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허핑턴포스트 블로거의 분석과 의견이 담긴 생생한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듀나 Headshot

SF·판타지에 여성이 등장할 때마다

게시됨: 업데이트됨:
인쇄

13번째 닥터는 여자다. 물론 여기서 나는 비비시(BBC) 드라마 〈닥터 후〉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이는 아주 놀라운 일은 아니다. 피터 카팔디의 12번째 닥터의 뒤를 이를 새 배우가 여자일지도 모른다는 소문은 꽤 오래 전부터 떠돌았다. 소문 이전에는 요구가 있었다. 내 주변의 많은 사람은 틸다 스윈턴을 밀기도 했다. 그 역을 맡기엔 너무 바쁜 사람 같긴 했지만 그래도 꿈을 꿀 수는 있는 게 아닌가. 하여간 새 닥터 역은 조디 휘터커에게 돌아갔다. 잘 모르는 사람이지만 좋은 배우일 것이라고 믿는다.

닥터가 여자가 되는 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반세기가 넘는 세월 동안 이 심장 두 개 있는 인간형 외계인은 꾸준히 몸과 성격을 바꾸어가며 변신해왔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이성애자 백인 남자로만 변신해왔다는 것 자체가 이상하다. 여자 닥터는 오히려 너무 늦은 구석이 있다.

2017-07-19-1500442106-83974-00502535_20170717.JPG

〈고스트버스터즈〉 © 유니버설픽처스코리아

2017-07-19-1500442226-360726-00502532_20170717.JPG

〈로그원: 스타워즈 스토리〉 ©월트디즈니코리아

2017-07-19-1500442289-8241590-00502533_20170717.JPG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 ©워너브라더스코리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스엔에스(SNS)는 분노한 남성 시청자들의 항의로 가득하다. 다시는 안 보겠다. 정치적 공정성 때문에 캐릭터와 스토리를 망쳤다. 기타 등등, 기타 등등. 익숙한 광경이다. 이들이 자기만의 성이라고 생각하는 에스에프(SF)·판타지 세계에 여자들이 침투할 때마다 비슷한 광경이 벌어진다. 〈고스트버스터즈〉 리부트 때도 그랬고 〈스타워즈〉 속편 3부작과 〈로그원〉 때도 그랬다. 비백인 여성 장교가 주인공인 새 〈스타트렉〉 시리즈 〈디스커버리〉에 대한 반응도 비슷하다. 하긴 이 인간들은 여자 함장이 주인공인 〈스타트렉: 보이저〉도 견뎌내지 못했다. 에스에프 문학계로 넘어가면 대놓고 성차별·인종차별주의자인 새드 퍼피 일당들이 휴고상을 장악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아무리 과도기라지만 솔직히 좀 지겹다. 이렇게 들어온 여성 캐릭터들의 성과가 만만치 않다는 걸 고려해보면 더욱 그렇다. 두 〈스타워즈〉 영화는 모두 훌륭했고 여성 비중이 커진 네 번째 〈매드맥스〉 영화는 걸작이었다. 핑계들도 낡아간다. 예를 들어 "너희들이 내 추억을 망쳤어!"라고 우기는 〈고스트버스터즈〉 팬들에겐 제발 오래전에 낡아 버린 80년대 코미디에만 집착하지 말고 자기 인생을 좀 살라고 충고할 수밖에 없다.

그냥 장르 세계에 들어온 새로운 경향을 환영하며 즐기는 편이 더 생산적일 것이다. 지금까지 끝도 없이 맨스플레인을 당하며 장르 주변으로 밀려나길 강요당했던 여성 장르 팬들에게 지금은 아주 멋진 시기이다. 완벽한 성비의 균형에 도달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를 향해 열린 길이 보이기 때문에 그렇다. 발전의 과정은 그 결과물보다 더 즐겁다. 〈원더우먼〉의 성공으로 여성 슈퍼 히어로에 대한 걱정도 줄었다. 새드 퍼피가 무슨 난리를 쳐도 작년 휴고상은 여성 작가들이 싹쓸이했고 앞으로도 이런 경향은 계속될 것이다. 한 번 열린 문은 그렇게 쉽게 닫히지 않고, 일단 시장과 시스템의 분위기를 바꾸는 여성 팬들이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유감스럽게도 이 즐거움의 약발은 순식간에 닳아버린다. 나라 밖의 변화를 즐기다 보니 내가 '알탕 영화'들을 무한 생산하는 한국이라는 나라에 살고 있다는 것을, 제대로 된 여성 캐릭터가 너무 적어서 그냥 무난한 명예 남성 역으로 나와 비중을 챙겨도 다들 눈물을 흘리며 감지덕지하며 고마워하는 상황이라는 걸 잊고 있었다. 도대체 언제나 되어야 이 어이없는 시차가 극복될 수 있을까?

*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