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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텍스트와 현실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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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드라마 〈웨스트윙〉과 〈하우스 오브 카드〉는 둘 다 미국 대통령이 주인공이지만, 드라마에 나타난 미국의 모습이 확연히 다르다. 〈웨스트윙〉의 대통령과 참모들은 더 나은 세상을 향한 이상에 차 있고, 서로 신뢰가 넘친다. 수시로 토론해서 정확하고 정직한 언어를 찾아 연설하고 대중과 교감한다. 〈하우스...〉의 대통령은 정략과 술수에 능하다. 권력욕이 초심을 덮어버려 범죄적 음모도 서슴지 않는다. 충성과 배신을 오가는 그의 참모들은 서로 신뢰하지 않으며 명령할 뿐 토론하지 않는다. 그의 연설은 고도의 사기극에 가깝다.

〈웨스트윙〉은 클린턴 대통령 시절인 1999년에, 〈하우스...〉는 오바마 임기인 2013년에 방영을 시작했다. 그사이 부시 대통령 집권 8년이 있었다. 클린턴이 한때 풍겼던 이상적, 진보적 면모와, 부시 시절의 9·11과 전쟁 등 암울한 모습의 차이가 두 드라마에 반영된 게 아닐까 생각해봤지만 억지스럽다. 영화 텍스트와 현실 정치의 관계가 그렇게 직선적이고 단순한 건 아닐 거다.

두 드라마는 어법이 다르다. 〈하우스...〉는 갱스터 장르에 가깝다. 갱스터 영화에서 "궁극적인 갈등이 갱스터와 환경, 갱스터와 경찰 사이가 아니라 갱스터 자신 내부의 모순되는 충동에 있"듯(〈할리우드 장르의 구조〉), 이 드라마에서 갈등하는 건 주인공과 세상이 아니라 주인공 안의 여러 가지 욕망이다. 이런 구조에선 주인공이 망가져도 미국 사회는 망가지지 않고 제 모습을 유지한 채 망가진 주인공을 응징한다. 달리 보면 〈웨스트윙〉에서 선한 주인공 일행을 궁지에 몰아넣을 때의 미국 사회가, 〈하우스...〉의 그것보다 더 암울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그에 반해 한국에선 최근 10년 사이에 정치가 영화 텍스트에 선명한 영향을 끼친 듯하다. 사회물, 특히 범죄물에서 선악 구분이 선명해졌고, 기득권층 악한들은 서로 음모해 사회를 마음대로 주무를 만큼 파렴치해지고 시스템은 더없이 무력해졌다. 이런 요소는 개별 작품의 완성도와 관계없이 〈부러진 화살〉 〈내부자들〉 〈더 킹〉 등 여러 영화 텍스트의 한 부분이 됐다. 사회고발영화든 오락영화든 〈하우스...〉와 달리 인물 내부의 갈등이나 욕망보다 사회의 권선징악 실현 여부에 중점을 두고서 한국 정치 현실에 대해 직설을 했다.

용산참사, 세월호 같은 사건의 한켠에서 권력비리에 대한 검찰 수사는 편파적이거나 흐지부지되는 현실의 누적이 이런 경향을 낳았을 거다. 역지사지보다 분노와 선동이 통하는, 권력이 그렇게 만든 시대의 텍스트일 거다. 현실의 권력이 영화를 대하는 태도는 또 어땠나. 영화인들 잔뜩 들어간 블랙리스트에 더해, 〈광해〉가 마음에 안 든다고 영화사 대표 자르고, 〈다이빙벨〉 틀었다고 부산국제영화제 흔들고.... 그래도 선악 이분법과 음모론에 기댄 영화가 양산되는 게 바람직한 일일 수만은 없다. 탐구와 역지사지 없이 지성을 기대하긴 어렵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되고 구속됐으니, 시스템이 이만큼은 돌아간다는 걸 봤으니, 관객들이 한국 영화에서 바라는 것도 바뀌지 않을까." 얼마 전 한 영화인 친구가 한 말이다. 마침 최근 개봉한 〈특별시민〉은 현실 정치를 다루면서도 권선징악보다 인물에 초점을 맞췄다. 이 영화에 대해 선악 이분법이나 부패한 권력사슬 같은, '최근 한국 영화의 클리셰'가 줄어든 모습을 눈여겨보는 평들이 많았다. 하지만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이전에 기획됐고, 관객 반응도 아직은 평가하기 이르다. 한국 영화의 변화를 말하기 이전에 아직은 현실 정치를 더 봐야 할 모양이다.

*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