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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폭세계로 가야만 '여성누아르' 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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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부터인가 여성 캐스팅의 누아르 영화에 대한 기대와 요구를 담은 글들이 에스엔에스(SNS) 여기저기에 올라왔다. 이 글들은 한군데에 모여 기사화되기도 했는데 읽으면서 거의 모든 부분에 시비를 걸고 싶어졌다.

일단 우린 작년에 아주 걸출한 여성 중심 필름 누아르를 하나 얻었다. 이경미의 '비밀은 없다'가 그 작품이다. 이 작품은 개성적이지만 그만큼이나 필름 누아르의 원형에 가깝기 때문에 여기에 대해서는 아무도 시비를 걸기 어렵다. 그런데도 '여성 중심 누아르'를 외치는 사람들은 이 영화를 까맣게 잊고 있는 것 같다. 그건 그들이 말하는 '누아르'가 사실은 '조폭영화'의 다른 이름이기 때문이다. '필름 누아르'가 프랑스를 거치고 홍콩을 거치고 한국으로 넘어오면서 '누아르 영화'가 되는 동안 어떻게 의미가 변형되었는지 설명하지는 않겠다. 흔히 있는 일이다.

여성 중심 조폭 영화, 그러니까 여성판 '신세계'에 대한 기대는 좀 어이가 없다. 물론 모든 장르 영화는 어느 정도 허구의 세계를 다룬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소한 현실과 접점이 닿아 있는 부분은 있어야 한다. 한국 조폭 세계는 언제나 남자들의 폭력과 사고방식에 의해 지배되는 곳이었고 지금도 그렇다. 이 세계에서 여혐을 빼면 솔직히 남는 게 없다. 이 폭력적인 세계에서 자신만의 이야기를 쟁취하려 노력하는 여자들에 대한 영화는 얼마든지 상상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대신 배우들만 여자로 바꾼 '신세계'를 계획한다면 그 결과는 허망할 뿐이다. 그건 망상 속에 잠시 존재하다 사라질 수밖에 없는 가면무도회다.

왜들 이런 이야기들을 여자들이 쟁취해야 할 '보편적인' 무언가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남자들이 차지하고 있는 이야기의 영역 상당수는 그냥 '보편'이 아니다. 여자들에게 문을 닫고 있는 보편적이어야 할 영역과 지나치게 부푼 남자들의 놀이터는 구분해야 한다.

이런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내가 어리둥절해하는 이유는 이미 그렇게 영화를 만들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주는 영화가 한 편 나왔기 때문이다. 한준희의 '차이나타운'이 바로 그 작품이다. 물론 '차이나타운'이라고 모든 등장인물을 다 여자로 바꾸지는 못했다. 하지만 아무런 디테일 수정 없이 핵심인물 둘을 여자로 만들면서 기존 한국 조폭 영화에 대한 아주 유용한 미러링의 기능을 수행하게 되었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이 고지식한 영화는 한국 조폭 영화 장르의 괴상한 남성성을 비판하기 위해 온몸을 희생한 작품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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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나타운'의 주연이었던 김혜수가 얼마 전에 새 조폭 영화 '미옥'을 들고나왔다. 좋은 영화는 아니며 여성 주도 영화로서도 실망감이 컸다. 전형적인 남성 주도 조폭 영화를 만들면서 김혜수를 알리바이로 삼고 있는 것 같아 더욱 그랬다.

더 슬픈 건 이 영화의 재료가 그렇게까지 나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소수의 여자들이 이 여성혐오적인 남자들의 세계에서 관계를 맺고 생존하려고 버티면서 만들어낼 수 있는 드라마의 가능성이 있었다. 슬프게도 그 가능성은 완성된 영화 속에서 익숙한 몰카이미지, 욕설, 폭력 그리고 진부한 모성 타령 속에 묻혀버렸다. 당연히 이 영화를 만든 사람들에게 내가 본 가능성의 우선순위는 그렇게 높지 않았을 것이다. 폼나는 재료가 아니기 때문에. 하지만 그놈의 폼이 뭐 그리 대단한가.

* 이 글은 한겨레 신문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