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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무새' 불쌍한 한국 남성의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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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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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무새'라는 말이 있다. 군인과 앵무새의 합성어인 군무새는 자신이 군대에 다녀왔거나 다녀올 예정이라는 사실을 지겹도록 되풀이하며 여성에게 가해지는 성차별이 병역 의무가 없는 것에 대한 당연한 대가라 주장하는 남성들을 가리킨다. 다른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군무새들이 지긋지긋하다. 징병제는 곧 국가 폭력이라는 간단한 사실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그들이 너무나도 짜증 난다. 예전에는 그런 인간들과 댓글로 투닥투닥 다투기도 했지만 언제부터인지 아예 말을 섞지 않는 것이 상책이라는 생각에 일부러 피해 다녔다.


군대를 무엇 때문에 그렇게나 중요하게 생각하는 걸까?


그런데 어느 날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참 불쌍하구나. 얼마나 군대가 싫으면, 얼마나 군대가 끔찍하게 느껴지면, 얼마나 군대가 상처로 남아있으면, 군대 다녀왔다는 게 얼마나 억울하면 한국 남성들은 그토록 군대에 얽매이고 군대에 매달리는 걸까? 군대가 대체 뭐길래 인간의 이성과 지성을 마비시키는 것도 모자라 타인의 인권에 대한 감각마저 파탄 내는 걸까? 무엇이 그들을 병역 면제자에 대한 증오로 불타게 만드는 걸까? 군대를 무엇 때문에 그렇게나 중요하게 생각하는 걸까?

가부장 사회에서 성장한 남성들에게 보편적으로 '맨 박스'가있다면 분단 60여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한국에는 '아미 박스'(Army Box)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 남성들은 누구나 어릴 적부터 군대가 당연히 존재해야 하는 집단이라 배우며 자란다. 국가를 사랑해야 하고, 사랑하는 만큼 기꺼이 봉사해야 하며, 국가에 봉사하는 방법은 병역의 의무를 이행하는 것이라 주입받으며 자란다. 한국 남성들 대부분의 '아미 박스'는 이미 청소년기에 완성된다. 물리적인 힘으로 무엇인가를 사수하거나 격퇴하기 위해 존재하는 군인은 가부장 사회가 남성에게 부여하는 가장 원초적인 역할과도 닮아 있다.

일단 형성된 아미 박스는 그것에 매몰된 남성들의 이성과 지성을 고루 마비시킨다. 대부분의 한국 남성들은 병역 의무를 당연히 따라야 하는 것으로 인식한다. 특정 대상에 대한 사고의 중단이 한국 남성들 대부분에게 일제히 나타나는 현상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참으로 놀랍다.

그러나 아미 박스는 한국 남성들이 군대를 극도로 증오하는 것까지 막지는 못한다. 한국 남성들 대부분은 군대를 싫어한다. 입대를 끔찍한 것으로 여긴다. 남들에게는 '나라 지킨다'고 이야기하지만 군복무 중인 한국 남성들이 국가의 미래를 고민하고 자신이 지켜야 하는 국민과 주권을 되새기는 일은 거의 보지 못했다. 군인들이 바라는 건 딱 하나, 시간이 흘러 빨리 군대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들은 제대하고 나서 꾸게 되는 '군대 꿈'을 최악의 악몽으로 꼽으며 진저리를 칠 만큼 군대를 증오하고 혐오한다. "군대는 한 번쯤 다녀올 만한 곳이다"라고 말하는 남성들조차 재입대할 생각은 절대로 없다고 고개를 흔든다.


군대엔 두 번 다시 들어가고 싶지 않지만 군대를 비판하는 것은 견디지 못하는 기괴한 인간형이 탄생한다.


아미 박스의 강력함은 여기서 드러난다. 한국 남성들은 군대를 혐오하지만 군대에 다녀온 자신은 혐오하지 않는다. 군대를 계속해서 혐오하다 보면 자신마저 혐오하게 될 위험이 있다. 그래서 그들은 군대를 '혐오의 대상이지만 결코 거역할 수 없는 대상'으로 만들어 버린다. 군대혐오자들인 그들은 군대를 한국 사회에서 필수적인 존재 혹은 누구나 복종해야 하는 절대적인 존재로 만드는 작업에 기꺼이 동참한다. 아미 박스는 한국 남성들의 군대에 대한 혐오마저 오히려 군대를 더욱 신성한 존재로 격상시키는 제물로 활용한다. 그래서 군대엔 두 번 다시 들어가고 싶지 않지만 군대를 비판하는 것은 견디지 못하는 기괴한 인간형이 탄생한다.

한국 남성들은 미디어를 통해 성적으로 대상화되는 남성 연예인을 보면 "여성뿐 아니라 남성도 이렇게 성적 대상화를 당합니다!"라고 항의할 줄 안다. 그들은 '성적 대상화가 나쁘다는 것'과 '인류는 나쁜 쪽에서 더 좋은 쪽으로 진전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 자신들이 극도로 혐오하는 군대는 "비인간적인 곳이니 가지 맙시다!"라고 이야기하기는커녕 "가지 않으면 당신들의 권리를 주장할 자격도 없습니다!"라고 말한다.

군대의 존재 이유에 대해 변호하고 군대를 옹호하며 여성들에게 군입대를 강요하는 정성의 십분의 일조차 그들은 전쟁에 반대하거나 폭력에 맞서는 데 쓰지 않는다. 분단이라는 특수한 상황에 놓여 있는 한반도의 정세를 그들은 징병제를 합리화하는 논거로만 써먹을 뿐 분단 체제를 언젠가는 반드시 극복해야 한다고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군 미필 및 면제 남성과 징병 대상이 아닌 여성에게 한국 사회가 어떤 차별을 가하는지에 대해선 조금도 관심이 없다.

자신의 뜻대로 전역 날짜를 정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진다면 군인들 대부분은 아마 당장 '오늘' 제대하려 하지 않을까. 그들 역시 사랑하는 사람 곁에 있고 싶고 자유롭게 거리를 돌아다니고 싶고 자신이 원할 때 원하는 일을 하고 싶어하는 평범한 인간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국가 폭력의 피해자라는 사실을 인정할 용기가 없다. 군필 예비역 남성으로서 자신이 지닌 사회적 권력을 의심하지도 않는다. 그들이 군대를 옹호하고 나설 때마다 내겐 자신의 존재를 애타게 증명함으로써 자신을 혐오하지 않으려는 남성들의 안쓰러운 몸짓들이 보인다.

불쌍하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다. 어쩌면 나는 전보다 군무새들을 덜 혐오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자기혐오가 싫어 스스로 이성과 지성의 작동을 멈춰 버린 존재들. 불쌍한 한국 남성들.



* 이 글은 필자의 페이스북에 실린 글을 편집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