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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집의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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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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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넘게 안국역 근처에 살면서 청와대 앞길을 차 몰고 자주 지나다녔다. 삼청동에서 청운동으로 이어지는, 경복궁 뒷담과 청와대가 마주한 이 길을 지나려면 귀찮은 일을 겪어야 한다. 삼청동 쪽 입구에서 항상 경찰관이 차를 세우고 묻는다. "어디로 가십니까?" 내 생각에 이렇게 묻는 진짜 이유는 조금이라도 귀찮게 해서 사람들이 이 길을 덜 오게 하려는 걸 거다. 내 답은 항상 "부암동이요"이다. 실제로 부암동에 간다는 의미보다, '이 길이 어떤 길인지 알고 있습니다'라는 뜻에 가깝다. 그러니 표정이 중요하다. 짧은 대답에 약간 권태로운 표정을 지어 보이면 금방 통과다. 어쨌거나 사람을 세우고 어디 가냐고 묻는 건 짜증나는 일이다. 가끔 차의 뒤창을 내려달라고 해, 안을 들여다보기도 한다.

그래도 이 길을 다니는 이유는 두 가지다. 우선은 한적하고 편안해서다. 여기 경찰관들은 친절하다. 차량들을 향해 수신호를 보낼 때, 먼저 고개 돌려 차를 보고 그다음에 손짓을 하는 그 모습에 정중함과 우아함이 있다. 건널목에 보행신호가 들어와도 건너는 이가 없을 때가 많다. 그럴 땐 경찰관이 그냥 가라고 손짓한다. 자주 다니다 보니 난 누구의 손짓이 없어도 그냥 가고, 경찰관도 제재하지 않는다. 그런 느긋함이 대통령 사는 곳 코앞에서 일어난다는 게 기분 좋은 일 아닌가. 하긴 그 느긋함이 사람들 덜 오게끔 성가시게 해서 생긴 것일 테니, '병 주고 약 주는' 일일 거다. 다음은 경치다. 아름드리 고목들이 길가에 심어져, 4월이면 벚꽃이, 9월이면 노란 은행잎이 하늘을 가린다. 그 밑을 지날 땐 황홀하기까지 하다.

지난겨울 동안 마음이 뒤숭숭했던 것 같다. 대통령 탄핵안이 국회를 통과할까. 헌재는 인용할까. 영장은 발부됐나. 자다 일어나면 뉴스부터 보고, 그러면서 시간이 죽 가고. 내가 사는 사회가 예측되지 않을 때 불안한 건 어쩔 수 없다. 저마다 예측과 전략이 달랐던 게 서너달 전 아니었던가. 마침내 주인이 없어진 청와대 앞길은, 며칠 전 가보니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전과 다름없이 한가했다. 개나리와 목련 꽃망울이 피었고, 홍매화와 산수유 꽃을 보는 사람들의 표정은 평온했다. 대통령이 있어야 할 저 집, 청와대를 저렇게 비워놓고도 세상이 큰 탈 없이 돌아가고 있다는 게 신기하고 대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통령 없이도 평화로운 북악산 일대 북한산 자락이 늠름해 보였다.

신동엽의 시에 나오는 이상국가의 모습은 이랬다. "대통령 이름은 잘 몰라도 새 이름 꽃 이름 지휘자 이름 극작가 이름은 훤하"다는 사람들이 살고, 해질녘에 대통령이 "자전거 꽁무니에 막걸릿병을 싣고 삼십 리 시골길 시인의 집을 놀러" 간단다.(〈산문시1〉) 대통령이 잘 못 해도 시스템이 막고 버텨주니 대통령에 대해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나라. 너무 목가적인가. 헌법 절차에 따라 막 대통령을 파면까지 했으니 시스템이 조금은 더 튼튼해졌겠지만 아무래도 먼 얘기일 거다.

과제들, 문제들, 적폐들.... 대통령 잘 뽑아야 하고.... 대선 후보들 공약을 보니 대통령 관저가 옮겨갈 가능성이 적지 않아 보이는데 그러면 청와대 주변 일대를 잘 보전하기 위해 서울시장도 잘 뽑아야 할 거고.... 아직은 이 시대 시민의 정치 윤리에 대통령이 누군지 몰라도 되는, 한가하고 목가적인 풍경이 끼어들 틈이 작아 보인다. 그래도 모처럼 드물게 두 달씩이나 청와대에 주인이 비워져 있다. 빈집에 봄이 하릴없이 찾아와 조금 뒤면 벚꽃을 흐드러지게 피워 놓을 거다. 막걸리 몰래 사들고 가야지.

*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