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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량, 로타 그리고 여성의 자기결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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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어떤 여성이 자신은 사진작가 로타의 카메라 앞에 모델로 서고 싶다며 내게 화를 낸 일이 있었다. 로타가 어느 여성 모델과 새로운 사진 작업을 했다는 뉴스 기사를 페이스북에 공유하며 내가 비판 조로 글을 썼기 때문이다. 실은 글을 애매하기 쓰긴 했다. 비판의 대상이 로타인지 모델인지 나는 명확히 밝히지 않았고, 그 여성은 모델 일을 한다고 했으니 글을 모델에 대한 비판으로 읽었다면 충분히 화를 낼 만했다. 자신의 몸이 가장 아름다운 시절을 사진에 담는 것이 왜 잘못이냐며 그 여성은 내게 따져 물었고 내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떠나 버리는 바람에 대화는 중단되었다.


로타와 작업해 보고 싶다던 여성 모델과 문재인 캠프로 들어간 치어리더 박기량 씨. 그들에겐 그들의 욕망이 있고 그들의 일에 대한 자부심 또한 있을 것이다.


유명한 치어리더 박기량 씨가 문재인 캠프에 영입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치어리더가 선거 운동이라니 대선이 장난이냐"는 사람들을 비판하며 문재인 캠프가 부디 박기량 씨를 선거 운동을 위한 치어리더로 소비하지 말기를 바라는 짤막한 글을 페이스북에 올렸다. 그러나 정작 진짜 고민은 글을 다 쓴 뒤 시작되었다. 문재인 캠프에서 박기량 씨가 치어리더로 소비된다고 한들 그게 잘못된 일일까? 치어리더로서 자부심을 지닌 채 살아 온 박기량 씨가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일로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를 돕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지 않을까?

로타와 작업해 보고 싶다던 여성 모델과 문재인 캠프로 들어간 치어리더 박기량 씨. 그들에겐 그들의 욕망이 있고 그들의 일에 대한 자부심 또한 있을 것이다. 인간의 욕망과 자부심이 세상 속에 드러나는 방식에 대해 고민하다 보니 오래 전 술자리에서 내 옆에 웅크리고 앉아 훌쩍훌쩍 울던 후배 생각이 났다. 후배는 자신은 너무나 가난하고 고통스러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며 자신은 나중에 꼭 보란 듯이 성공해서 부자가 되는 게 꿈이라고 했다. 그 꿈을 위해 무슨 일이라도 하겠다며 주먹을 쥐고 눈물을 삼키는 후배를 보며 나는 생각이 참 복잡해졌었다. "너 이 세상을 바꾸고 싶어 하지 않았니?" 나의 물음에 후배는 이렇게 대답했다. "부자가 되면 그 힘으로 세상을 위해 뭔가 좋은 일을 할 수 있을 거예요."

물론 나는 그런 말에 속지 않을 만큼 나이를 먹었다. 이 세상을 쥐락펴락하는 돈이 할 수 없는 유일한 일은 스스로를 배신하는 일에 뛰어드는 것이다. 식물의 줄기가 그늘을 피해 햇빛 쪽으로 뻗어 가듯 이윤은 이윤이 되지 않는 일을 본능적으로 피해 이윤이 모인 곳으로 간다. 돈으로 할 수 있는 '좋은 일'은 오직 돈의 질서에 복무하는 사람들만을 구원할 수 있다. 그러나 돈의 질서가 내팽개친, 돌보지 않는, 무시하는 사람들을 돈으로 구원하기 위해서는 돈의 질서 자체에 균열을 내야 하는데 그 순간 돈의 힘은 사라진다. 물론 돈으로 할 수 있는 좋은 일이 아주 없지는 않을 것이겠지만, 나는 그 후배가 설사 정말로 성공해 부자가 되었다고 해도 세상을 바꾸기는커녕 스스로를 바꾸기에 급급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돈으로 세상을 바꾸려 했던 자신이 지나치게 순진했다며 밤마다 술잔이나 기울이고 있을지도 모른다.

욕망이든 자부심이든 섣부르게 죄를 묻거나 값을 매길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가난의 고통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그 후배의 부자가 되고 싶은 꿈을 차마 비웃거나 비난하지 못했고 아마 그때로 다시 돌아간다 해도 그러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후배의 꿈을 지지한다고 말할 수 없었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욕망과 자부심 자체엔 잘못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신의 욕망과 자부심이 한국 사회라는 커다란 공간의 무수한 관계들 속에서, 무수한 위계 구조들 속에서, 무수한 계급들 사이에서, 무수한 차별과 폭력 사이에서 어디쯤 위치해 있는지를 고민하지 않는 게으름은 분명 잘못이다. 자신의 욕망과 자부심을 성찰하지 않는 나태함은 비난 받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바로 그런 사람들 때문에 지금껏 망가져 왔기 때문이다. 자신을 성찰하지 않는 욕망과 자부심은 폭주기관차처럼 이 세상 속을 질주하며 그 욕망과 자부심에 탑승하기 거부하는 이들을 깔아뭉갠다. 욕망과 자부심은 새로운 길을 내지만 그 길을 밟을 수 있는 존재들은 정해져 있다.


그 여성 모델에게도, 박기량 씨에게도 잘못은 없다.


로타는 남성 집단이 원하는 방식으로 여성의 몸을 카메라에 담는다. 자신의 몸이 가장 아름다운 시절을 사진 속에 담고 싶다고 했던 그 여성의 욕망과 자신의 몸에 대한 자부심은 그 자체로서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 그러나 로타의 앵글에 담기는 순간 그 어떤 욕망과 자부심이라도 순식간에 남성 집단의 욕망과 자부심으로 치환되어 가장 진부한 이미지로 변질된다. 로타와 함께 작업하고 싶다는 욕망, 그리고 당대가 규정하는 획일적인 아름다움의 최대치를 자신의 몸을 통해 구현할 수 있다는 자부심은 여성의 몸을 남성들의 취향과 기대 속에 꽁꽁 가둔 채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치명적으로 훼손하는 결과를 낳는다. 그 여성의 욕망과 자부심은 안타깝게도 한국 사회 속에서 딱 그 정도 위치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는 그 여성의 잘못이 아니다.

치어리더는 남성 집단이 원하는 방식의 퍼포먼스를 선보이기 위해 자신의 몸을 관리 및 통제한다. 치열한 스포츠 경기 한가운데에서 응원을 통해 관중들과 선수들의 기운을 북돋아 주고 경기를 더욱 흥겹게 만들고 싶어 하는 치어리더의 욕망과 자부심은 그 자체로서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 그러나 타이트한 민소매 웃옷과 짧은 치마를 입고 관중들 앞에 서는 순간 그 어떤 욕망과 자부심이라도 순식간에 남성 집단의 욕망과 자부심으로 치환되어 가장 진부한 이미지로 변질된다. 로타와 함께 작업하고 싶었다는 여성과 마찬가지로, 치어리더는 개인의 욕망과 자부심과 무관하게 남성 중심 사회 속에서, 남성 위주의 스포츠 경기 속에서 남성의 욕망과 자부심을 철저히 반영하는 도구로 소비된다. 박기량 씨의 욕망과 자부심은 안타깝게도 한국 사회 속에서 딱 그 정도 위치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는 박기량 씨의 잘못이 아니다.

부자가 되고 싶었던 내 후배는 잘못이 없다. 후배에게 그런 욕망을 품게 만든 어떤 커다란 힘이 분명 존재했을 것이다. 그 여성 모델에게도, 박기량 씨에게도 잘못은 없다. 무엇을 하고 싶거나 무엇이 되고 싶다는 욕망은 누구에게든 자연스러운 것이고 욕망이 실현되는 과정에서 자부심이 싹터 개인의 삶을 지탱하는 힘으로 작용하기 마련이다. 그 여성 모델과 박기량 씨에게는 남성 중심 사회가 요구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몸을 관리해 여봐란 듯이 전시하는 행위가 행복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행복은 존중받아야 한다. 그러나 자신의 행복이 이 세상 수많은 사람들의 서로 다른 욕망과 자부심 사이에서 어디쯤 위치해 있는지는 알고 있어야 한다. 자신의 행복이 누구의 행복을 밟고 서 있는지, 그리고 나의 행복이 누군가의 행복을 밟고 서 있도록 일을 꾸민 것은 과연 누구인지를 생각하지 않는 행복은 결국 강자들의 질서에 철저히 복무하며 강자들의 행복을 이루는 조건으로 전락한다.

여성들의 더 많은 자유로운 욕망과 더 많은 당당한 자부심이 세상 밖으로 드러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여성들의 욕망과 자부심이 자신의 길을 꿋꿋이 걸어가기엔 이 세상은 여성의 욕망과 자부심마저 강자들의 취향대로 편집하고 재단해 버린다. 누군가가 자진해서 편집되고 재단되기를 바란다고 해서 그 사람을 비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누군가는 말해야 한다. 개인의 욕망과 자부심이 강자들의 질서와 우연히도 꼭 들어맞는다면, 그것은 더는 개인적인 것으로 존재할 수 없다고 말이다.


* 이 글은 필자의 페이스북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