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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두언 회고록] 1. 위기의 시절을 보내던 MB는 어떻게 서울시장이 되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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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정무부시장, 3선 국회의원 등을 역임한 정두언 전 의원의 회고록 [최고의 정치, 최악의 정치 - 정권은 왜 매번 실패하는가]를 연재합니다. 연재의 다른 글은 정 전 의원의 허핑턴포스트코리아 블로그 페이지에서 볼 수 있습니다.


MB의 좌절과 재기

1999년은 MB에게 일생일대의 위기가 닥친 해였다. 그 해 MB는 법정 선거 비용을 초과 사용한 혐의가 인정되어 국회의원직을 잃었다. 1996년 4월 국회에 입성한 지 3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실패를 모르고 질주했던 '샐러리맨의 신화'는 제동이 걸렸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미국 워싱턴에 있는 조지워싱턴대학으로 유학을 떠난 것은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새로운 환경에서 재충전을 해 새 출발을 모색하자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워싱턴은 한국 정치인들에게 옛 로마와 같았다. 선거에서 떨어진 정치인들은 너도 나도 미국으로 갔다. MB도 그들 가운데 한 명이었다. 남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가 조지워싱턴대에서 공부를 하는 도중에 잠시 들렀던 보스턴에서 '빅딕 프로젝트(Big-Dig Project)'를 목도하게 된 것이다. 빅딕 프로젝트는 보스턴시의 고가도로를 철거하고, 외곽과 도심을 잇는 5.6km의 지하차도를 건설하는 대형 도로공원화 사업이다. 1982년 논의가 시작돼 1991년 착공에 들어간 후 2007년 12월에야 공사가 마무리됐다. 이 프로젝트를 본 MB의 머리에 반짝 불이 켜졌던 것 같다. 서울의 고가도로들을 철거하고 콘크리트로 덮혀있는 청계천을 복원하면 어떨까 하는 아이디어가 떠오른 것이다. 훗날 서울시장 선거공약으로 등장하는 '청계천 프로젝트'는 이렇게 시작됐다.

정치인에게 있어 이슈를 선점하는 것은 결정적인 정치적 기회를 잡는 것이다. MB 이전에도 청계천을 복원하자는 얘기가 있었다. 고건 시장 시절이었다. 그러나 고건 시장은 감히 현실화할 생각을 못했다. 그러나 MB는 했다. 그것이 두 사람의 차이였다.

미국에서 귀국한 MB는 2001년 가을 한나라당에 국가혁신위원회가 만들어지면서 미래분과위원장을 맡아 정치에 복귀했다. 관료적인 발상에서 만든 국가혁신위원회는 이름은 거창했지만 사실 대통령 선거에 별 도움이 안됐다. 엄청난 인력과 자금을 동원해 국가혁신종합대책을 내놓았지만 지금 그것을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 않은가. 늘 그렇듯이 큰 선거에서의 승부는 논쟁적인 담론적 이슈 한두 개를 누가 내놓느냐에 따라 갈린다. 내 경험으로 보건대 선거에서 '종합 대책', '선거공약집'으로 승부를 거는 일만큼 멍청한 것도 없다. 청계천 프로젝트는 선거 판세를 결정지은 위닝샷(Winning shot)으로서 전형적인 담론적 이슈라고 할 수 있다. 돌이켜보면 MB는 청계천 프로젝트를 구상하는 순간 이미 서울시장이 되었고, 대통령까지 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선거에서 대형 이슈를 주도한다는 것은 판을 장악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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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6월 13일 저녁 선거개표방송을 보던 이명박 서울시장후보가 당선이 확정되자 손을 들고 기뻐하고 있다. © 한겨레

서울시장 선거에 MB와 한 조를 이루다

MB는 2002년 지방선거에서 서울시장을 노리고 있었다. 한나라당 서울시장 후보를 향한 경쟁은 2001년 하반기부터 달아올랐다. MB의 상대는 홍사덕이었다. 모두들 홍사덕이 후보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홍사덕 쪽으로 세력이 결집하는 흐름이 뚜렷했다. 당시 한나라당 서대문을 지구당위원장을 맡고 있던 나는 교통사고를 당해 강북삼성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홍사덕, MB 두 후보 모두 병원으로 나를 찾아왔다. 스타일은 좀 달랐다. 홍사덕은 인사치레 식으로 잠깐 다녀갔다. 하지만 MB는 병원 침상에 걸터앉아 1시간 동안 나와 이야기를 나눴다. 내가 MB를 개인적으로 만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정치를 하니 이런 사람과도 만나게 되는구나 생각했다. TV드라마에서 주인공으로 나온 대한민국 고도성장의 걸출한 주역과의 첫 대면이었다.

그때는 국민참여 경선이나 여론조사 같은 것을 하지 않고 정당의 대의원들만 모여서 서울시장 후보를 뽑았다. 따라서 후보가 서울 지역의 전체 지구당위원장 가운데 몇 명을 확보했느냐에 따라 승패가 결정됐다. 당시 MB를 돕는 위원장은 한 명도 없었다. 이회창 총재도 홍사덕을 밀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러나 내 경험상 누군가로부터 낙점 받아 후보로 출마한 사람은 선거에서 유리하기는커녕 오히려 불리하다. 특히 큰 선거일 때 그렇다. 유권자들은 남의 도움을 받아 크는 사람을 싫어한다. 국민들은 어려움 속에서도 자신의 힘으로 난관을 돌파해 스스로 성장한 정치인을 심정적으로 지지한다.

MB가 내게 공을 들였던 이유는 무엇일까.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우선 나는 당시 총재였던 이회창이 국무총리 시절 총리실에 근무한 '이회창파'였다. 내가 공직생활 도중에 사표를 내고 정치에 뛰어든 것은 2000년 총선 당시 이회창의 측근이었던 윤여준이 "총재가 꼭 (정두언을 출마)시키라는데"라며 내게 출마를 종용했기 때문이다. 당시만 해도 이심(李心)이 누구에게 있느냐가 후보경선에 중요한 변수라고 다들 생각할 때였다. 나는 홍사덕과 대학 동문(서울대)인데다가, 대부분이 친 홍사덕 성향이었던 한나라당 미래연대에 속해 있었다. 더구나 나는 고향도 호남이어서 영남 출신으로 고려대를 나온 MB의 취약한 부분을 이래저래 보완해 줄 수 있다는 장점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 명석한 MB가 이런 점들을 종합해 나를 선택했을 것이다.

두 달 만에 퇴원을 하고 나오자 MB로부터 다시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그러나 나는 그 전부터 홍사덕과 이런 저런 인연이 있었다. 그 인연을 쉽게 끊고 MB 캠프에 갈 수가 없어 선거 캠프에 합류해 달라는 MB의 제안을 요리조리 피했다. 그랬더니 어느 날은 아내로부터 연락이 왔다. MB가 부부 동반으로 식사를 하자는 것이었다. 내가 피하니 아내를 통해 연락을 취한 것이었다. 더 이상 피하기가 힘들었다. 결국 부부동반으로 하얏트 호텔 중식당에서 만났다. MB는 식사를 하며 내게 넌지시 러닝메이트를 제안했다. 자신이 서울시장에 당선되면 내게 정무부시장을 맡기겠다는 것이었다.

절대불리의 예상을 뒤엎고 시장경선에서 승리

고민하던 나는 정치적 멘토였던 윤여준에게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지 물어보았다. "당연히 해야지. 손해 볼 게 뭐 있어. 밑져야 본전 아닌가. 경험도 되고." 며칠 후 MB의 캠프가 있는 동아시아연구원으로 갔다. 내가 들어가자 회의를 주재하던 MB는 "어, 정위원장 왔네!"하며 기뻐했다. 나는 MB 서울시장 캠프에 합류한 첫 번째 지구당 위원장이 된 것이다. 그 후에 두 명 정도가 더 합류했을 뿐이다.

나는 먼저 밑바닥 민심이 어떤지 보기 위해 현장을 훑었다. 바로 감이 왔다. MB가 이길 것 같았다. 위원장을 확보한 숫자로만 보면 MB는 홍사덕과 게임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밑바닥 분위기는 달랐다. 나는 자신감이 생겼다. 경선 막바지 무렵이었다. <중앙일보>에서 미리 확보한 대의원 자료를 가지고 사전 여론조사를 해 보도했는데 결과가 놀라웠다. 거의 3:7로 홍사덕이 지는 것으로 나온 것이다. 경선 분위기는 급반전됐다. 충격이 컸는지 승리를 자신하던 홍사덕 후보는 조사 결과가 보도된 다음날 말없이 잠적했다. 경선도 치르기 전에 게임이 끝난 것이다. 사람들은 정두언이 들어오자 전세를 뒤집었다며 대단하다고 칭찬했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 밑바닥 분위기는 이미 MB로 잡혀 있었는데, 모두가 그 흐름을 읽지 못했던 것이다. 나는 그저 '고위험 고수익'투자를 했을 뿐인데, 마치 승리의 주역이 되어버렸다.

한나라당 대의원들은 왜 홍사덕이 아닌 MB를 선택했을까.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만 당시만 해도 한나라당 대의원들 대부분은 공화계나 민정계였다. 소위 수십 년간 당을 지켜온 사람들이다. 이들은 홍사덕을 야당 성향인사라고 생각했다. 그들이 누구를 찍겠는가. 최병렬과 서청원이 당권을 두고 맞붙었을 때는 최병렬, 이재오와 강재섭이 경쟁했을 때는 강재섭이 이겼다. 민정계가 다 이긴 것이다. 2007년 박근혜와 MB가 대선 후보를 놓고 경선했을 때도 당원 투표에서는 공화계라 할 수 있는 박근혜가 이겼다. MB가 최종 승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당원 투표만이 아니라 여론조사와 국민 참여 경선이 도입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월의 흐름은 어쩔 수 없다. 2014년 새누리당 전당대회는 김무성 대 서청원의 대결이었다. 둘 다 민주계로서 공화계, 민정계는 어느덧 비주류 소수파로 바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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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6월 3일 MBC TV토론회에 나선 김민석(민주당), 이명박(한나라당) 서울시장 후보가 토론 시작 전 악수를 하고 있다. © 연합뉴스

MB 서울시장 당선

MB가 한나라당 서울시장 후보로 확정된 뒤 그는 한동안 사무실을 구한다는 핑계로 놀다시피 했다. MB의 상대는 김민석이었다. 그러나 이미 '청계천 복원' 공약으로 큰 판은 정리됐다. 여유가 있었다. 서울시장 같은 큰 선거는 한마디로 공중전이다. 지상전은 비교적 작은 선거에서 의미가 있다. 서울시장 선거 같이 큰 선거에서 지역 구석구석을 누빈다는 것처럼 웃기는 말도 없다. 이런 큰 선거에서 '작은 모임이라도 일일이 찾아다니며 표를 모아야 한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나, 아마추어'라고 자백하는 꼴이다. TV토론 역시 변수가 되지 못했다. 상대 후보였던 김민석은 똑똑하고 말도 잘했다. 반면 MB는 눌변에 유창하지 못한 스타일이었다. 하지만 어느 토론이건 말 잘하는 사람이 이기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이미지를 주느냐가 중요하다. '말 잘하는' 김민석은 토론에서 오히려 손해를 보았다. 신뢰감을 주지 못한 것이다. 승리의 추는 점점 MB로 기울었다.

MB는 선거 초기 내게 "선거대책본부장을 누구에게 맡겼으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이재오가 좋겠다."고 답했다. 이재오는 차기 서울시장에 뜻이 있으니 맡기면 자기 일처럼 열심히 할 것이며, 더구나 중도표를 흡수하기 위해서는 이재오 같은 재야 이미지를 가진 인물이 좋다는 것이 내가 내세운 이유였다. 내 추천이 받아들여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재오가 선거대책본부장을 맡았다. 이기는 선거, 여유 있는 선거였기에 캠프 분위기는 선거 운동 기간 내내 밝고 즐거웠다.

천신만고 끝에 따낸 정무부시장 자리

정작 선거에서 이기고 서울시 인수위원회가 가동되기 시작하면서부터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다. 후보 비서실장으로서 선거를 주관하다시피 했던 내가 인수위 구성 작업에서 배제된 것이다. 선거 날은 모처럼 아무 생각 없이 푹 쉬었다. 그러나 다음날 출근하자 사무실은 어제의 사무실이 아니었다. 사무실은 깨끗이 정리되어 있었고 내 책상도 없어졌다. 개인 물건도 사라져 한참 헤매다 찾을 수 있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진작부터 나를 시기하고 질투하던 이들이 나를 계획적으로 배제시킨 것이다. 나를 포함한 인수위원 명단도 이미 짜여 있었다. MB 당선자도 내게 일언반구 이야기가 없었다. 순식간에 왕따를 당한 나는 황당했다. 그러나 이럴 때 화를 내면 적의 의도에 말려든다. '일단 조용히 있자!'고 마음을 다잡았다.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고 회의만 참석했다. 발끈해서 반격해봐야 꼴만 우스워진다. 판을 다시 뒤집어 정리할 힘이 내게는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옛말이 그른 것이 없었다. 무책(無策)이 상책(上策)이었다. 자신에게 특별한 공격무기가 없을 경우, 때로는 꼼짝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이 상책이다. 상대방 쪽에서 저자가 무슨 공격을 해올까 하고 지레 전전긍긍하면서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기 마련이다.

실제로 일이 계속 펑크 나는 등 인수위가 잘 안돌아갔다. 하루는 MB가 내게 "회의 좀 와서 챙겨!"라며 지나가는 말 하듯이 했다. MB는 늘 이런 식으로 분명치 않게 얘기한다. 무슨 일을 시키면서 확실하게, 정식으로 얘기하지 않을 때가 많다. 일이 잘 안 될 경우를 대비한 책임 소재 때문일 것이다. 정글 같은 대기업에서 살아남은 생존법이라고나 할까. 한편, 서울시장 취임일이 다가오는데 MB는 정무부시장을 임명하지 못하고 있었다. 물밑에서 정무부시장 자리를 노리는 자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당을 휘젓고 다니며 노골적으로 운동을 했다. 이들이 내세운 논리는 '대통령 선거가 얼마 안 남았는데 정두언 같은 지구당위원장이 자기 소관 지역을 비우면 되느냐'는 것이었다. 귀가 얇기로 소문난 이회창은 내가 정무부시장으로 가는 것에 동의하지 않았다. 당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이런 저런 압력이 들어오니 이미 내게 정무부시장 자리를 약속한 MB도 흔들리고 있었다.

마침 천안연수원에서 당 행사가 있었다. MB는 그곳에서 이회창 총재와 만나게 되어 있었다. 그날 아침, MB는 내게 이 총재를 만나 정무부시장 문제에 대해 결론을 짓고 연락하겠다고 했다. 나는 십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그동안의 우여곡절이 이제 끝나는가 보다 생각하며 안심을 했다. 그날 오후 MB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MB는"올라가면 9시쯤 될 것 같으니 롯데호텔 커피숍에서 봅시다"하고 말했다. 조짐이 이상했다. 나는 '일이 잘 됐다면 이렇게 말할 리가 없는데 뭔가 잘못된 것 같다'고 생각했다.

커피를 마시는 MB의 표정은 단호해 보였다. 그는 "총재가 완강하다. 정두언은 안 된다고 한다. 그러니~"라고 말했다. 거기까지 말했을 때 내가 말을 막았다. '잠깐만요, 시장님. 그러면 제가 총재님 만나서 담판 짓겠습니다.' 어디서 그런 기지가 나왔는지 모르지만 돌이켜보면 정말 잘한 일이었다. 내가 그 자리에서 아무리 항변해봐야 이미 내려진 결정이 바뀔 리가 없다. 오히려 내가 설득당할 공산이 크다. 그러니 일단 그 자리를 모면한 것이다. 그날 집에 돌아온 나는 잠이 오지 않았다. '이런 경우가 다 있나. 모두 내가 정무부시장이 될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건 완전히 국제 망신이 아닌가.' 온갖 상념으로 밤을 꼬박 새다시피 했다.

다음날 나는 아침 일찍 종로구 옥인동에 있는 이회창 총재의 자택으로 갔다. 안으로 들어오라는 것을 사양하고 대문 앞에서 기다렸다. 식사를 마친 이회창이 나왔다. 나는 이총재의 차에 올라탔다. "제가 정무부시장으로 가면 대선에 지장이 있다는데, 아니다. 더 잘 챙길 수 있다. 내 지역구 뿐 아니라 서울시 전체까지 챙기겠다."며 간곡하게 말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이 총재의 싸늘한 반응이었다. 그는 "그런 얘기라면 할 필요가 없어요. 내리세요!"라고 화를 내며 차를 세우라고 했다. 나는 졸지에 길바닥에 내려졌다. 말로만 듣던 토사구팽을 실제로 당하니 하늘이 노랗게 보였다. 하지만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었다. 나는 곧장 택시를 집어타고 여의도에 있던 한나라당 당사로 갔다. 서청원 대표를 만나 자초지종을 얘기했다. 서대표는 "내가 잘 얘기해볼게. 내가 너 좋아하잖아"하며 특유의 제스처를 하더니 이 총재와 회의를 한다며 위층으로 올라갔다. 한참 있다가 내려온 서 대표는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했다. 아니나 다를까. 서청원은 "야, 두언아! 그냥 국회의원 하면 되잖아"라고 말했다. 잘 안됐다는 얘기였다.

그러나 여기까지 왔는데 포기할 수는 없었다. 나는 이회창 후보의 방으로 다시 갔다. 방 앞에 계속 서 있었다. 점심때가 되니 이회창이 밖으로 나왔다.

정두언 : "총재님, 허락하실 때까지 이곳에 서있겠습니다."
이회창 : "서 대표에게 다 얘기 했어요!"

이회창은 또 화를 내며 수행원들과 엘리베이터를 타고 가버렸다. 마지막 희망마저 사라졌다고 생각한 나는 온몸에 힘이 쭉 빠졌다. 다리가 후들거려 어떻게 내려왔는지도 모르게 간신히 계단을 내려왔다. 당사 앞에서 안 피우던 담배를 피우는데, 갑자기 아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때 전화가 걸려 왔다. 이회창의 전화였다.

이회창 : "그러면 열심히 할 거죠?"
정두언 : "그럼요. 총재님 저 아시잖아요."
이회창 : "알았어요. 서 대표한테 다시 얘기할게요."

극적인 반전이었다. 소위 앵벌이 작전이 성공한 것이다. 나는 MB에게 전화를 걸었다. "정두언입니다. 이 총재를 만나 정무부시장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전화기 너머 MB는 말이 없었다. "서 대표한테 곧 연락이 올 겁니다." 하자, 그제야 "아, 그래요?" 했다. 나는 이렇게 해서 서울시 정무부시장이 되었다.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그래도 나는 MB에게 고맙지 않을 수 없다. 정무부시장은 내가 선망하던 자리였다. 국회의원 선거에서 떨어진 뒤 나는 거의 반 백수나 마찬가지였다. 만약 그때 지니(램프에 사는 요정)가 나타나 '네 꿈이 뭐냐'고 묻는다면, '서울시 정무부시장을 하는 것'이라고 대답했을 것이었다. 차관급으로서 경력 관리와 함께 지역구 관리도 할 수 있으며 보수도 넉넉한, 그야말로 내 처지에 생각할 수 있는 최고의 자리가 정무부시장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정무부시장으로서 첫 출근을 한 날 서울시청 현관 앞 계단을 오르며 과연 이게 현실인가 싶었다.

두 번씩이나 나를 부인한 MB

정무부시장이 된 지 한 달 반가량 지났을 때였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한나라당은 지구당 정비에 나섰다. 내 지역구인 서대문을 지구당은 사무국장을 하던 사람이 위원장 대리를 맡고 있었다. 나중에 내가 다시 지역구로 돌아갈 것에 대비한 것이었다. 그러자 당장 한나라당에서 제동을 걸었다. 대리를 맡은 사람이 지구당위원장 역할을 하기에 너무 약하다는 것이었다. 김기배 서울시당위원장은 내게 "정무부시장에서 물러나 지역구로 돌아가라, 돌아가지 않으면 다른 사람을 위원장으로 임명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김기배를 찾아가 강력 항의했다. 나는 자신이 있었다. 지역구 관리가 탄탄했기 때문에 아무나 내 지역구에 들어올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얼마 뒤에는 김영일 사무총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그는 "시장과 다 얘기했다. 안 가면 다른 사람 보낸다"고 말했다. 내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마음대로 하세요. 내 지역에 아무나 보냈다가는 대선 앞두고 사고지구당이 될 수도 있어요. 총장님이 책임지셔야 됩니다." 결국 그는 다시 내게 전화를 해 "나도 생각해 볼 테니 너도 생각해보라"라며 한 발 물러섰다. 나는 MB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한 뒤 "김영일 총장을 설득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저 보고 그만 두라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이때도 MB는 어안이 벙벙한 듯 말이 없었다. 훗날 강승규에게 들은 얘기로는 그때 MB가 강승규에게 정두언의 후임을 물색해보라 했다고 한다. MB는 연거푸 두 차례나 나를 포기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때 정무부시장의 꿈을 현실화 시켜 준 MB에게 충정을 다하자, 그리고 훗날 그를 대통령으로 만들자고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그것이 그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고, 또 나 자신을 위한 길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글 싣는 순서>

연재를 시작하며 | 벌거숭이 임금님의 나라에서

1. 위기의 시절을 보내던 MB는 어떻게 서울시장이 되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