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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를 꼽긴 어렵지만 최악을 꼽는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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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2017년 최고의 영화를 뽑는 시즌이 왔다. 대부분 비슷비슷한 영화들이 겹치지만 늘 튀는 사람들이 있다. 예를 들어 프랑스 영화 잡지 ''카이에 뒤 시네마'는 다른 평론가들이 입을 모아 악평한 영화를 최고의 영화 리스트에 포함시키는 습관이 있는데, 올해는 리안의 '빌리 린스 롱 하프타임 워크'(Billy Lynn's Long Halftime Walk)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하지만 이보다 더 뜻밖의 리스트는 '타임'의 평론가 스테퍼니 자카렉의 것으로, 이스탄불의 고양이들을 다룬 터키 다큐멘터리인 '고양이 케디'가 포함돼 있다. 하긴 그 영화를 보는 70여분이 몽글몽글 행복하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거짓말이다. 자카렉처럼 올해 최고의 영화 경험 중 하나였다고 솔직하게 고백할 깡이 부족했을 뿐이지.

'이런 식의 리스트가 어떤 의미가 있나'라는 질문을 하지 않고 연말을 넘긴 적이 없는 것 같다. 수사적 질문이 아니라 진짜로 진지하게 묻는 것이다. 좋은 영화와 좋아하는 영화는 또 다르고, 길게 이야기하고 싶은 영화가 그렇게 좋은 영화가 아닌 경우도 흔하다. 올해도 마찬가지. 난 '원더우먼'과 '박열'에 대해 호감을 품고 있고 이들에 대해 아주 길게 이야기할 수 있지만 그들을 리스트에 올리지는 않을 것이다. 특히 '박열'은 제목부터 잘못 지은 영화라고 생각한다.

훌륭한 영화들이 당시의 영화계를 대표하는 때가 종종 있었다. '역마차', '오즈의 마법사',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동시에 나온 미국의 1939년이 그렇다. '살인의 추억', '올드보이', '장화, 홍련', '지구를 지켜라', '스캔들: 조선남녀상열지사'가 나왔던 한국의 2003년도 그런 때였다. 하지만 좋은 영화가 시대를 대표하는 때는 그렇게 자주 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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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은 여러모로 한국 영화에 끔찍한 해였다. 물론 좋은 영화들은 꾸준히 나왔고 그중에서도 내가 좋아하는 작품들이 있었지만 그들이 올해의 한국 영화를 대표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난 올해의 한국 영화로 '꿈의 제인'과 '땐뽀걸즈'를 뽑았는데, 이들은 모두 훌륭한 작품이지만 올해의 영화가 되기엔 많은 이슈를 만들지도 못했고 본 사람들도 얼마 없다. 무엇보다 이들은 2017년을 지배하는 한국 영화계의 일관된 흐름과 아무 상관 없이 만들어졌다.

올해 최고 한국 영화를 뽑는 대신 그냥 올해의 한국 영화를 뽑는다면? 나 같으면 두 편을 뽑겠다. 이사랑의 '리얼'과 박훈정의 '브이아이피'다. 종류는 다르지만 두 영화 모두 민망할 정도로 끔찍한 영화이며 지금 충무로의 영화쟁이들이 무슨 영화를 의도적으로 만들고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의미 있는 여성 캐릭터를 철저하게 배제한 폭력적인 남성 주도 영화와, 여성 팬들이 먹여 살린 것이나 다름없지만 자신이 상남자임을 증명하기 위해 여성혐오를 선택한 한류 남성 스타들. 특히 아직도 꼬리를 물고 나오는 후자들은 지금까지 어떻게 참고 있었는지 모를 일이다.

두 영화의 비교가 지나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대재앙이었던 '리얼'과 그럭저럭 외양은 갖춘 '브이아이피'를 일대일로 비교하는 건 무리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제작 과정 자체가 코미디였던 '리얼'과는 달리 그래도 멀쩡한 제작 과정을 통해 만들어졌다고 자부했던 '브이아이피' 쪽이 더 문제가 심각했던 게 아닐까?

* 이 글은 한겨레 신문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