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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두언 회고록] 9. 대선캠프의 변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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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정무부시장, 3선 국회의원 등을 역임한 정두언 전 의원의 회고록 [최고의 정치, 최악의 정치 - 정권은 왜 매번 실패하는가]를 연재합니다. 연재의 다른 글은 정 전 의원의 허핑턴포스트코리아 블로그 페이지에서 볼 수 있습니다.


개혁색이 바래가다

MB는 대선후보가 되기 오래 전부터 중도개혁, 실용노선을 견지했다. 대선을 목표로 한 전략적인 포석이었다. 목표는 수도권, 구체적으로는 수도권 40대를 핵심 타깃으로 했다. 수도권 40대는 선거 때 캐스팅 보트(casting vote) 역할을 하는, 이른바 대표적인 스윙보터(swing voter)들이다. 쉽게 말하면 '산토끼'라고 할 수 있다. 대선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이들 수도권의 중도층을 상징적으로 확보하는 것이 관건이라고 봤다. 이런 이유로 서울시장 선거 때부터 일관되게 수도권 중도층을 타깃으로 움직였고 이들로부터 지지를 받았다. 이런 흐름은 대선 후보 경선 나아가 대선 때까지 이어졌다.

MB는 대선 후보가 되기 전까지 정치적인 인맥 자체가 강한 편이 아니었다. 비례대표 국회의원을 하다가 종로에서 지역구 국회의원을 잠깐 한 것이 정치 경력의 전부였다. 또한 그는 현실 정치에 대해 거리감을 갖고 있었다. 꼭 이것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MB는 대선 전까지는 나와 정태근, 신재민, 김해수 등 시종일관 젊은 층과 일을 해왔다. 안국포럼 시절이나, 경선캠프 당시의 면면을 보더라도 대부분 젊고 개혁적인 사람들이 많았다.

원로들이 전면에 등장한 것은 대선캠프를 꾸리는 과정에서였다. 소위'6인회'라는 말이 이때부터 나왔다. 6인회는 이상득, 최시중, 박희태, 김덕룡, 천신일, MB를 일컫는다. 이상득은 자신과 가까운 임태희를 후보 비서실장으로 밀어 넣으면서 본격적으로 주요 정책 및 인사문제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 전에도 이상득이 관여를 했으나 자문이나 고문 역할 정도에 그쳤다. 이상득은 왜 직접 나서기 시작한 것일까. 경선이 끝난 이후 내부에서 이상득 퇴진 운동이 슬금슬금 제기되자 위기감을 느끼고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그때만 해도 나는 동생이 대통령이 된다면 이상득은 당연히 알아서 물러설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순진한 생각이었다. 사실 이상득과 나는 남다른 인연이 있었다. 이상득은 2004년 총선 때부터 내 후원회장을 맡고 있었다. 나도 이상득을 좋아하고 따랐다. 이상득의 경륜과 정치적 능력, 인품을 높게 평가했다. 나는 이런 맥락에서 MB가 대통령이 되면 이상득은 초야에 묻히던지 외국에 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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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8월 한나라당 최고중진연석회의에 참석한 열려 이상득 의원(왼쪽)과 이재오 최고위원.

이상득, 6인회 내세우고 임태희 발판 삼아 현안 적극 개입

그러나 이상득은 임태희를 후보 비서실장으로 앉힌 뒤 원로자문그룹이라는 '6인회'를 내세워 현안에 적극 나서기 시작했다. 구체적이고 명확하지는 않지만 '뭔가 이상하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걱정 속에 소장 개혁파들이 '이상득이 총선에 나오면 안 된다'라는 얘기를 삼삼오오 주고받기 시작할 때였다. 사실 '6인회'는 실권이 있는 모임은 아니었다. 모양 갖추기에 불과했다. 이상득이 혼자 개입하기 뭐하니까 모양새를 갖춰서 슬쩍 물타기 하고 들어와서 관여를 하려고 만든 것이다. 김덕룡이나 박희태가 역할을 했다면 얼마나 했겠나. 이를테면 내가 선대위 안을 짤 때도 이상득, MB에게 승인을 받은 후 6인 회의를 소집해서 마치 거기서 결정한 것처럼 하는 식이었다.

이상득의 목소리가 커지고, 개입이 늘어나면서 중도개혁 노선은 밀려나고 수구우파적인 노선으로 회귀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사람을 쓰는 문제도 그렇지만, 정책적인 면에서도 자꾸 변해갔다. 예를 들면, 당시 경제 관련 정책은 곽승준과 강만수가 역할을 많이 했다. 그러나 강만수보다는 거의 곽승준의 입장이 반영됐다. 강만수가 기조와 맞지 않는 정책을 고집스럽게 발표했다가 네티즌들로부터 뭇매를 맞고 철회한 일도 있었다. 그때만 해도 강만수는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나를 찾아와서 부탁도 하고 그랬다. 그러나 나를 비롯한 소장파들은 강만수가 주장하는 정책이 선거 국면에서 표를 잃는 정책들이었기 때문에 반대하곤 했었다. 그런데 이상득이 본격 등장하면서 강만수류의 경제 정책들이 속속 나왔다.

대선자금 실무는 김백준, 조달은 이상득 구조 가동

MB 캠프에서 이상득의 핵심적인 역할은 '돈' 문제였다. '실무는 김백준, 조달은 이상득'. 이 구조는 오래 전부터 정착된 체계였다. 물론 나중에는 천신일, 최시중도 자금을 조달하는 역할을 했다. 최시중은 주로 언론사를 담당했기 때문에 돈을 많이 썼다. 이를테면 시내에 있는 한정식집 '수정'은 최시중의 구내식당이나 다름없었다. 그래도 자금을 만지는 규모가 제일 큰 사람은 이상득이었다. 캠프의 팀장들은 김백준으로부터 돈을 타다 썼고, 김백준에게 돈을 주는 사람은 이상득, 천신일, 최시중이었다. 구조가 이렇다보니 대선 때에도 이상득은 계속 돈을 모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대선 후보 경선이 끝나자마자 캠프에 돈이 싹 말랐다. 경선에서 이긴 후 후보가 됐으니 돈이 오히려 더 풍성해져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다. 대선 때는 아무래도 경선 때보다는 일하는 단위가 커진다. 대표적인 경우가 김인규가 이끌던 방송팀이었다. 김인규는 60여 명으로 방송팀을 꾸렸다. 인원이 많다 보니 밥 값 등 실비가 꽤 들어가는데, 한 달 넘게 자기 돈으로 썼다. 참다못한 김인규는 내게 서너 차례나 '내 돈 쓰면서 일할 수는 없지 않느냐, 사기 당했다'며 자금 독촉을 요청하곤 했다. 권오을도 유세단장을 하면서 유세단을 이끌어야 했기 때문에 밥값, 차비가 많이 들었다. 권오을도 내게 돈을 안 준다고 난리를 쳤다. 내게 이럴 정도였으니, 이상득에게는 오죽했을까.

역대 대선에서 돈을 조달하는 역할은 주로 선거총괄본부장을 맡은 사무총장이 했다. 그러나 당시 사무총장을 맡고 있던 이방호는 의도적으로 돈에 손을 안 댔다. 심지어 자기와 밥 먹는 기자들 밥값까지 내게 내달라고 했을 정도였다. 돈을 조달해서 나눠줘야 할 사람이 오히려 자기가 쓴 돈까지 달라고 하는 희한한 선거가 17대 대선이었다. 돌이켜보면 대선을 치르고 사무총장이 사지가 멀쩡한 적이 별로 없었다. 이 사실을 잘 아는 이방호는 영악한 처신을 한 것 같다. 사실 이방호가 사무총장이 된 데에는 내 역할이 컸다. 당시 이방호는 나이는 있었으나 재선 의원이었다. 과거 이재오가 원내대표 할 때 러닝메이트로 나가서 정책위의장도 했다. 이방호는 일찍 캠프에 들어온 공신 가운데 한명이었다. 그는 박근혜의 눈치를 보는 영남 의원들을 끌어들이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다른 때도 그렇지만 특히 선거를 앞둔 상황에서는 사무총장의 역할이 중요하다. 선대본부장 역할도 해야 하고, 자금도 맡아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이방호를 추천한 이유는 경선을 하면서 그와 허물없이 대화도 하고 가깝게 지낸 경험으로 판단하건대 그가 궂은일들을 잘 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반면 이재오는 '이방호 사무총장'을 반대했다. 하루는 MB가 내게 이렇게 물었다. "왜 이재오는 이방호가 안 된다고 하는 거야?" 나는 이렇게 답했다. '자기에게 녹록지 않으니까 그럴 거예요.' 다음 날 MB는 '이방호 사무총장'을 전격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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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정권이 개입해 MB 돈줄을 차단했다?

어쨌든 MB가 대선 후보가 됐는데 왜 갑자기 캠프에 돈이 말랐던 것일까. 확실한 근거는 없지만 내가 보기에 정권에서 개입했을 가능성이 크다. MB의 당선이 확실시되는데 그것을 방해하거나 저지할 수 있는 방법은 특별히 없었다. 또 잘못하다가는 역풍을 맞을 수도 있었다. 그렇다 보니 기업을 향해 엄격하게 경고를 보내지 않았나 짐작한다. 'MB 캠프에 돈을 보내지 마라. 우리가 주시하고 있다. 걸리면 죽는다'라는 식의 사인이 갔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후보가 확정됐는데 돈이 싹 말라버릴 수가 있을까. 대선 후반부에 가서야 자금난이 풀렸다. 당시 소장파들이 이상득 퇴진론을 대놓고 얘기 할 수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그가 자금 창구 역할을 맡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MB 캠프는 크게 돈을 쓰지 않았다. 법정비용 이외의 돈을 쓸 의도도 없었고 원래 돈을 안 쓰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대선 과정에서 직능본부, 조직본부가 가동되면서 난장판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자금 사용 행태가 과거로 돌아갔다. 앞서 언급했듯이 대선은 공중전이고 육상전은 거의 의미가 없다. 따라서 대선에서 조직 운운하는 사람은 아마추어가 아니면 브로커일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조직은 구체적인 사람들이 아니라 결국 허울 좋은 명단일 뿐이다. 그런데 조직을 한다는 사람은 어쨌든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모임을 만들고 행사를 여는 시늉을 해야 한다. 그러다 보면 돈이 들어가는데, 어디선가 조달을 해야 한다. 돈을 직접 조달하는 것이 어려우면 사람을 조달한다. 돈을 댈 스폰서를 세우는 것이다. 이런 스폰서들이 결국 나중에 문제를 일으키는 주역들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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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겨레

친박과의 갈등

대선 선대위를 만들 때 비교적 알려지지 않은 참신한 인물 7명을 공동선대위원장으로 임명한 것은 MB의 아이디어였다. 배은희 리젠바이오텍 대표, 박찬모 포항공대 총장 등이었다. 이는 당내 화합을 뭉개 가면서 MB식 정치로 가는 과정이었다. 정치적으로 볼 때 MB는 이미 박근혜 쪽에 배려할 생각이 없다는 신호를 보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캠프에서 실속 있는 자리는 이미 이상득-이재오 쪽에서 차지해버렸으니, 박근혜 입장에서는 허울뿐인 자리야 준다고 해도 싫을 수밖에 없었다. 포장만 해서 준다고 다 안배는 아니다.

게다가 이재오가 경선 후부터 무리한 일들을 벌이기 시작했다. 당 사무처에 가서 '내 방을 만들어 내라'고 했다는 기사가 터져 나와 물의를 빚더니, 박근혜를 비난하는 시리즈를 계속 언론에 토해냈다. 예를 들면 2007년 10월 29일 이재오는 언론 인터뷰를 통해 "이명박 후보를 인정하지 않고 아직도 경선 중인 걸로 착각하는 세력이 당 내에 있다. 이들을 좌시하지 않겠다"고 했다. 이재오의 이 같은 발언은 박근혜 측 인사들의 일련의 움직임에 대한 MB 측의 기류가 반영된 것으로 해석됐다. 이재오가 최고위원회의에서 "당이 이대로는 안 된다", "화합과 승복을 약속한 사람들이 대선 필승결의대회에 참석하지 않고 그 시간에 자파끼리 단합 등산을 하며 나 몰라라 하는데 지도부가 방치해서야 되겠느냐"라고 발언한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이재오가 마치 군림하듯이 다니며 이런 발언을 하니 박근혜는 더 흥분 할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 종합청사 부근 식당의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김무성이 MB 앞에서 이재오를 대놓고 비난한 적이 있다. MB는 이재오를 면전에서 엄청나게 혼을 낸 걸로 기억한다. 그나마 친박근혜 인사 가운데 끌어들인 사람이 최경환이었다. '경제살리기위원회'를 만들어서 후보인 MB를 직접 위원장으로 하고 부위원장에 최경환, 황영기를 앉혔다.


<글 싣는 순서>

연재를 시작하며 | 벌거숭이 임금님의 나라에서

1. 위기의 시절을 보내던 MB는 어떻게 서울시장이 되었나

2. 노무현 정부는 어떻게 청계천 복원에 협조하게 되었나

3. '좌파정책'인 대중교통개혁의 성공

4. MB 캠프의 태동

5. 안국포럼과 경선캠프의 실상

6. 최태민의 의붓아들 조순제 "이런 사람은 안 된다" 기자회견

7. 대선승부의 최대 걸림돌 'BBK 사건'

8. 왜 모든 정권은 비슷한 몰락 과정을 거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