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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청구인낙을 할 때다 | 현 사태의 소송법적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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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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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송법적 용어 중에 청구인낙(請求認諾)이라는 말이 있다. 피고가 원고의 청구를 다투지 않고 인정하는 것으로, 이렇게 되면, 소송은 종료된다. 어차피 질 사건에서는 피고가 백기를 드는 것이 소송에 들이는 시간과 비용을 줄일 수 있어 최악의 상황을 면할 수 있다.

지금 거대한 재판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름 하여 최순실 게이트 사건이다. 원고는 언론과 야당, 피고는 최순실과 현 정권(대통령), 재판부는 주권자인 국민이다.

재판부인 국민이 심판해야 하는 원고의 청구취지(원고가 소송에서 구하는 목적)를 한마디로 말하면 '최순실의 국정농단 여부'이다. 이것이 인정되면 대통령은 헌법질서를 교란한 책임을 져야 한다(대통령에 대한 직접적 책임은 유보한다고 해도 대통령의 진정성 있는 사과, 관련자의 처벌, 청와대 및 내각의 인적쇄신 등이 있어야 함).

이런 소송에서 원고가 이기기 위해서는 청구취지(청구목적)를 인정할 수 있는 원인사실을 주장하고 입증해야 한다. 재판부가 이들 사실 인정여부에 따라 원고의 청구는 전부 받아들여질 수도 있고, 일부만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 즉, 원고가 국정농단을 주장한다면 그 근거가 되는 사실을 주장하고 그 증거를 대야 하는 것이다. 의혹만 제기해서는 안 된다. 의혹은 주장에 불과하고, 그것을 뒷밭침하는 증거가 나와야 하고, 그것을 재판부가 인정해야 한다.

이 사건에서 제일 중요한 청구원인사실은 최순실이 대통령 머리 위에 앉아서 사실상 권력을 마음대로 휘둘렀다는 주장(이른바 수렴첨정 주장)이다. 원래 이 주장은 게이트 초기에는 그저 정치적 주장에 불과했을지 모른다. 구중궁궐에서 일어난 일을, 피고가 부인하는 상황에서, 원고 측이 무슨 방법으로 입증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런데 예기치 않게 증거가 나왔다. jtbc가 최순실 컴퓨터 있는 파일 44개를 발견하고 만천하에 공개해 버린 것이다. 그것에 의하면 최순실은 대중에 공개되기까지 극비사항으로 관리되는 대통령 연설문을 사전에 입수해 보았다. 그와 대통령 사이가 단순히 친밀한 관계를 넘어 국정관여를 해왔다는 결정적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해 청와대는 이례적으로 침묵을 지키다가 대통령이 나서서 대국민사과를 했다. 최순실이 연설문을 미리 보고 그것에 손을 댔다는 주장에 제대로 답변하지 않고 어정쩡한 사과를 했지만(사과를 하면서도 후속조치를 말하지 않는 것을 보면 대통령이 이 사건의 중대성이 무엇인지를 아직 잘 모르는 것 같다) 적어도 보도내용을 부인하진 못했다.

jtbc는 대통령의 사과발표가 있고 나서 또 다른 후속보도를 하였다. 이번에는 최순실이 연설문 작성에만 관여한 게 아니고 주요직위의 인사 등 국정전반에 손을 댄 흔적이 관련 파일에서 발견되었다는 내용이다.

최순실의 국정농단이라 볼 수 있는 또 다른 사실인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 설립 및 운영 문제나 딸 정유라의 이대 입학 및 학사 부정 문제에 대해서는 지금껏 상당한 정도의 믿을만한 주장과 증거가 제시되었다. 그럼에도 청와대는 이제껏 단순 부정 외에는 별다른 적극적 해명을 하지 않고 있다. 이대에선 정유라 문제로 이미 총장까지 불명예 사퇴한 상황이다.

사건이 여기까지 왔다. 소송진행 상황으로 보면 8부 능선을 지난 것이다. 지금 이 상황에서 원고가 주장입증을 못했기 때문에 청구취지를 인정받지 못할 위험(이것이 입증책임의 진정한 의미임)은 없어 보인다. 설혹 약간의 입증여지가 있을지라도 그것 없이도 이제까지의 입증과 변론의 전 취지에 비추어 재판부가 원고주장을 받아들이는 것은 어렵지 않은 상황이다.

자, 어떻게 할 것인가. 소송을 계속할 것인가. 소송의 계속여부는 피고에게 달려있다. 피고가 이 소송의 원고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소송을 계속한다면, 지금까지 인정된 사실관계를 전제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고에겐 아무런 문제가 없음'을 주장하고 입증해야 한다(이걸 소송상 용어로 항변이라 한다). 과연 그럴 수 있을까. 대통령의 사과발표를 보아서는 항변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그러니 쓸데없이 소송을 지연한다면 국민도 불행하고, 대통령도 불행할 뿐이다.

이 상황에서 만일 내가 피고를 대리하는 변호사라면 당사자들에게 어떻게 조언하는 게 양심적인 대리인의 태도일까. 이렇게 조언할 수밖에 없다.

"지금 상황에선 재판을 끌어보았자 결과는 명확합니다. 판결결과가 피고 완전패소로 나오면 상황은 더 어려워집니다. 이런 경우엔 판결로 가기 보다는 원고청구를 그대로 받아들이고(소송법상 청구인낙이라 함) 원고의 선처를 구하는 게 낫습니다. 깨끗하게 인정하고 대통령으로서 책임 있는 조치를 취하시지요."

시간이 없다. 주권자는 더 이상 대통령의 헌법파괴행위를 보고만 있을 순 없다.


* 이 글은 필자의 페이스북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