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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반토론, 캐리돌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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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리돌 뉴스 홈페이지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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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집회 1주년을 앞두고 뜬금없이 '교통방송' 라디오에서 낮 12시40분쯤 방송하는 '백반토론'이 생각났다. '백반토론'은 성대모사의 달인 배칠수와 개그맨 전영미가 각각 엠비(MB·이명박)와 지에이치(GH·박근혜)의 목소리를 흉내내며 진행하는 정치풍자 개그 프로그램이다. 전영미가 최순실 목소리를 흉내 내 '아흐~ 클났네' 할 때,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순실의 목소리로 "그거를 자꾸 그렇게만 할 것이 아니라 이렇게 쫌 모두가 이렇게만 되다 보니까...", "아니지, 그거는 이렇게만 되니까 자꾸 그렇게 돼서... 그니까 이거를 그렇게만 몰아갈 게 아니라..." 같은 대화를 할 때 한참을 웃었던 기억들. 그런 일이 있었지....

권력의 농단으로 말도 안 되는 일들이 벌어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적폐청산에 힘을 기울여야 할 때 '백반토론'을 떠올리는 나를 두고 민주시민의 자질이 부족하다고 욕해도 할 말이 없을 것 같다. 그런데 또 민주적인 대통령을 뽑기 위해 애쓰는 이유가, 권력의 횡포에 분노하고 싸울 생각 하는 데 시간 보내는 대신, 여유를 가지고 인생을 성찰할 수 있는 시대를 만나기 위한 것 아닌가. 조금이라도 그런 면이 있다고 인정해준다면, 그 여유를 나태하지 않게 만드는 건 유머와 아이러니일 거고 그래서 '백반토론'이 떠올랐을지 모른다는 변명을 해본다.

유머는 논리적 사고에 앞서서 작동한다. 사람들은 먼저 웃고 나중에 이유를 찾을 거다. 내 경우 웃기는 이유가 잘 안 찾아지는 유머일수록 기억에 오래 남는 것 같다. '백반토론' 최근 것 몇 편을 들었다. 전보다 설명과 설득이 많아진 것 같은 느낌이 들다가 이내 빵 터졌다. 엠비가 말한다. "국군의 날 사열할 때마다 마음 한켠이 허전해. 이 자리에 정작 있어야 할 댓글부대가 없구나. 정말 든든한 나의 부대. 키보드 딱 들고 있어야 하는데...." 아마 엠비도 나중엔 기분 나빠할지 몰라도 듣는 순간엔 웃지 않을까.

밀란 쿤데라는 유머에 대해 "한 현실이 느닷없이 모호한 상태로 드러나고, 사물이 자기 본연의 명백한 의미를 잃으며, 우리 앞에 있는 사람이 그 자신이 생각하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웃는다"고 말한다. 아울러 웃을 줄 모르는 이들을 가리키는 '아젤라스트'라는 말을 소개하면서 "진지하지 않은 것과의 뿌리 깊은 부조화, 부적절한 웃음에 의해 일어난 소란에 대한 분노"를 아젤라스트의 특징으로 꼽는다.

정치적으로 예민한 사회이다 보니 아젤라스트가 많을 수밖에 없는 걸까. 백반토론의 박찬혁 작가와 배칠수, 전영미가 참여한 텔레비전 정치 개그 '캐리돌 뉴스'는 지난 3월 방영을 시작하자마자 선풍을 불러일으켰는데 두 달 만에 종영됐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타임' 표지 사진을 잘못 쓴 게 계기가 됐지만,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 같다. 말들이 좀 많았을까. '편파적이다' '감옥 간 사람들을 그렇게 풍자해서 두 번 죽이느냐'.... 지난 정권 때 낙엽 떨어지듯 사라져버린 정치 개그 프로는 다시 등장하지 않고 있다.

1970년대 초에 미국의 한 유머잡지가 아홉 명의 미국 대법관이 성행위를 하는 만화를 실었다. 누구는 가학적 성향을, 누구는 피학적 성향을 드러내고, 누구는 남들 훔쳐보기를 즐기고, 누구는 수간을 하고.... 그런데 '지혜의 아홉 기둥'이란 책에 따르면 실제 그 대법관들이 회의에서 이 잡지를 낄낄대며 돌려 읽었고, 누구는 잡지를 여러 권 사서 제자들에게 보여주고, 누구는 내가 제일 잘 나왔다며 연구원들에게 자랑했단다. 한국 사회는 유머에 더 관대해질 수 있는 여지가 충분히 크다.

* 이 글은 한겨레 신문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