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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의 '통큰 결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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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SOCIATED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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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가 백혈병 피해자 문제 처리에 대해 입장을 발표했다. 삼성전자 쪽은 피해자 보상 등을 위해 1천억원 사내 기금을 조성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동안 삼성전자 반도체 및 엘시디(LCD) 사업장에서 일하다 백혈병 등 질환을 얻어서 고통을 입은 피해자 가족들과 삼성전자 쪽이 이 문제 해결을 위해 조정위원회라는 테이블을 만들어 교섭을 진행해 왔다. 백혈병 등 피해가 개인적 사안이 아니라 '사회적 사안'이라는 전제 위에서 활동해온 조정위는 지난 7월23일 보상 및 재발방지를 위해 삼성이 1천억원을 기부하여 '공익법인'을 설립할 것, 삼성전자 등에 근무했다가 백혈병 등 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들에게 보상을 할 것, 위험 관리를 제대로 못한 것을 사과하고 재발방지 대책을 마련할 것 등의 권고안을 냈다.

그런데 삼성은 사단법인을 만들라는 안을 거부하고 가족들이 신속한 보상을 원하기 때문에 보상조치를 우선 하겠다고 말했다. 지난해 삼성전자의 권오헌 대표이사가 종업원 피해 사실을 인정하고 대책을 마련하겠다고 한 이후, 삼성 쪽이 조정위 설치에 합의하고 피해자들과 교섭에 나선 것은 매우 전향적인 태도였다. 그런데 이번 삼성의 안을 보면 지난 8년 동안의 대처 방식과 과연 얼마나 달라졌는지 의심스럽다. 그것은 '통 큰 결단'이 아니라 봉합에 가깝다.

그동안 삼성전자 등 사업장에 근무했다가 여러 질환으로 사망한 사람도 100명이 넘고, 지금 병마로 신음하고 있는 사람도 200명이 넘는다고 제보되었다. 그런데도 법적으로 재해 판정을 받은 사람은 그중 몇 명에 불과하다. 삼성은 물론 근로복지공단, 안전보건공단 등 정부 당국도 이들 몇을 제외한 대다수 사망자, 질환자들이 삼성전자에서 일한 것 때문에 이런 몹쓸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물론 직업병 원인 규명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모든 자료를 가진 삼성이 아닌 피해자들 보고 사망과 질병의 원인을 입증하라는 것은 너무나 부당한 일이다.

물론 다른 나라에서도 이런 일이 발생했을 때 기업 쪽이 순순히 인정한 경우는 많지 않다. 한국의 경우도 사망자 황유미씨 가족 등이 이 문제를 계속 물고 늘어지지 않았다면 그냥 없던 일로 묻혔을 수도 있고, 이 문제를 국내외에 고발하고 가족들을 지원했던 반올림 등 지원단체가 없었다면 이 문제가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것이다.

백혈병으로 2007년, 23살의 나이로 숨진 황유미씨의 아버지 황상기씨는 "딸이 삼성반도체에 들어가는 바람에 우리 식구는 모두 망했다. 딸은 세상을 떠났고, 아내는 우울증에 걸렸고 딸의 병 치료로 돈도 모두 날아갔다"며 "딸이 투병 중일 때 회사 과장이 찾아와서 '치료비 일부를 보상해주겠으니 산재 신청을 하지 말고 당장 사표를 쓰라'고 했다"고 주장했다. 삼성전자는 '또 하나의 가족'이 되자는 기치를 내걸었지만, 그 젊디젊은 청년들이 몹쓸 병에 걸리자 그들을 더 이상 가족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삼성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않은 정부, 언론, 전문가들이 대체로 삼성 편에 서 있기 때문에 이 문제는 제대로 공론화되지 못했다.

'세계 초일류 기업'의 신화, 반도체 생산으로 삼성이 벌어들인 수백조원 수입 중 일부는 노동자들의 생명과 안전을 위해 응당 지출해야 할 비용을 지불하지 않고서 얻은 것이다. 황유미씨 아버지가 외친 것처럼, "삼성에 노조가 있었다면", 노조가 사측이 위험 물질 사용을 못하도록 견제하거나 작업중지권을 발동하였다면 이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이번 조정위의 권고안은 재발방지 대책 마련에 많은 비중을 두고 있지만 삼성은 외부의 감시를 배제한 채, 피해자 보상으로 마무리하려 한다. 전제적 기업경영으로 종업원의 생명과 안전을 무시해온 기업이 지배구조 개선까지는 못하더라도 재발을 막기 위한 대책에는 무관심한 채, 피해자 보상으로만 마무리하려 한다면, 삼성이 '또 하나의 가족'이 되지는 못할 것이고 진정한 세계 초일류 기업으로 거듭나기도 어려울 것이다.

*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