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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백인 여성을 좋아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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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ite women

난 백인 여성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 말을 할 때마다 백인 여성들은 내가 테일러 스위프트를 참수하기라도 한 것처럼 쳐다본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그들의 반응을 보려고 이런 말을 하는 것이기도 하다.

내가 백인 여성을 좋아하지 않는 이유는 백인이라는 정체성의 구성체, 그것이 대표하는 것을 딱히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에 대한 압제에 연루되어 있고 거기서 이득을 얻는 사람들을 내가 인정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내가 백인 여성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할 때, 특정 백인 여성을 가리켜 말하는 것은 아니다(어쩌면 테일러 스위프트는 예외일 수도 있겠다). 이는 백인 여성이 내 존재 자체에 실제로 위협을 가하며, 내가 그 위협을 두 팔 벌려 환영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선언이다. 내 애정을 얻으려면 그럴 만한 자격이 있어야 한다. 물론 다른 몇 집단들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지만, 왠지 백인 여성들이 이걸 가장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이런 말에 당황하지 않는 백인 여성을 만나면 우리는 곧바로 친구가 된다. 그런 백인 여성들이 내가 좋아하는 백인 여성이다.

당당한 흑인, 퀴어, 현금 동원력이 부족한(cash poor) 여성인 나는 내가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내 경험에 대한 것뿐임을 받아들인다. 나는 누구나 자신의 경험에 대해서만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지할 가치가 있는 것이 우리의 경험뿐이라는 뜻은 아니다. 흔히들 말하는 "침묵은 폭력이다!"라는 말과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도 모르는 사람들을 지지하고 있다는 걸 깨닫는 것 사이에는 공간이 있다. 그 공간을 탐색하는 것은 어렵지만, 보편적 해방을 위해서는 필수적인 일이다. 너무나 많은 백인 여성들이 계속해서 이 공간을 피해 간다는 사실 때문에 나 같은 흑인 여성들은 그들이 우리의 해방에 별 관심이 없다는 인상을 받는다. 나는 그들이 한 번이라도 내가 틀렸다는 걸 증명해 주었으면 좋겠다.

나는 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내 정체성을 정의하는데 사용하는 학술적 전문 용어를 미처 모르고 있을 때가 가끔 있다. 왜 내가 타인들이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방식대로 내 자신을 분류해야 하는지 앞으로도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왜 내가 '노동 계급 working class'가 아닌 '현금 동원력 부족'이라는 말을 쓰느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나는 노동 계급이라는 말은 부적절하다고 생각한다. 노동은 공유하는 사회 경제적 지위를 가리키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밀입국 성노동자와 자신의 Etsy 온라인 스토어를 띄우려 하는 백인 주부는 별로 공통점이 없다. 둘 다 노동 계급이라고 지칭하는 것은 특권을 가진 사람들의 마음을 상당히 편하게 해주는 일이다. 그렇지만 뉴스를 보면 정치인들은 노동 계급에 충성을 바친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노동 계급을 위해 싸운다며 시위를 한다. 노동 계급과 같은 용어는 압제의 상호교차성(intersectionality)을 지우고 그 자리에 가상의 공유된 경험을 집어넣는다. '페미니즘', 심지어 '여성'과 같은 단어도 마찬가지다. 우리를 궁극적으로 통합시켜 줄 것은 (실재하든 상상 속에만 있든) 공유한 경험이 아닌, 우리의 차이에 대한 인식이다.

우리 좌파와 진보주의자들은 우리가 상호교차적 통합체라고 생각하고 싶어한다. 킴벌 크렌쇼는 사회적 정체성이 여러 겹으로 공존한다는 것을 알리기 위하여 80년대 말에 도입한 '상호교차성'이라는 용어를 만들었다. 현재 상호교차성은 통합적이지 않은 사회적 목표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아무나 끌어다 쓰는 말이 되었다. 나는 지난 달의 여성 행진에서 그 예를 직접 목격했다.

유색 인종 여성과 트랜스 여성들은 여성 행진을 보며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 행진의 공식 공약에서는 상호교차성을 2번 언급했지만, 행진의 경험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상징성과 잠재력에도 불구하고, 여성 행진은 오직 석고 같은 피부와 핑크색 보x만을 위한 성지나 다름없었다. 나와 같은 인종의 친구들은 트랜스 여성들이 배제되었다는 이유로 농담으로 여성 행진 참가자들을 '인조 잔디(astroTERF)의 바다'라고 불렀다. [주: 미 공화당과 민주당은 자신의 정책에 반대하는 시위자들을 진짜 풀뿌리 운동이 아닌 '인조 잔디'라며 astroturf라고 불렀다. 글쓴이는 잔디turf를 페미니즘 운동에 트랜스 여성은 포함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급진적 페미니스트를 가리키는 terf로 바꿔 쓴 것이다.] 나는 유색 인종이나 이민자 여성, 블랙 라이브스 매터 팻말을 든 여성을 보면 기억해 두려 했지만, 거의 보지 못했다.

나는 페미니스트를 자칭하는 사람들이 우리 중 가장 소외된 사람들에게 가하는 폭력과 피해를 금세 생각하게 되었다. 퀴어인 내가 흑인 퀴어들이 많지 않은 곳에 가 있다는 사실 만으로 내가 흑인 퀴어들을 위해 충분한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때들을 떠올렸다.

나는 트랜스 여성, 장애 여성, 불법 이민자들을 지우는데 내가 동참했던 방식들을 생각해 보았다. 트랜스 여성이 연대에 대한 내 생각과 크게 다른 페이스북 상태를 올려서 기분이 나빴을 때, "당신을 위한 운동을 하려 하는 나 같은 사람들을 당신이 반기지 않는데, 내가 왜 당신 편에 서서 싸워야 하지?"라고 실제로 말했던 때들을 떠올렸다.

그때마다 나는 잘못 생각한 것이었다. 내게 부족했던 통찰을 알려준 자애로운 사람들 옆에서 귀를 기울이고 배우면서 그걸 깨달았다. 나는 이로 인해 더 나은 페미니스트가 되었을 뿐 아니라 더 나은 인간이 되었다고 믿는다. 나는 아직 상호교차성의 천국에 닿지는 못했지만 아는 것들은 좀 있다. 그리고 내 자신의 통찰을 공유하기 위해, 해방을 위한 작업에 참가할 때 내가 고려하는 3가지를 설명하겠다.

성장한다는 마음가짐 유지. 나는 내가 모르는 것들이 있다는 사실을 늘 기억하려 애쓴다. 그리고 내가 지금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 중 잘못된 것들도 있을 것이다. 앞으로 내가 그게 어떤 것들인지를 깨닫고, 자기 결정을 향한 길로 계속 나아가길 바란다. 하지만 우리는 닫힌 마음으로는 결코 정신적, 감정적, 영적으로 성장할 수 없다. 나는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있을 거라는 생각으로 늘 다른 사람들의 말과 경험에 귀를 기울이려 한다. 그래야 우리는 특권, 그리고 타인에 대한 압제에서 우리가 하는 역할에 대해 배울 수 있다. 그래야 상호교차성에 대해 배울 수 있다. 자신의 경험을 우리와 공유하려는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아무리 말해도 지나치지 않다. 우리는 누구의 말에 가장 귀를 기울여야 하는지 알아야 한다. 그래서 다음 항목이 따라온다.

위에서부터의 다양성. 사회에는 경험적 우선 순위의 계급이 있다. 이것은 장애가 없는 이성애자 백인 시스젠더 남성부터 시작해 쭉 내려오는 사회적 서열과 일치한다. 나는 무슨 일을 하든 저 서열을 뒤집는 것부터 시작하려고 노력한다. 저녁을 먹을 레스토랑을 고를 때도 나는 소수자가 운영하는 곳을 찾으려고 굉장히 애를 쓴다. 직접적인 행동에 참여할 때면 가장 소외된 사람들이 이끌거나 그들을 위한 행동을 찾는다.

여성 행진에 참여한 흑인 여성들 중 상당수는 마지 못해 참여했다. 계획 단계에서 막판까지 배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걸 흑인 여성들이 모른 게 아니었다. 우리의 해방이 형실이 되려면 우리는 위에서부터의 다양성을 포함해야 한다. 상징적 다양성이나 형식주의로는 안 된다.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중심에 두고 있는가? 그들이 제시하는 방향을 따르고 그들의 필요에 부응하고 있는가? 나는 당신 자신의 해방이 다른 모든 사람들의 해방에 달려 있다고 단언한다. 가장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싸우면, 당신은 동시에 스스로를 해방하는 것이다. 밀물이 들어오면 모든 배가 떠오른다. 사막의 요트 신세가 되지 말라.

사랑. 마지막으로, 내가 백인 여성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할 때도 그건 증오에서 나오는 말이 아니다. 스스로를 사랑하고 지키려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다. 당신에 대한 사랑과 존중을 갖기 위해 내가 당신을 좋아할 필요는 없다. 영향이 의도보다 더 강하다는 것에 동의한다 해도, 가슴에 사랑을 품은 사람들이 보통 가장 긍정적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사랑은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표현하는 것이 제일 좋다. 그러므로 당신의 동기가 사랑에서 오는지 공포에서 오는지 자문해 보아도 괜찮다. 증오하기란 쉽다. 나는 경찰을 증오한다. 하지만 내가 이 일을 하는 이유가 그것 때문은 아니다. 나는 아름다운 나의 사람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 일을 한다. 그들의 몸의 모든 모습, 크기, 피부 색깔, 지향을 다 사랑한다. 나는 당신을 보고 듣는다. 그리고 나는 당신을 존중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한다.

허핑턴포스트US의 Befriending Becky: On The Imperative Of Intersectional Solidarity를 번역, 편집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