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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상급식과 공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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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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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준표의 '무상급식' 철회는 그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우리 사회에서 복지, 교육 문제에 대한 관심을 다시 불러왔다. "공짜 좋아하면 안 된다"고 한 도의원의 발언 역시 한국의 대중 차원의 '복지 인식'의 현주소를 보여준다. 사실 무상급식이라는 말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세상에 무상은 없는 것이고, 누군가는 돈을 내야 하는 법이기 때문이다. 즉 무상급식 논란은 누가 밥값을 낼 것인지의 문제이고, 더 나아가 왜 교육 공공성을 확대해야 하는가의 문제다.

홍준표나 도의원이 특별히 비뚤어진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은 아니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이 가난한 상태에 있었던 5, 60년대에 가족의 힘으로 모든 것을 해결해온 경험을 가진 한국인들은 보통 내 밥을 내 돈 주고 사먹어야 하고, 내 교육비는 부모가 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의무교육 한다고 하면서 "왜 학생 교통비는 지원해 주지 않는가"라는 질문이나, 왜 독일이나 프랑스에서는 대학교육까지 '무상'으로 시켜주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더 난감해할 것이다. 교육비를 개인이나 가족이 부담해야 한다는 신조를 갖고 있으면 고등교육까지 세금으로 충당하는 유럽 국가가 모두 사회주의로 보일 것이다.

그래서 한국의 노인들이 "옛날 생각해 보면 이 정도의 복지도 충분하거나 오히려 과도하다"고 하면서 야당을 비판하고 대통령의 어려움에 대해 걱정(?)하는 것을 보는 일도 이상하지 않다. 즉 "내 능력, 부모의 능력으로 '공부 잘해서' '좋은 대학' 가서 출세했고, 돈 많이 벌었으니 그것에 대해 시비 걸지 말라"는 것은 한국의 부자나 엘리트들만이 아니라, 그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도 갖고 있는 생각이다. 한국 엘리트들의 이기주의와 공공심 부재는 여기서 온다. 국가 지원이 거의 없고, 사회가 거의 붕괴된 상태에서 자수성가했거나, 또 실패한 사람들에게 '사회책임', '증세', 그리고 '교육 공공성' 논리를 설득하기는 매우 어렵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교육의 공공성 문제와 그것을 위한 '증세', 복지 문제를 근본에서 다시 논의해야 할 시점에 섰다. "증세 없는 복지는 허구"라는 새누리당 유승민 원내대표의 연설에 대해 야당까지 칭찬을 했지만, "왜 내가 세금을 더 내야 하는가"라는 국민들의 질문에 대해서는 아직 합의된 대답이 없고, 당장 유리지갑 월급쟁이들은 늘어난 세금에 뿔이 나 있다.

이 딜레마를 돌파하기는 매우 어렵지만, 나는 한국 사회에 만연한 '능력주의'라는 신화를 문제 삼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고 본다. "높은 산은 홀로 높을 수 없다"는 말도 있다. 고봉준령이 있어야 최고봉도 있는 법이므로, 세상 그 어느 산도 평지에 돌출할 수가 없다는 이야기다. 미국 교육제도와 사회 환경이 있었기에 빌 게이츠가 나온 것이지, 그가 혼자 뛰어나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다. 가족의 '한솥밥'만 먹은 사람은 오직 효도만 중시하겠지만, 사회의 '한솥밥'을 먹어본 사람은 자신의 성공의 과실을 개인과 가족만이 누리려 하지 않을 것이다. 중산층 소비능력이 있어야 대기업도 살고, 대학의 기초학문 토대가 있어야 과학 기술의 축적도 있는 법이다. 노동능력이 없는 노인들을 배려하는 것이 세금 낭비가 아닌 이유도 국가나 사회가 약자를 내버리지 않는다는 신뢰를 주기 때문이고, 그러한 신뢰가 있을 때 사람들은 세금을 내려 할 것이다. 국가나 사회가 개인이나 기업의 능력 발휘의 조건을 보편적으로 제공해 준다는 확신이 있으면 증세도 더욱 탄력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의 한국은 자수성가하거나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는 사회가 아니다. 이미 부모의 재력이 자식의 교육 성취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쳐서 계급이 세습된다는 보고가 넘쳐나고,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로 가족이 자녀를 돌보기가 어려워졌다. 그래서 국가나 사회가 복지에 적극 개입하지 않거나 교육 공공성 확보를 위한 지출을 늘리지 않는다면 불평등은 더욱 고착화되어 사회는 파괴될 것이고 많은 잠재력을 가진 청소년들은 버려질 것이다. 타고난 능력과 가족 경제력의 영향을 줄일 수 있어야 좋은 사회가 된다.

*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