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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언어 안의 '적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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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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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청구인을 대통령직에서 파면한다." 무능과 부패를 감추고 국민 위에 군림하는 대통령에게 법관이 파면을 명령하는 나라! 삼권분립은 책에서 본 것보다 훨씬 놀라웠다.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헌법재판소 결정문도 놀라웠다. 쉽고 분명한 건 물론이고, 무엇보다 '이런 건 잘못했지만 이런 건 잘했고' 하는 식의 '물타기'나, '이쪽이 잘못했지만 이쪽도 이런 잘못이 있고' 같은 '양비론'식 표현이 없었다. 필요한 말을 정확하게 하고 마친 글의 단호함은, 헌법과 법치 같은 추상적인 개념의 구체적인 무게를 싣고 있었다.

헌재의 결정문을 많이 봤지만 이만큼 선명한 건 드물었다. 2009년 날치기 처리된 미디어법의 위헌 여부에 대한 결정은, 통과 과정에 하자가 있지만 입법부의 영역이어서 무효를 선언할 수 없다는 묘한 것이었다. 국방부가 불온서적을 지정해 병사들이 못 읽게 한 조처에 대해 2010년에 나온 결정도 그랬다. 문제의 책들이 불온도서인지 심사 대상 밖이어서 알 수 없지만, 불온도서 지정을 위헌으로 보기 어렵다는 거였다. 결정문은 길고 복잡한 복문투성이였다.

헌재가 민주주의의 위기의식을 공유하니까 언어도 전향적으로 좋아지는구나. 이번 결정문을 들으며 느꼈던 흐뭇함은, 뒤이은 뉴스 해설 프로들을 보며 깨졌다. 여러 패널들이 '이제는 화해해야 할 때'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동안 누가 누구와 싸웠나? 범죄에 대한 수사와 처벌과, 그걸 촉구하는 평화적 시위가 있었던 것 아닌가. 태극기 극렬 집회? 그럼 그쪽을 분명히 지칭하고 자제를 촉구할 일이다. 박 전 대통령에 대한 수사나 비난은 이제 그만하자는 말? 그럼 그렇게 말하지, 왜 어떤 두 편이 다툰 것처럼 '양비론'식 어법을 들이밀까. 박 전 대통령 수사가 대선에 영향을 끼치면 안 된다는 패널도 있었는데, 수사를 하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내겐 후자처럼 들렸다.

1988년에, 내가 치른 신문사 입사시험에 나온 작문 제목이 '5공 청산과 정치보복'이었다. 노태우 정권 초기에 전두환 전 정권의 비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와 수사가 진행될 때, '이제 그만하자'며 나온 말이 '정치보복은 안 된다'는 거였다. 권력형 범죄는 재발 가능성이 상존하고 그래서 엄정하게 사법처리해야 할 텐데, 거기에 '정치보복'이라는 묘한 말이 붙었다. 그때 더 수사해서 전두환 전 대통령이 기업들한테서 돈을 뜯었던 일을 밝혔다면 노태우 전 대통령이 4천억원대의 비자금을 기업으로부터 뜯지 못하지 않았을까.

권력형 범죄에 대해, 발본색원을 두려워하는 기류가 재생산되는 것 같다. 거기엔 죄지은 자와 친지들의 방어의식도 작동할 거고, 선거 앞두고 득표를 의식해 적을 많이 만들지 않으려는 계산도 가담할 거다. 드물게, 온정주의나 평화와 관용의 마음이 작용할 수도 있다. 이유야 어떻든 헌법정신과 법치의 원칙에 어긋나는 태도다. 당당하지도 못한 것이어서 '양비론' '화해론' '정치보복 불가론' 같은 정확하지 않은 어법이 수시로 동원된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서 정작 답답하고 궁금한 건, 군사독재 시절도 아닌데 어떻게 이런 권력형 범죄가 광범위하고 지속적으로 이뤄질 수 있었냐는 거다. 정계, 재계, 관계에 적극적으로 관여하거나 소극적으로 부역한 이들이 많다는 말 아닐까. 한국 사회는 공사 구별에 약하고, 특히 상부의 불법부당한 지시에 복종한 이들에 대해 관대하다. 혹시 불법부당한 지시에 복종하고 사는 이들과 그걸 용인하는 문화가 '양비론' '화해론' '정치보복 불가론' 같은 언어를 불러오고 있는 건 아닐까.

*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