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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 시절, 가루주스를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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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잡지는 1906년 6월에 창간되었다. 제호는 <가뎡잡지>, 당시엔 드문 순 한글로 편집되었다. 6·25전쟁 후 '우물가'로 상징되던 마을의 '뉴스 생산' 무대가 도시화로 해체되는 시점에서 여성지가 발행되기 시작했다. 여성들에게 새로운 뉴스 공급자가 필요해지는 시기였다. <여원>, <주부생활>, <여성중앙> 등의 잡지가 속속 창간되었고, 인기도 엄청났다. 교양과 시사, 가정생활과 가사에 대한 수요를 충족하는 건 거의 전적으로 여성지였다. 70년대 핵가족시대의 개막으로 이런 경향은 더 두드러져 발매부수가 크게 늘었고, 새로운 시대가 요구하는 '살림의 지혜'를 제공하는 선두에 여성지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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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창간한 <주부생활>.

나는 여성지로 글과 미디어를 배웠다. 우리 세대가 거의 그랬듯이, '읽을거리'가 상징하는 활자 교양을 여성지와 잡지가 메워주었다. 1970~80년대를 거치면서 연예와 가십에 대한 욕망도 여성지가 충족했다. 당시 인기가 높은 월간지는 '월 2회' 발매하는 격주간지로 변신하는 기현상이 일어났고, 20만부를 넘는 발매부수를 기록하기도 했다. 연예 시장은 성장하고 소위 '스타'가 배출됐지만 텔레비전이나 일간지가 그 이면의 욕구를 충족하는 프로그램을 공급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지금은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중견 소설가와 시인들이 당시엔 여성지 기자로 글발을 날렸다. 가십과 교양이 균형을 이루던 편집 방식을 오래 유지하면서 호흡 길고 깊이 있는 여성지의 글이 인구에 회자되기도 했다.

무엇보다 여성지는 가정과 가사를 크게 다루었다. 금기시되는 성생활 지식을 흡수하는 창구도 여성지였고, 아이들 옷을 지어 입히거나 새로 나온 취사도구에 대한 정보를 습득하는 곳도 여성지였다. 국내 자본이 성장하면서 텔레비전과 냉장고 등 대량생산 상품이 여성지를 통해 광고를 쏟아부었다. 요즘 여성지에 명품 광고를 집중적으로 집행하는 것과 비슷한 현상이었다.

부엌은 여성지의 황금시대와 겹치면서 대혁명을 맞았다. 먼저 조리도구의 변화다. 일본식 한자를 그대로 발음한 '곤로'가 연탄 화덕을 대체했다. 한여름에도 연탄을 피워야 하는 주부들의 불편을 덜어주었다. 엘지전자의 전신인 금성사도 이런 석유풍로를 판매하면서 여성지에 광고를 실어 크게 재미를 보았다. 이른바 청정에너지인 등유의 보급은 여성들의 가사노동을 일부 해소했다. 하루 종일 불을 관리하지 않아도, 그저 심지에 불을 붙이면 곧바로 취사할 수 있는 도구는 가히 혁명적이었다. 석유풍로가 소개되면서 거의 비슷한 시기에 인스턴트 라면도 판매되었다. 일본에서 1958년에 발명된 인스턴트 라면은 삼양라면이 일본 묘조사와 합작으로 국내에 도입해 우리 입맛을 사로잡았다. 라면은 이후 노동시장의 구조변화에도 한몫했다. 쌀값 하락 정책으로 농촌을 떠난 새로운 노동계급은 라면을 끓여 먹으면서 장시간의 노동시간을 견뎌낼 수 있었다. 물만 끓여서 곧바로 취사할 수 있었기 때문에 야근과 철야를 밥 먹듯이 하는 그들에게는 최적의 식품이었다. 그들의 부엌에는 곤로, 방에는 비키니옷장이 필수 품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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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80년대 여성지에 등장한 주방시설 광고.

독일에서 시작돼 미국, 일본을 거쳐 들어온 시스템 부엌이 '입식 부엌'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퍼지기 시작한 것도 여성지의 힘이 컸다. 전형적인 서양식 입식부엌을 설계한 '집장수'의 집들이 대도시 신흥주택지역을 장악했다. 이런 구조에 맞춰 시스템 부엌에 관한 광고가 여성지에 집중됐다. 슬리퍼와 세련된 앞치마 차림의 '새로운 주부'를 지면에서 강조했다. 이는 곧 응접실과 소파, 홈드레스 유행으로 변화한다. 응접실의 탄생은 냉장고 보급과 궤를 같이하면서 진행된 진정한 혁명이라 부를 만했다. 65년 금성사에서 처음 판매한 냉장고 보급이 늘면서 우리 밥상도 크게 바뀌었다. 일본에서는 이미 1955년에 '세 가지 신기(神器)'(세탁기, 텔레비전, 냉장고)라는 이름으로 팔리기 시작해, 65년에는 냉장고 보급률이 68%에 이르렀다. 냉장고가 생기면서 여성지 광고란에는 가루주스와 아이스크림 광고가 늘었다. 가루주스는 신식주택의 총아인 부엌과 응접실을 잇는 다리였다. 냉동실에서 꺼낸 얼음에 가루주스를 타서 손님을 접대하는 게 당시 유행이었다. 응접실 소파와 주부들의 '홈드레스'는 찰떡궁합이었다. 편리한 집에서 요리하며 남편 '뒷바라지, 자녀 양육에 전념하는 여성이 새로운 인간상으로 각인되면서 일종의 이데올로기가 됐다. 냉장고 보급은 빙과류 시장에도 변화를 일으켰다. '하드'를 밀어내고, 아이스크림의 인기를 불러왔다. 특히 미국식 대용량 아이스크림이 판매되면서 여성지를 공략했는데, 이는 두 가지 측면에서 의미심장하다. 먼저 냉장고의 보급으로 이제 '대용량 냉동식품'을 저장할 길이 열렸다. 그리고 이런 아이스크림을 사오는 것은 아빠의 '의무'가 되었다는 점이다. 이름조차 '투게더'나 '훼미리'였던 아이스크림은 변하는 핵가족의 행복을 의미했다.(이런 광고 사진에는 대부분 부모와 두 명의 아이가 등장했다. 연로한 1세대는 나오지 않는다)

유제품과 식육가공제품의 광고도 주목할 만하다. 축산 장려 정책으로 우유 생산이 늘면서 학교에서도 우유 급식이 이루어졌던 70년대, 다양한 유제품이 여성지 광고 지면을 장식했다. '우량아 선발대회'는 텔레비전 중계까지 따내면서 '우유의 우수성'을 알리는 데 크게 기여했다. 요즘의 시각으로는 '소아 비만'이라는 걱정을 자아낼 수 있는 장면이었다. 햄과 소시지 보급도 여성지가 주요 매개로 기능했다. 그 재료를 고르는 건 주부들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광고 카피는 '아이들 영양 간식과 도시락 반찬, 아빠의 술안주'였다. 나중에 스팸의 대활약으로 이어지면서 국민들의 식단을 바꾸어놓은 것도 여성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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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브이 중계까지 했던 '우량아 선발대회' 광고.

아이스크림과 유제품이 공략하기 이전, 여성지는 이른바 '엠에스지'(MSG. 물론 당시에는 미원이라는 상품명이 일반명사였다)의 전쟁터였다. 1960~70년대 여성지 광고의 상당량을 이들 제품이 차지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의 '아지노모토'가 신문과 여성지 광고를 집행하면서 시장에 침투할 수 있는 통로를 열었고, 이후 새로운 국내 생산자들이 그 역할을 떠맡았다. 흥미로운 건 지금은 잊힌 제품도 많았다는 점이다. '맛나니'가 그 대표 격으로 엄청난 광고를 내보내며 시장 진입을 노렸지만 사라지고 말았다. 미원과 미풍의 대결도 볼만했다. 미원이 당시 최고 여배우 김지미를 기용하자 미풍은 코미디언 구봉서로 맞불을 놓았다. 이 대결 구도는 김혜자와 고두심이라는 대표적인 '현모양처형' 캐릭터 모델의 격돌로 이어졌다. 인기 주말드라마 <전원일기>에서 고부간으로 현모양처 이미지를 구축한 두 사람은 드라마의 이미지가 광고 캐릭터로 팔릴 수 있는 길을 연 초기 모델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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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미디언 구봉서를 내세운 미풍 광고. 박찬일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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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제당의 조미료 광고 모델이던 배우 김혜자.

최근 한 시대를 풍미했던 여성지의 퇴조가 눈에 띈다. '시크'한 새로운 시대의 여성에게 이런 잡지는 매력이 떨어진다. 의식주 생활의 개선과 변화를 주도한 '클래식한' 여성지는 이제 우리 사회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며 역사로 기록되고 있다.

*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