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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모든 남성이 '잠재적 범죄자'라고 가르쳐준 건 남성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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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보면, 내게 이 세상 남성들이 전부 잠재적 범죄자라 가르쳐준 건 내 주변의 남성들이었다.


아빠 : 지혜야. 밤늦은 시간에는 위험하니 싸돌아다니지 말고 집에 일찍 들어와라.
과거의 나 : 네, 아빠.
지금의 나 : 아빠, 뭐가 위험한데요? 남자들은 밤늦은 시간에 여성과 마주치면 강간하려고 달려드나요?


학교 담임 : 얘들아. 치마 줄여 입지 말고. 브래지어 안 보이게 상의 안에 한 겹 더 껴입어야 한다. 그래야 너희들이 나쁜 일을 당하지 않을 수 있어.
과거의 나 : 네, 선생님.
지금의 나 : 선생님, 나쁜 일이 뭔데요? 남자들은 짧은 치마나 속옷을 보면 강간하려고 달려드나요?


구남친 : 자기야. 술 너무 많이 마시지 마. 그리고 나 없이 택시 탈 때는 무조건 나한테 전화 걸어. 내가 안 받으면 통화하는 척이라도 하고. 그리고 택시에서 절대로 자면 안 돼!
과거의 나 : 알았어 자기야 ♥
지금의 나 : 왜 그렇게까지 해야 돼? 택시 기사 아저씨들은 원래 술 취한 여성이 타서 잠들면 강간하려고 달려들어?


남자 동기 : 네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는데. 남자는 사회 생활 하다 보면 방석집이나 룸싸롱에 안 갈 수가 없어. 다 비즈니스의 연장이거든.
과거의 나 : 남자들도 참 힘들겠네.
지금의 나 : 남자들은 여자 끼고 놀지 않으면 사업 얘기를 못하는 종족이니?


남자 교수 : 남자들은 성욕 자체가 여자들보다 훨씬 강해서 말이야. 정기적으로 풀어 주게 하지 않으면 성범죄율이 비약적으로 상승할 거야. 지혜도 애인 생기면 잘 보듬어 줘야 해. 허허허.
과거의 나 : 네, 교수님. 호호호.
지금의 나 : 남자들은 머릿속에 섹스밖에 없고 자기 성욕도 통제 못하는 짐승이란 건가요? 교수님도 그러세요?


내 주변 남성들의 공통점은, 자신을 제외한 모든 남성을 전부 '잠재적 범죄자'처럼 이야기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은 내게 끊임없이 남성들을 조심하라 했고 내가 남성을 '거대한 성욕을 가진 괴물'의 모습으로 생각하도록 유도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자신들도 '잠재적 범죄자' 집단의 구성원에 포함된다는 사실을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자신은 결코 피해자가 될 리 없다는 확신이 아니고서야 남성 집단을 그토록 평안한 얼굴로 '일반화'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그러나 지난해 강남역 살인사건이 터진 뒤 남성들이 보여준 반응은 대단히 모순적이었다. 지금껏 뭇남성들을 '잠재적 범죄자' 혹은 '성욕왕'으로 묘사하던 그들이 자신들을 향한 집단적 문제 제기와 맞닥뜨리자 순식간에 태세를 전환해 '일반화'를 거부하고 나선 것이다. 사실 여성들의 문제 제기는 '모든 남성은 성범죄자'가 아닌 '모든 여성은 젠더 폭력의 잠재적 피해자'에 더 가까웠음에도 남성들은 이를 자신들을 향한 공격으로 받아들였다. 즉 남성들에게 잠재적 혐의를 씌울 권리는 오로지 남성들에게만 있다는 식이었다.

남성이 잠재적 범죄자라 불릴 수 있다면 그 이유로는 여성보다 훨씬 강력한 완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과 함께, 앞서 내 주변 남성들을 사례를 통해 말했듯 스스로를 가해자의 위치에 두는 데 거리낌이 전혀 없다는 것을 들 수 있다. 남성들이 피해자의 위치에 놓인다면 '남자는 다 그래', '여자인 네가 조심해'와 같은 말은 애초에 할 수가 없을 것이다. 자신의 처지를 긍정하고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피해자를 상상할 수 있을까? 남성들은 젠더 위계의 강자로 군림하기 위해 오랫동안 자신들을 '일반화'해 왔고 이를 여성들의 머릿속에 끊임없이 주입했다. 남성 중심의 '일반화'는 가부장제를 움직이는 중요한 동력이었다. 오직 남성에게 두려움을 품은 여성들만이 제대로 '순종'하기 마련이니까.

그러나 남성들은 요 몇 년 사이에 여성들의 집단적인 문제 제기와 맞닥뜨려야 했다. 남성들 스스로가 고안해 낸 '일반화'가 얼마나 추악한 결과들을 만들어 내는지 두 눈으로 똑똑히 봐야만 했다. 무수한 통계 자료들을 통해 젠더 폭력과 젠더사이드는 실재하고 더구나 현재진행형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여성들은 더는 남성들의 '일반화'를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여성들은 남성들이 강요하는 '일반화'를 정면으로 거부했다. 젠더 폭력과 성범죄의 원인을 모든 남성들에게 내재된 속성이 아니라 성차별을 조장하고 방치하는 가부장적 사회 구조에서 찾았다.

남성들의 반응은? 오히려 '일반화'라는 오명을 여성들에게 뒤집어 씌웠다. 자신은 쏙 빼놓은 채 나머지 남성 집단을 성범죄자 무리로 몰던 남성들이 한데 뭉치자 성범죄는 있는데 성범죄자는 어디에도 없는 기괴한 상황이 연출되었다. 남성들은 자신들에게 잠재적 혐의를 씌울 권리를 여성들에게 빼앗겼다고 느끼지 않았을까? 내가 하는 '일반화'는 괜찮지만 여성이 하는 '일반화'는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 아닐까? 사실상 여성들의 문제 제기는 '일반화'와는 거리가 멀었는데도 말이다.

그래서 나는 남성들의 분노가 발화권력을 되찾으려는 여성들을 향한 두려움과 위기 의식에서 나왔을 것이라 생각한다. 원래대로라면 인형처럼 얌전히 자기나 꾸미고 있어야 할 여성들이 갑자기 일어나서 말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남성들이 주입해 온 '일반화'가 얼마나 말도 안 되는 허상인지를 조목조목 따지고 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동안 들리지 않던 목소리들이 갑자기 사방에서 울려퍼지기 시작한 것이다. 오랜 옛날 천둥소리를 처음 듣게 된 원시 인류가 허둥거리며 돌도끼를 찾아 쥐고 하늘을 향해 휘두르던 모습도 이와 비슷했을지 모른다.

나는 예나 지금이나 남성들을 '일반화'할 생각이 없다. 그러나 그들은 가부장제 사회 속에서 성장하며 성차별적 사고 체계를 보편적으로 지니게 된 상태다. 이는 '일반화'가 아니라 '일반적'이라 불러야 하는 것이다. 지금도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만 보고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감수하라 강요하며 남성 특유의 완력으로 여성을 제압하려는 남성들은 너무나 쉽게 찾을 수 있다. 이는 명백한 사회적 문제다. 스스로를 사회적 문제 대상으로 삼고 싶지 않은 남성들은 자신들이 구축한 '일반화'된 남성의 형상이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거짓말을 한다.

여성들이 두려워 하는 건 남성의 완력과 구조적 차별이지만 남성들이 두려워하는 건 본인들이 저지른 '일반화'의 허위가 폭로되는 것이다. 남성들이 조금만 용기를 내서 "일반화하지 말라"는 요구를 자신들에게로 되돌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젠더 권력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조금만 시간을 내서 고민해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여성들이 바라는 것은 범죄의 원인을 찾고 범죄자를 줄이는 것이지 남성 집단 전체를 범죄자라 낙인 찍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그럴 가능성은 보이지 않는다. 아직까지는.


* 이 글은 필자의 페이스북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