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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인들은 마침내 타임머신을 발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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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은 음식이 맛없기로 유명하다. 하지만 그건 영국을 잘 몰라서 하는 이야기다. 영국의 전통 음식이란 건 대체 뭘 뜻하느냐에 따라서 다르다. 나로 말하자면 영국은 이탈리아의 파스타에 비견할 만큼 맛있는 전통요리를 갖고 있는 나라라고 생각한다. 심지어 많은 영국인들이 이 요리를 할 줄 안다. 그걸 알게 된 건 영국에 잠시 살던 시절 친구가 해 준 요리 덕분이었다.

친구는 "영국에서 가장 맛있는 전통요리를 만들 테니까 기대해"라고 말했다. 불안했다. 영국에서 가장 맛있는 전통요리라는 건 일단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특히 나는 고기를 잔뜩 넣은 영국식 파이(특히 셰필드 파이 같은 것들)가 별로였다. 스코틀랜드 음식 해기스는 좋아했지만, 친구는 스코틀랜드인이 아니었다.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친구 집 문을 여는 순간 익숙한 냄새가 진동했다. 친구가 웃었다. "대영제국의 가장 위대한 전통음식. 카레다!"

그렇다. 카레는 영국의 전통 요리다. 제국주의 시절 식민지 인도의 피와 땀을 돈으로 환산해오면서 함께 훔쳐온 것 따위가 어떻게 전통요리냐고 말하지는 말자. 한 나라의 전통이란 건 한 핏줄을 가진 단일민족이 자기들끼리만 모여서 뚝딱뚝딱 만들어낸 건 절대 아니다. 중국과 일본의 영향 없이 지금의 한국 요리가 있었을 리는 없다. 카레도 마찬가지다. 인도의 향신료를 들여온 영국인들은 카레를 완벽하게 자신들의 전통요리로 재창조했다. 내가 좋아하는 치킨 티카 마살라는 심지어 인도에는 존재하지도 않는다.

불행하게도, 내가 알던 영국은 더 이상 없다. 결국 영국인들은 브렉시트를 선택했다. 75%의 젊은 세대가 EU 잔류를 지지했다. 하지만 장년층은 젊은 세대가 원하지 않는 미래에 표를 던졌다. 영국은 지금 총체적인 공황 상태에 빠져든 것처럼 보인다. 데이비드 카메론은 사임했다. 제러미 코빈은 흔들린다. 심지어 브렉시트를 주동했던 보리스 존슨과 독립당의 나이젤 파라지는 사임했다. 파라지가 "내 인생을 되찾으려 사임한다"던 순간은 이 모든 브렉시트 아노미 상태의 어떤 절정이었을 것이다.

영국인의 절반 이상이 브렉시트에 표를 던진 이유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나름대로의 해석을 내놓았다. 나이 든 세대의 선택에는 어쩌면 대영제국의 과거에 대한 향수가 진득하게 포함되어 있다고 해석해도 좋을 것이다. 허프포스트 미국판의 정치편집인인 하워드 파인만은 이것이 "다문화적이고 글로벌한 정체성을 향해 가고 있는 인류 역사의 흐름을 거스르는 것"이라며 "앵글로-아메리칸 백인들에게 남아있는 부족적 믿음에서 나온 저항의 외침"이라고 썼다. 미국으로서는 브렉시트가 더욱 의미심장하게 느껴질 게 틀림없다. 외국인을 혐오하고 국경에 거대한 장벽을 쌓아야 한다고 말하는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볼 수 없는 탓이다. 말하자면 이건 거의 '카레고 뭐고 필요 없고 평생 고기파이만 먹어도 좋다'고 외치는 영국 시골 아재의 고집이 무슨 원기옥이 모이듯 터져나온 결과다.

그렇다면 한국에는? 엔화가 올라서 일본 구매대행이 힘들어진 것? 나에게 브렉시트는 머릿속으로 그리던 어떤 미래의 타임라인 하나가 통째로 무너져내리기 시작한 징후에 가깝다. 그렇다. 나는 순진하고 순결하게도 미래의 동아시아 연합 비슷한 것을 머릿속으로 꿈꿔온 소수의 사람들 중 하나다. 지난 2015년 남아시아국가연합인 아세안은 아세안 공동체로 새 출발을 했다. 인구가 세계 3위인 연합체다. 정말로 아세안 공동체가 연합으로서의 힘을 발휘하려면 EU처럼 단일통화를 만들어야만 할 것이다. 하지만 아세안에게 있어서 추구하고 싶은 모델은 언제나 EU였다. 그들은 모범이었다.

한국과 중국과 일본의 연합체라는 건 정말 망상인가? 이 세 나라는 심지어 아세안이나 유럽연합보다도 더 정치, 문화적으로 많은 공통점을 공유한다. 지난 20여 년을 거치며 경제적 균형도 어느 정도는 이루어진 상태다. 지난 역사가 앞을 가로막고 있다고? 반세기 전 유럽연합이 창설된 시절에는 그런 게 없었던 것 같은가? 영국과 프랑스, 혹은 독일과 프랑스가 전후 어떤 관계였는지 기억해보시라. 나에게 브렉시트의 가장 커다란 문제는 지구에서 가장 합리적으로 비슷한 가치를 공유하는 국가들이 만들고 이끌어 온 이상적 공동체조차도 일순간에 무너져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는 데 있다. 오래된 역사적 앙금에도 불구하고 언젠가는 한중일 연합체 같은 것을 만들 수 있으리라는 기대 역시 멈춰섰다. 영국인들은 자신들의 손으로 지구의 시계를 43년 뒤로 감았다. H.G 웰즈의 나라는 결국 타임머신을 발명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