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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두언 회고록] 벌거숭이 임금님의 나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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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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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정무부시장, 3선 국회의원 등을 역임한 정두언 전 의원의 회고록 [최고의 정치, 최악의 정치 - 정권은 왜 매번 실패하는가] 연재를 시작합니다. 앞으로 연재될 글은 정 전 의원의 허핑턴포스트코리아 블로그 페이지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정치를 드라마 쓰듯

몇 해 전에 주요 일간지 주필과 저녁을 먹는 자리였다.

그분 말씀이 '정의원은 드라마 피디를 했어야 하는데...' 사실 오래 살고 보니 난 방송 피디가 더 적성에 맞았다고 후회하며 살던 차였다. '어찌 아셨어요' 하니, 전혀 다른 얘기였다. '아니, 무슨 정치를 드라마 쓰듯이 해요?' 그래서 그런지 언제부터인가 내겐 풍운아라는 말이 붙어 다닌다. 어쨌든 조용치 않다는 말이다. 공직생활 이십여 년을 접고 정치에 뛰어들었다. 정치 입문 후 십여 년이 참 요란했다.

낙선, 좌절과 방황, 이명박 서울시장 당선과 서울시 부시장, 국회의원, 안국포럼 주도, 이명박 경선 승리와 대통령 당선, 이명박 정부 출범 직후 이상득 불출마 55인 사건 주동. 그 후 줄곧 권력 사유화 비판과 탄압, 한나라당 쇄신파 리더, 감세 철회 및 외고 개혁 등 보수혁신 앞장, 저축은행 사건으로 투옥과 무죄 판결 등등... 팔자소관으로 돌리기에는 너무 다사다난했다.

왜 그럴까? 무엇보다 나는 고분고분하지 못하다. 2008년 초 권력 사유화 비판 파동후 의원총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내가 손해 보는 일은 참아도 사리에 안 맞는 일은 못 참습니다...' 이런 나를 언론은 매번 권력투쟁한다고 썼다. 언론이야 늘 싸움 모드로 몰고 가는 게 속성이다. 하지만 대통령과 대통령 형을 상대로 권력투쟁하는 사람이 있을까. 만약 내가 그리했다면 나야말로 정말 대단한 인간이 아닌가. 정치야 어차피 욕먹으며 하는 거라지만, 너무 많은 오해를 받으며 억울해 했다. 벌거숭이 임금님을 보고 벌거벗었다 외치는데 모두 나를 향해 조용히 하라고 손가락질 하는 것 같았다.

그러다 감옥에서 많은 걸 깨달았다. 항상 당당하고 떳떳하다고 자부하며 살았지만, 내겐 늘 경멸과 증오가 깔려 있었다. 세상에, 그게 바로 교만이었다. 신이 제일 싫어한다는. 어디 그것 뿐인가. 감옥에서의 십개월 동안 나를 괴롭힌 것은 억울함, 분노 이런 거 보다 끊임없이 되살아나는 지난 날 내가 잘못한 일들이었다. 나는 내가 이렇게 나쁜 인간이었다는 사실에 몸서리를 쳤다. 나중에는 내가 여기서 이렇게 당하고 있어도 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개국공신의 명암

'정두언, 입 닥쳐라. 너는 이명박을 대통령으로 만든 거 하나만으로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놈이다.' 내게 붙는 악플 중 가장 흔한 것이다. 내게 따라다니는 꼬리표 중의 하나가 이명박 정부의 개국 공신이라는 칭호다. 국회의원에 낙선하고 고단한 세월을 보내던 중 병상에서 이명박을 만났다. 그리고 혈혈단신 서울시장 선거에 뛰어들어 이명박의 승리를 엮어냈다. 제17대 한나라당 대통령후보 경선 때도 이명박과 처음부터 함께한 현역의원은 내가 유일했다.

나는 '좋은 정부'를 만들겠다는 꿈에 부풀어 정말 신들린 듯 일했다. 그리고 정권을 잡았다. 그러나 내 꿈은 거기서 끝났다. 처음부터 모든 게 엉망으로 돌아갔다. 이게 아닌데, 나는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정권을 만드는데 참여했으면 당연히 그 정권의 성공에 책임이 있다. 권력 주변은 정권을 잡은 게 아니라 이권을 잡은 사람들 위주로 돌아갔다. '임금님은 벌거벗었다'라고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나라도 얘기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이때부터 춥고 외로운 길을 걸었다. 정태근 남경필 김용태 등이 함께해 주어 큰 힘이 되었다. 허나 모든 일은 결과로 얘기해야 한다. 지금까지 이명박 정부가 성공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없다. 본인 이외에는. 구질구질하게 얘기할 것 없이 한 마디로 실패 한 것이다. 그럼 나도 실패한 것이다. '온갖 불이익을 감수하고 끝까지 비판의 입장을 고수했다'고 해봐야 소용없는 일이다. 그걸로 내 책임이 면해진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 역시 정권의 실패에 참회해야 할 사람임이 분명하다.

우리 정부는 왜 매번 실패하는가?

그렇다면 이명박 정부는 왜 실패했는가? 잘잘못을 따지자는 게 아니다. 그 원인과 이유를 살펴서 다시는 그런 전철을 밟지 말자는, 교훈을 얻자는 것이다. 이게 정권 실패의 책임이 있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도리라 생각했다.

그간에 있었던 일을 하나하나 되짚다 보니 자연스레 그 이전 정권과도 비교를 하게 되었다. 소위 87체제 이후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정권 모두 공통적으로 말로가 안 좋았다. 실패했다는 얘기다. 그런데 놀랍게도 모든 정권마다 실패하는 과정이 판박이처럼 비슷했다. 한두 번도 아니고 모두가 그렇다면, 이건 우연이 아니다. 뭔가 구조적인 요인이 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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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자금과 친인척

그게 뭘까. 요약한다면 이렇다. 모든 정권은 집권과정에서 모든 문제를 잉태한다. 그리하여 집권을 하고 나면 그 문제들을 출산한다. 그런데 그 집권과정이 유사하다. 따라서 산출하는 문제들도 유사하다. 집권과정에 잉태되는 문제의 핵심은 대선자금이다. 대선자금은 규모는 줄어들어왔지만, 늘 적법의 범위를 초과할 수밖에 없다. 위험하다는 얘기다. 그래서 친인척이 관리하게 된다. 대선과정에서 그 친인척 주변으로 돈과 사람이 몰리고, 그는 자연히 실세가 된다. 그리고 집권 후 견제 받지 않는 권력이 된다. 주변 인사들은 그를 호가호위하며 낙하산 인사의 원인이 되고 국정 농단의 주역들이 된다. 앞서 얘기했듯이 매 정권마다 늘상 되풀이 되는 일 아닌가. 지극히 단순화시켜 말하면, 이 모든 일은 결국 정치자금제도의 문제로 귀결된다.

왕조시대의 권력관

또 다른 구조적인 요인 중의 하나는 지도자의 권력관이다. 민주국가에서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국민은 권력을 직접 행사할 수 없기에 선거를 통해 대통령, 국회의원 등에게 권력을 위임한다. 그냥 위임하는 건 아니고 법을 통해 위임한다. 대통령은 법에 근거해 권력을 행사한다.

법치주의다. 그래서 권력은 공공재(public goods)다. 그런데 우리 지도자들은 권력을 사유물(private goods)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일단 잡으면 위임받은 게 아니라 자기 것으로 생각한다. 그 대표적인 게 인사권 행사다. 능력에 따른 적재적소의 인사보다는 인연에 따른 자기 사람 심기 인사가 횡행한다. 심지어는 장관의 인사권을 무시하고 정부 부처의 인사까지 청와대가 주무른다.

노무현 이전까지는 청와대에 인사수석비서관이라는 자리가 존재한 적이 없다. 오히려 거꾸로 간 것이다. 대통령의 권한이 법에 근거하듯이 장관의 권한도 그렇다. 따라서 대통령의 장관 인사권 침해는 엄밀히 말해 위헌이고 위법이다. '너는 내가 임명했으니 네 권한은 내 권한'이라는 식이다. 권력을 사유물로 인식하는 것은 절대왕조식의 사고다. 우리나라는 군정 종식은 이미 했으나, 아직 왕정 종식이 완전히 안 되고 있다.

지도자의 오만과 독선

대선 방정식의 전 세계적인 대세는 중간층 잡기다. 즉 대권을 얻으려면 좌는 우클릭, 우는 좌클릭해야 한다는 건 이미 상식이다. 그러기에 박근혜는 '경제민주화'를 내걸었고, 이명박도 '중도 실용'을 내걸었다. 문재인은 거꾸로 진보와의 연대를 꾀했으니 정권 심판이라는 유리한 상황에서 패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어느 정권이든 집권 후에는 중도를 떠나 좌든 우든 자기 길을 고집하다가 도중에 레임덕을 만나 무기력한 정권으로 전락하고 만다. 국정운영을 지속적인 선거전, 즉 퍼머넌트 캠페인(Permanent Campaign)으로 볼 때 당연한 귀결이다. 국가의 장래를 위해 소신 있는 국정운영을 하느라 인기에 연연하지 않고 자기 길을 갈 수도 있다. 지금 유럽의 맹주로 돌아온 독일의 재탄생에 초석을 다졌다고 평가받는 슈뢰더(Gerhard Schroder)의 경우다. 그러나 87체제 이후 우리의 지도자들은 대부분 소신보다는 개인적인 오만과 독선으로 자기 길을 가다가 몰락했다. 따라서 이 역시 정권 실패의 구조적인 요인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이명박 정부의 실패와 나의 책임

이명박 정부는 대선자금 문제에서 전임자들의 경로를 답습했다. 답습한 정도가 아니라 정권 출범 전부터 역대 최강의 실세 친인척이 등장했으니 갈 길은 명약관화했다. 나는 정권 초에 소위 '55인 반란 사건'을 주동하며 이를 저지하려 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그 이후에도 온갖 탄압 속에서도 계속적으로 형님 권력을 견제하고 비판했으나, 결국 임기 내 대통령 친형의 사법처리라는 초유의 사태를 막지 못했다. 애초에 기도했던 동반 불출마를 실행에 옮기지 못한 것은 결국 나의 용기 부족이었다. 이후에도 권력투쟁이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키며, 여권 내 갈등만 야기한 것은 결국 내가 공적인 일을 도모하면서 사사로운 경멸과 증오를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기업가 출신인 만큼 권력의 공공성에 유난히 취약했다. 권력을 마치 축재하듯이 벌어들인 사유재산으로 여긴 것 같다. 오죽하면 내부에서 조차 국정운영을 패밀리 비지니스처럼 한다는 냉소까지 나왔을까. 정권의 일등 공신이라는 찬사까지 받은 나는 권력의 사유화라는 용어를 만들면서까지 공개적인 비판을 서슴지 않았으나, 정작 내부적으로 절실하고 처절하게 대통령을 설득하려는 노력은 거의 하지 못했다. 훗날 나의 정치적인 입지를 늘 의식하고 있었다는 점은 결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명박은 서울시장 후보 시절부터 대통령 당선 때까지 '친서민 중도 실용 노선'을 일관되게 견지했다. 대선 승리의 첫째 요인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실정이라 한다면, 이 점은 두 번째 요인 정도가 된다. 그런데 이명박은 집권하자마자 종부세 폐지를 시작으로 감세정책 등 이미 사양길에 들어선 꼴통 신자유주의로 복귀해버렸다. 그 후 그는 친서민 중도실용이니 공정 사회니 동반 성장이니 구호만 내걸고 내용은 친기업 반서민 정책으로 일관했다. 2008년 외환위기의 극복을 치적으로 내세우고 있으나 중산 서민층의 희생을 담보로 한 고환율 정책의 결과일 뿐이었다. 530만 표 차이의 승리를 가능케 해준 서민대중을 우습게 여긴 오만과 독선의 산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외고개혁과 감세철회, 그리고 나아가 소득세 증세 등 이명박 정부의 노선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친서민 정책들을 주도했다. 하지만 정권과의 공조가 아니라 대중적 지지를 배경으로 한 압박을 통해 우격다짐하듯이 관철시킴으로써 이명박 정부의 친서민 이미지 고양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다. 이 역시 내 개인적인 소영웅주의 내지 업적주의라는 비난에서 결코 자유롭다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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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비대위를 기안하다

2011년 후반기에 접어들자 한나라당은 다음 해 총선을 앞두고 패배감에 휩싸여갔다. 이명박 정부의 실패에 따른 정권심판론이 대세로 자리 잡은 가운데, 전당대회 돈봉투 사건, 디도스 사건 등 잇단 악재가 터져 나왔기 때문이다. 당시 우리 소장파 의원들은 황우여 원내대표 체제를 탄생시키는 여파를 몰아 홍준표 대표체제의 사퇴와 함께 2012년 총선의 박근혜 책임론을 들고 나왔다. 즉 박근혜가 대통령을 하려면 일단 한나라당의 총선 승리에 앞장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만 해도 박근혜 역시 총선 패배에 대한 우려로 주저하고 있었다. 나를 비롯해 남경필 정태근 김성식 등이 강하게 밀어붙여 박근혜 비대위가 출범했다. 세종시 수정안의 실패를 계기로 결정적인 레임덕에 빠져든 이명박의 권력이 통째로 박근혜에게 넘어가는 순간이었다. 이명박 정권의 무력함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건이며, 한국정치사에 유례가 없는 일종의 정당 내 명예혁명이었다. 그리고 박근혜 비대위는 총선을 돌파했고, 여세를 몰아 박근혜는 대권까지 거머쥐었다. 이리하여 이명박 정부의 개국공신이었던 나는 본의 아니게 박근혜 체제를 탄생시키는 주역이 되어버렸다.

광야생활과 귀환

나는 19대 총선에서 수도권의 참패 속에서도 가까스로 살아났다. 그러나 그런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이미 다 꺼져가는 권력의 음험한 보복이었다. 저축은행사건의 수사로 덜미가 잡힌 이상득의 구속을 계기로 나에 대한 물타기, 짜맞추기 표적수사가 시작되었다. 검찰 자진 출두, 구속 영장 청구, 체포동의안 국회 부결, 이례적인 법정 구속, 10개월간의 수감 생활, 대법원의 무죄확정 까지 악몽 같은 2년 반의 시간이 흘렀다. 나는 한 순간에 모든 걸 빼앗기고, 세상의 밑바닥으로 내려갔다.

2년 반의 광야 생활은 결과적으로 나에게 축복이었다. 끝 모를 절망 속에서 몸부림치면서도 나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무죄를 받아 내겠다가 아니었다. 끊임없는 죽음의 유혹에서도 어떻게든 무너지지 말아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내가 처한 상황은 이미 내가 바꿀 수 없는 단계였다. 그렇다면 나 스스로를 바꾸는 수밖에 없었다. 처절한 사투 끝에 광야 생활이 끝나자, 나는 이미 이전의 내가 아님을 깨달았다. 고난은 내게 많은 것을 주었다. 무엇보다도 현실에 순종하며, 관용하고 인내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나는 고난을 통해 너무 얻은 게 많기에 그 세월이 전혀 억울하지 않고 오히려 고마울 뿐이다. 다만, 교만 덩어리였던 예전의 나로 다시 돌아갈까 봐 걱정이다.

나는 정치를 하며 늘 당당하고 떳떳하려 무진 애를 썼다. 그러다 보니 항상 편치를 못했다. 그렇다고 적당히 숙이고, 적당히 눈 감으며 살 수도 없다. 더 불행해지기 때문이다. 나는 앞으로도 계속 임금님은 벌거숭이라 외치며 이 사회의 잘못된 우상과 싸울 것이다. 하지만 경멸과 증오가 아니라 관용과 인내로 할 것이다. 그러면서 이 땅에 진정한 큰 바위 얼굴이 나타나기를 기다릴 것이다.


P.S. 회고록의 작성에 시사저널 편집국장을 지낸 소종섭님의 도움을 받았음을 밝혀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