 정두언 전 의원의 회고록 [최고의 정치, 최악의 정치 - 정권은 왜 매번 실패하는가]를 연재합니다. 연재의 다른 글은 정 전 의원의 허핑턴포스트코리아 블로그 페이지에서 볼 수 있습니다.


대선 이후 어수선한 상황

대선승리는 어느 정도 예상됐으니 그 이후를 대비한 인수위원회 밑그림도 준비해야 했다. 그런데 전혀 그런 움직임이 없었다. 한동안 눈치를 보다가 나는 조심스럽게 MB에게 인수위를 위한 사전 준비를 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경선캠프 구성 때의 경험 때문인지, 이번에는 MB가 그 자리에서 바로 해보라고 답을 주었다. 나는 김원용 이화여대 교수, 박형준 전 의원, 명지대의 김아무개 교수 두 명 등 4명으로 팀을 짰다. 팀장은 윤여준이었다. 그때 윤여준은 그 일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MB와 일하는 스타일도 잘 안 맞는데다, MB가 그를 데면데면 대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김원용 교수가 안되겠다 싶었는지 김용태(현 새누리당 국회의원) 등 제자들을 데리고 별도 준비팀을 만들었다. 대선을 2주 정도 앞둔 시점에 윤여준팀과 김원용팀에서 만든 두 가지 안을 섞어서 MB에게 한 시간 정도 인수위 관련 보고를 했다. 발제는 내가 했고, 내용은 인수위를 포함해서 대선 이후 행보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날 보고도 MB는 성의 없이 듣고 대충 끝을 낸 것으로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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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월 이경숙 인수위원장이 서울 삼청동 대통력직인수위원회 대회의실에서 열린 간사단회의에서 참석자들과 인사하고 있다.

'인수위원장 이경숙'은 어떻게 탄생했나

'MB 인수위'에서 얼굴마담은 이경숙 전 숙명여대 총장이었다. 이경숙은 세간에 '소망교회 인맥'으로 알려져 있지만 MB와 또 다른 인연이 있다. 서울시장 시절 MB는 가끔 서울지역 대학의 총장들과 모임을 가졌다. '지식인의 상징'으로 불리는 대학 총장들과의 만남은 MB가 지식인 사회에 나름대로 자신을 알리고 지지세를 확산해 가는 방법의 하나였다. 훗날 MB 정부에서 국무총리를 지낸 정운찬(전 서울대 총장)도 이 모임에 참석했다. 이경숙의 인수위원장 선임과 관련해서는 김윤옥 여사도 관련이 있다. 김윤옥 여사가 숙명여대 최고위 과정을 다녔기 때문이다. 그 당시 김윤옥 여사의 담당 교수가 MB 정권 초 청와대 사회정책수석이었던 박미석이다. 김윤옥 여사가 숙대 최고위 과정을 다닐 때 총장이었던 이경숙 하고 가까워졌다는 얘기도 있었다. '이경숙 인수위원장'이 물망에 올랐을 때 나도 "그래, 여성 인수위원장! 멋진데..." 생각하면서 MB에게도 긍정적으로 의견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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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당선자가 2008년 1월 1일 서울 삼청동 인수위 사무실에서 열린 인수위 시무식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 한겨레

주먹구구식으로 진행된 황당한 인사 작업

인수위가 출범하면서 당선인 비서실 쪽에서 인사 작업을 한 사람은 나와 김원용, 박영준 세 명이었다. 그런데 한 일주일 정도 지나니 나는 내심 겁이 나기 시작했다. 막상 인사 작업이 주먹구구식으로 진행되다 보니 '인사를 이렇게 해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한 예를 들자면 내가 잘 아는 인물이 청와대 수석비서관으로 거론됐다. 나는 그가 어떤 인물인지 뻔히 알기 때문에 황당했다. 이런 인물이 무슨 청와대 수석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인사를 하면 큰일 나겠는데' 하는 걱정이 앞을 가렸다.

'이대로는 도저히 안 되겠다'고 생각한 나는 김원용 교수와 상의했다. 더 많은 사람을 참여시켜서 더 많이 추천을 받고, 또 평가를 받고 해야지 이렇게 몇몇이 주먹구구식으로 인사 작업을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 것이다. 나는 김 교수에게 "우리는 실무적인 일만 하고 빠지자"고 말했다. 그래서 만든 것이 일종의 인사위원회이다. MB에게 더 많은 사람을 참여시키고 평가를 받아서 인선 작업을 하자는 내용으로 인사위원회 안을 만들어서 갔다. 위원장을 류우익으로 하는 안이었다. MB에게 보고했더니 들여다보다가 "그런데 지금 류우익은 어디에 있어?"라고 물었다. 그가 어디 있는지 몰랐던 것이다. 나는 박영준에게 "빨리 류우익의 위치를 알아보라"고 했다. 프랑스인가 독일인가 유럽에 가 있었다. MB는 자신이 안을 더 살펴 볼 테니 놓고 가라고 했다. 나는 "정리해서 말씀주시라" 하고 나왔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이것이 나와 MB의 관계가 결정적으로 틀어지기 전 마지막 만남이었다.

MB의 역린을 건드리다

MB는 어느 날 밤 느닷없이 롯데호텔로 나를 불렀다. 그리고 한상률 국세청장을 거론하며 1시간 동안 호되게 나를 질책했다. "왜 쓸데없이 국세청에 나와 관련된 자료를 요구했느냐"는 것이었다. 내 머릿속에 얼마 전 풍경이 떠올랐다. 박재성이 나를 찾아와 국세청에서 'MB파일'을 만든 게 한상률로 추정되는데, 한상률로부터 자료를 받아내야 한다고 했다. 박재성은 국정원의 MB파일도 거론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만나서 요청을 하겠다고 했다. 나는 박재성 말대로 MB와 관련한 국정원 파일과, 국세청 파일을 확보해야겠다고 생각하고 MB에게 "국정원 파일과, 국세청 파일을 받겠습니다"라고 보고하고 승낙을 받았다.

박재성은 국정원에 먼저 갔다. 국정원은 박재성에게 "자료는 줄 수 없고 대신 모니터로 보시라"고 했다 한다. 그런데 모니터를 보니 그 내용이 거의 신문스크랩 정도 수준이었다고 했다. 박재성은 "장난 하나!" 라며 일갈하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나는 MB에게 사실대로 보고를 했다. 특별히 보고 할 내용 자체가 없었다.

한편, 한상률 국세청장은 자료 제출을 완강히 거부했다. 그러다가 내게 만나자는 연락을 해왔다. 박재성은 "자료를 받을 때까지 절대 그를 만나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나는 "알았다"고 대답하고 한상률을 피했으나 한상률의 집요한 요청을 계속 거절하지 못했다. 사전에 MB로부터 허락까지 받은 사안이지만, 한상률 국세청장에게 MB 파일을 요구한 행위는 결과적으로 MB의 역린을 건드린 셈이 되어 버렸다.

인수위에 내 사람을 심었다는 오해들

이 문제가 결정적인 빌미가 되기는 했지만 사실 인수위가 가동되는 초기부터 이미 나에 대한 견제가 시작됐다. <한겨레>가 보도한 '인수위, 정두언 천하?' 기사가 시작이었다. 이른바 '정두언 인맥'이 인수위에 포진했다는 내용이었다. 특히 고교동기들을 대거 끌어들였다는 것이다. 나로서는 억울한 측면이 있었다. 인수위 전문위원 중 내 고교 동기인 경기고 71회 출신은 조원동, 김준경, 이용준, 최중경, 윤수영, 이선용 등이었다. 최중경은 강만수가 추천했고, 김준경은 KDI 원장에게 인수위에 사람을 보내라고 했더니 그가 김준경을 보낸 것이다. 또 이선용(인수위 사회교육문화분과 전문위원)은 김백준과 같이 일했던 친구다. 이밖에 경기고 71회가 몇 명 더 있었지만 그들이 어떻게 인수위에 왔는지는 나도 몰랐다.

내가 실제로 추천한 고교 동기는 조원동 이용준 서종대 등 세 명이었다. 원래 조원동과 이용준은 부처에서 에이스로 꼽혔던 인재들이었다. 그런데 사실 내가 추천한 사람들 중에 재경부 조원동과 건교부 서종대의 인수위행은 문제가 있었다고 인정한다. 조원동, 서종대가 인수위에 가니까 전 관가가 놀랐다고 한다. 두 사람은 DJ, 노무현 정권 때 청와대에도 근무하면서 계속 잘나가던 공무원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이 사람들을 챙긴 이유는 자타가 공인하는 능력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었다. 서종대는 공직 후배 중에 내가 무척 아끼는 사람이었고, 조원동은 나와 고등학교 때부터 죽마고우였다. 나는 능력이 출중한 이들이 DJ, 노무현 정부 때 잘나갔다는 이유로 MB정부 들어와 뒤켠으로 밀리는 것은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인수위에 추천했다. 그리고 훗날 그들은 MB 정부에서도 능력을 인정받아 계속 중책을 맡았다.

<한겨레> 기사가 나온 뒤 나는 내가 경솔했다고 후회했다. 나와 가까운 사람들은 가급적 추천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나중에 경제수석을 지낸 김대기가 고교 동기들끼리 모인 자리에서 한 말이 있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있는데 계속 황금알을 빼먹어야지 그 거위를 잡아먹어서야 되겠냐" 라고.

MB의 견제

게다가 MB 자체가 나를 견제했다. 나는 서울시장 시절부터 MB의 견제를 항상 피부로 느끼곤 했다. 앞서 얘기했듯이 당내 경선 때 경선 캠프를 꾸려야 하는데 차일피일 미루기만 했다. 당시는 그 일을 할 사람이나 믿을 사람이 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내게 힘이 실리는 게 내심 싫었던 것이다. 그러다 결국 MB 특유의 애매한 태도로 내게 맡겼다.

대선 때도 내게 특별한 역할을 주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 전략기획총괄팀장이라고 해버렸다. 팀장이라는 낮은 직명을 쓰니 누구도 시비를 걸고 싶어도 걸 수 없었을 것이다. 인수위 때도 마찬가지로 나는 아무런 타이틀이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특보라고 불렀다. 그랬더니 MB가 "특보는 무슨 특보야, 보좌역!" 이랬다. MB가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DJ 때 박지원처럼 되면 되겠어?"였다. 자기 밑에 있는 사람이 박지원처럼 힘을 가지면 안 된다며 늘 주위를 경계한 것이다.

그럼에도 MB는 왜 나를 신뢰했던 것일까. MB는 워낙 의심이 많은 사람이다. 나는 이미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줄곧 그와 함께 일하면서 다소라도 나의 이해와 관계되는 일을 할 때면 항상 100% MB에게 미리 얘기를 했다.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는 얘기도 틈만 나면 모두 다 말했다. 이러니 누가 나를 이권에 개입한다며 모함을 해도, MB는 이미 그 내용을 알고 있기 때문에 웃어 넘길 수밖에 없었다. MB는 서울시장 시절 수시로 정무부시장실에 인터폰을 했다. 어느 날 인터폰이 와서 받았더니 "이게 뭐예요?" 하는데 말투부터 달랐다. 느낌이 '너 잘 걸렸다' 이런 것 같았다. 산하기관의 어느 사외이사를 왜 보고도 없이 당신 마음대로 임명 했냐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 사람 박영준 친척인데요, 요즘 사정이 어렵다고 해서 도와주자고 시장님께 말씀드렸잖아요." 했더니 "아!" 하면서 끊었다. '너 제대로 걸렸다' 하고 불끈 인터폰을 한 것이었는데, 머쓱하게 된 것이다.

나는 MB에게 단 한 차례도 흠을 잡힌 적이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MB를 속인 적도 없고 의심 받을 짓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헌신적으로 일했다. 그런데도 대선 과정에서 변변한 타이틀도 안 줬다. 하지만 결국 그게 내게 도움이 됐다. 타이틀이 있었으면 그 프레임에 갇혔을 텐데, 오히려 없다보니 마치 리베로처럼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이 더 넓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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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0월 국회 기획재정위원회의 국세청 국정감사에서 한상률 국세청장이 업무보고를 하고 있다.


한상률 전 국세청장과 MB파일

하여간 나는 국세청 파일과 관련해 2008년 1월 13일 한상률 당시 국세청장을 스위스그랜드호텔 비즈니스룸에서 만났다. 그날의 풍경은 이랬다.

한상률 : "그 자료들 나만 알고 있으면 안 되겠습니까?"
정두언 : "문제가 있습니까?"
한상률 : "없습니다."
정두언 : "그러면 청장님만 알고 있을 이유가 무엇입니까?"
한상률 : "조금 그렇습니다."
정두언 : "조금 그렇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것 아닙니까?"
한상률 : "저만 알고 있으면 안 되겠습니까?"
정두언: "문제가 있는 자료를 청장만 알고 있겠다? 그럼 이제부터 청장이 MB의 최측근이네요."
한상률: "대신 이것은 드릴 수 있습니다."

한상률은 내게 슬쩍 A4용지 한 장을 건네며, 이들이 MB 파일을 만든 사람들 명단이라 했다. 얼핏 보니 명단 제일 위에는 내 고교 선배인 당시 국세청 고위 간부 K씨의 이름이 들어 있었다. 당시 그는 한상률과 경쟁 관계에 있었다. '이 친구가 나를 가지고 노나?' 속으로 발끈했지만, 일부러 안 본 척 하면서 "이런 것 필요 없다"며 서류를 밀쳤다. 한상률은 내가 계속 이러면 내 선배인 K씨가 다칠 수도 있다는 일종의 은밀한 협박을 내게 한 것이다. 도저히 얘기가 안 될 것 같아 "가겠다"고 일어섰다. MB가 롯데호텔로 한밤에 나를 불러 호된 질책을 하기 며칠 전에 있었던 일이었다.

MB의 질책

추측컨대, 한상률이 국세청 MB 파일과 관련해 진즉에 선을 대고 있던 이상득에게 SOS를 쳤을 것이다. 그것도 "정두언이가 이상한 자료를 요구한다"는 식으로 왜곡했을 것이고, 이상득으로부터 그 얘기를 전해 들었을 MB는 내 얘기는 들으려하지도 않고 나를 불러 호되게 질책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MB에게 자초지종을 얘기했지만, MB는 했던 말을 하고 또 하며 화만 냈다. MB가 나를 질책하는 현장에는 김원용과 박영준이 함께 있었다. 김 교수는 눈치를 봐가며 나를 변호했지만, 박영준은 한 시간 내내 끽소리도 안 했다. 그 다음날인가 박영준이 나를 찾아와 하는 말이 "MB 얘긴데요, 앞으로 인사 작업과 관련하여 검증팀과 인사위원은 아무도 모르게 하라 그러셨습니다"라고 말했다. 그 얘기는 결국 나보고 인사에서 빠지란 얘기 아닌가. MB가 직접 얘기한 것도 아니고 박영준을 통해서 얘기를 들으니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그렇다고 MB한테 가서 "박영준이 이렇게 얘기하라 하셨다는데 맞습니까?" 라고 물어볼 수도 없는 일이 아닌가.

인수위에서 철수하다

나는 '차라리 잘되었다' 싶었다. 김원용 교수를 만나 사정을 설명하며 "인사 작업에서 빠집시다. 오히려 좋은 기회입니다. 나중에 어떻게 책임을 집니까"라고 말했다. 김 교수도 동의했다. 나는 그 직후(아마 2008년 1월20일쯤일 것이다) 미아삼거리에서 정태근을 만나 대낮에 막걸리잔을 기울이며 그 당시의 괴로운 심정을 털어놓았다. 나는 2008년 1월 25일 인수위 기자실에 나타나 "나는 인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고 기자들에게 얘기했다. 그런데 아무도 믿는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훗날을 생각해 '내가 인사 관련 일에서 빠졌다는 자국을 남겨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렇게 했다. 그리고 곧바로 나는 짐을 정리해서 인수위 사무실에서 철수했다. 나는 나중에 다시 MB의 지시를 받아 그 해 4월 총선 공천 작업에는 관여했지만, 이때부터 인수위 인사 작업에서는 완전히 빠졌다.

2008년 2월25일 내가 쓴 홈페이지에 쓴 칼럼은 당시 내가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제목이 '뒤늦게 대선을 마무리하며'였다.

뒤늦게 대선을 마무리하며

대선은 작년 12월 19일에 끝이 났지만,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대선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대선의 뒤처리가 끝이 없기 때문이다. 뒤처리에는 별의별 일들이 많지만, 그중 제일 크고 힘든 일이 '고생한 사람'들에 대한 처우 문제다. 한마디로 말하면 고통 그 자체다. 오죽하면 낙선한 측이 부럽다는 생각이 들까. 이 일은 아마도 영원히 끝이 나지 않을 것이다.

대선이 끝나고 대통령을 만들었다는 말들을 한다. 한마디로 웃기는 얘기다. 도대체 누가 대통령을 만든다는 말인가. 대통령은 하늘이 만든다는 말이 차라리 맞다. 나 자신도 내가 대통령을 만든 게 아니라 대통령이 될 사람을 잘 선택했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명박 대통령과 서울시장 예비후보 시절에 만났다. 그때만 해도 MB가 매우 훌륭하지만 정치적으로 몹시 외로운 분이기에 내 역할이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2002년 7월 MB가 서울시장이 되고, 그 해 12월 이회창이 대선에 패배한 다음날 나는 이제 비로소 MB에게 대통령의 기회가 열렸다고 생각했고, 다음해 7월 청계천 복원공사 기공식을 마친 날 나는 마침내 MB가 대통령이 될 것으로 확신했다. 차기 대통령으로 당선될 조건들을 다 갖추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경제, 실적, 일, 중도, 비정치 등등. 아무리 눈을 씻고 봐도 차기 주자 중에 이에 필적할 조건을 갖춘 후보는 없었다. 실제로 경선과 본선 기간 내내 모든 다른 후보들은 '이래서 내가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가 아니라, '저래서 MB는 대통령이 되면 안 된다'로 일관하지 않았는가. 그 후로 17대 대선이 끝날 때까지 나는 단 한 순간도 MB가 대통령이 되는 것에 대해서 의심을 해 본 적이 없다.

나는 한나라당이 대선에서 이기던 날 전혀 기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첫째로 나는 이미 당내 경선이 끝나던 날 대선은 끝이 났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날 잠실체육관에서 나는 오랫동안 참고 있던 눈물을 터뜨렸다. 그동안 쌓여왔던 외로움, 억울함, 분노. 환희 등이 눈물로 뒤범벅이 되어 쏟아져 내렸다. 둘째는 곧이어 다가올 총선에서 과반수를 얻어야 진정한 대선승리가 될 텐데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셋째는 대선의 뒤처리, 후유증 등으로 고통을 당할 것이 눈에 뻔히 보이기 때문이었다.

이제 총선을 눈앞에 두고 있다. 나는 당초부터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상하듯이 한나라당이 대선 승리의 여세를 몰아 총선에서 압승을 한다고 믿지 않았다. 우리 모두가 알듯이 민심은 격변하는 것이며, 국민은 권력이 오만하다 느껴지면 바로 등을 돌려버린다는 사실 때문이다. 판단 미스는 항상 사태를 자기에게 유리하게 바라볼 때 오는 것이다. 지금까지 전국의 모든 한나라당 예비후보들은 자기가 상대 당 후보보다 월등히 앞서고 있다는 여론조사결과를 가지고 다닌다. 이게 바로 판단미스의 빌미며 오만의 출발점이 되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4년 전 바로 이맘때 나의 지지율은 14%였고 상대당 후보의 지지율은 54%였다. 그런데 내가 이겼다. 그때만 해도 전국에서 한나라당이 5명도 못 이긴다고 했다. 그런데 108명이 당선되었다. 지금 진행되고 있는 정부 인선이나 한나라당 공천은 총선에서 압승한다는 전제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 같다. 참으로 아슬아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지금부터 수도권 표밭은 심하게 요동치고 있다. 세상에 거저먹기는 없는 것 같다.

이상득을 농락한 국세청 고위간부

한편, 나는 공천 작업이 한창 중이던 2008년 3월 10일 서울 중구 소공동 롯데호텔 일식당 모모야마에서 이상득과 오찬을 했다. 그 자리에서 이회창 출마와 관련한 얘기가 나왔다. 이회창이 대선에서 낙선한 후 창당을 해서 총선에 출마하는데 이에 대한 대책을 마련해야 하는 게 아니냐는 얘기들이 오갔다. 그렇게 되면 총선 구도가 안 좋아지고 충청권에서 한나라당이 위태로워지니 대선 때 쓰려고 했던 이회창의 2002년 대선자금 사용(私用) 문제를 공개하자는 것이었다. 다 알다시피 설마 했는데 이회창은 2007년 대선에 출마했다. 보수표의 분열이 불 보듯 뻔했다. 나는 이회창의 수행비서였던 이채관을 가끔 만났었다. 당시 이채관은 일관되게 이회창이 대선에 출마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설마?' 했었다. 결국 설마가 사람을 잡은 셈이었다. 이회창의 출마 소식을 접한 MB 캠프는 머리가 아팠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후 이회창은 2008년 총선을 앞두고 충청권을 기반으로 하는 당을 만들려고 했는데, 그 창당 작업을 저지하기 위해 결국 강용석-이두아가 기자회견을 통해 2002년 이회창 파일의 일부를 공개했다. 그리하여 이회창에 대한 검찰 수사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회창의 돈 심부름을 한 결정적인 인물이 중국으로 도피해 잡지 못했고, 결국 검찰은 이 사건을 기소중지 하고 말았다. 천하의 대쪽 이회창도 결정적 증인을 해외로 도피시키면서 수사를 방해했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어쨌든 그때 식사 자리에서 이상득은 "국세청 고위 인사가 그러는데 지금 김앤장 세무조사 들어간데"라고 말했다. 나는 "그게 뭐죠?" 라고 물었다. 이상득은 "거기를 파면 이회창의 문제가 나온다는데"라고 했다. 당시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경선과 대선 과정에서 김앤장이 MB를 많이 도와줬기 때문이다. 그러니 거기를 파헤치면 이회창보다 MB의 문제가 나올 가능성이 높은 게 아닐까. 그때 내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누군가가 이것으로 자신의 구명 작업을 한 것이로구나' 싶었다. 김앤장 세무조사에서 이회창 자료가 나오면 좋고, MB 자료가 나오면 더 좋을 터였다.

MB까지 농락한 국세청 고위 인사

국세청 고위 인사는 나중에 그런 일을 또 한다.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에 대한 세무조사다. 그가 MB와 독대를 해서 박연차를 잡으면 노무현을 잡을 수 있다고 했다는 말이 돌았다. 그리고 실제로 박연차 조사를 하면서, 당시 또 다른 권력기관의 장이 박연차와 관련이 있다는 내용으로 첫 번째 조사 보고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정치권에는 사정기관장들 대부분을 교체한다는 말이 무성했다. 그래서 이 인사가 살아남기 위해 선수를 쳐서 박연차 건으로 다른 사정기관장을 쳤다는 얘기가 돌았다. 어느 날 한 사정기관의 고위 간부가 내게 전화를 했다. "청장이 지금 사색이 되어 사무실에서 결제도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형님, 무슨 일이에요?"라고 했더니 "그 자식이 나를 씹었어요." 그랬다. 내가 "누구요?" 했더니 "알잖아요"라고 했다. 그 이후 한나라당 전당대회(박희태가 당대표로 됐을 때) 무렵 한 저녁 자리에서 문제의 고위 인사를 만났다. 나는 일부러 그에게 "선배, 당대표 나가시죠?" 했다. 그는 "무슨 말이에요?" 했다. 나는 "선배, 정치 9단이잖아요" 라고 비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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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월 서울 삼청동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서 열린 간사단회의에서 박재완 정부혁신규제개혁 TF팀장이 정부조직 개편 방향에 대해 말하고 있다.

정부 조직 개편과 박재완

인수위에서 매 정권마다 되풀이 하는 일 중 하나로 '정부 조직 개편'이 있다. 노태우 정권 때부터 한 번도 예외가 없었다. 새 정권이 이전 정부의 조직을 개편한다는 것은 조직 체계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음 정권도 전 정부의 조직을 개편한다. 그 역시 조직 체계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계속 도돌이표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설사 정부 조직이 잘못 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본질은 조직이 잘못 된 게 아니라, 조직 운영을 잘못한 것이다. 조직 운영은 누가 하는가. 장관, 총리, 대통령이다. 그들이 조직 운영을 즉, 일을 잘못한 것을 조직 탓으로만 생각하는 것이다. 내가 성공한 대통령이 되어야겠다고 마음먹으면 내각을, 조직을 잘 운영해야겠다고 생각해야 하는데, 그 이전에 조직부터 뜯어 고쳐서 아무개 표 정부로 만들고 싶은 것이다. 전형적인 하드웨어적 즉 아날로그적 발상이다.

MB정부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인수위가 꾸려지자 정부 조직 개편을 서둘렀다. 그런데 실은 아무런 준비가 안 되어 있었다. 모두가 한 마디씩 하니 배가 산으로 가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보다 못해, 내가 MB에게 건의했다. "정부 조직 개편은 지금까지 여러 차례 해왔습니다. 그때마다 실무 작업을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를 데려오면 일이 쉽게 진행될 것입니다. 그는 이미 안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 사람이 바로 박재완이다. 나는 박재완이 MB정부에 등장한 배경 중 하나가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후로 그는 정무수석, 국정기획수석, 고용노동부장관, 기재부장관을 거치면서 MB정부에서 승승장구했다. 박재완은 재기발랄하고, 성품도 온유한 사람이다. 하지만 큰 그림을 못 본다고 평하는 사람도 있다.

정부 조직 개편의 구체적인 내용을 가지고 논할 자리는 아닌 것 같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도 그랬듯이, 다음 정부도 첫 번째 일로 정부 조직 개편부터 착수할 것이다. 하지만 지난 일이 보여주었듯이 다 소용없는 일이다. 누구를 어떻게 쓰는 일이 본질이지, 조직은 그 다음 일이라는 것을 알고, 제발 다음 정부는 조직보다는 사람 준비에 더 힘을 기울였으면 좋겠다.


<글 싣는 순서>

연재를 시작하며 | 벌거숭이 임금님의 나라에서

1. 위기의 시절을 보내던 MB는 어떻게 서울시장이 되었나

2. 노무현 정부는 어떻게 청계천 복원에 협조하게 되었나

3. '좌파정책'인 대중교통개혁의 성공

4. MB 캠프의 태동

5. 안국포럼과 경선캠프의 실상

6. 최태민의 의붓아들 조순제 "이런 사람은 안 된다" 기자회견

7. 대선승부의 최대 걸림돌 'BBK 사건'

8. 왜 모든 정권은 비슷한 몰락 과정을 거치는가

9. 대선캠프의 변질

10. 백해무익한 정권 인수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