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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의 운명과 사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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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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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판사들은 이 뉴스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환호하거나 우려하거나 또는 애써 중립인 체하면서도 결과를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혹시라도 자신들이 워터게이트 사건을 재판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지혜의 아홉 기둥>은 워터게이트 사건을 특종한 밥 우드워드가 1979년에 쓴 미국 연방대법원 판사들에 대한 책이다. 이 책은 워터게이트 청문회 뉴스가 언론을 도배하던 1973년 7월, 미국 판사들의 모습을 이렇게 기술했다. '이게 어떤 식으로 연방대법원에 오려나.' 한 대법관은 재판연구원들을 모아놓고 이런저런 가상 시나리오를 작성해 놓고 있었다.

지금 한국의 판사들도 최순실 게이트에 관한 뉴스들을 유심히 볼 거다. 이 사건 관련자의 구속영장을 심사할지도 모르는 서울중앙지법 판사들도 그럴 거고, 지난 12일 율곡로, 사직로의 집회를 사상 처음으로 허용한 서울행정법원 재판부의 판사들도 그랬을 거다. 뉴스를 열심히 보지 않았다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평화적인 집회를 할 거라는 확신을 갖기 힘들었을 거다.

율곡로, 사직로 집회 금지에 대해 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을 낸 참여연대 쪽은, 투쟁본부가 가처분 신청을 내기로 결정하기까지 자체 논의를 길게 거친 것 같다고 전했다. 집회나 시위의 금단의 땅이 돼버린 이 길에 시위를 허용해 달라고 했다가 거부당하면 집회 분위기가 미리부터 경색되지 않을까 걱정했을 거다. 여하튼 법원은 허용했고 막상 12일 저녁, 사직로 12차선 대로를 메우고 촛불 인파가 행진할 때 울컥했다. '그렇지. 사법부는 청와대와 다르지. 삼권분립!' 우리가 누릴 수 있는 민주주의는 우리가 아는 것보다 아직도 훨씬 많구나.

워터게이트 사건 뒤 닉슨이 퇴진하기까지 미국 사법부가 한 역할이 적지 않았다. 관계자들의 재판에서, 이 사건 모의와 처리 과정이 녹음된 테이프가 백악관에 보관돼 있음이 밝혀졌다. 법원은 특별검사가 요구한 테이프 전부를 제출하라고 백악관에 명령했는데, 닉슨은 국가안보 등을 내세워 제출할 테이프를 결정할 권리가 대통령에게 있다며 법원 명령에 항고했다. 그랬더니 특별검사가 연방대법원에 비상상고를 했다. 시간을 단축하자는 거였다.

연방대법원 판사 9명 중 대법원장 포함한 4명이 닉슨이 임명한 사람이었다. 백악관은 대법원에 성급한 판단으로 오점을 남기지 말아 달라고 했다. 비상상고를 기각하고 시간을 끌어달라는 얘기다. 그러나 대법원은 비상상고를 받아들임과 아울러, 비상상고에 대한 결정에서 전원일치로 테이프 제출을 명령했다. '국가안보 등을 이유로 한 대통령의 결정권' 같은 건 일체 인용하지 않았다. 이런 사법부의 단호한 태도를 본 닉슨은 17일 뒤 사임했다.

미국의 연방대법원이 한국으로 치면 헌법재판소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거취와 관련해 탄핵 이야기가 나온다. 국회에서 탄핵이 의결되면 헌법재판소에서 최종 결정을 내리게 된다. 그러니 헌법재판소 재판관들도 뉴스를 열심히 볼 거다. 그동안 헌재가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건에서 시간을 끌거나, '나쁘지만 (헌법재판관의) 의결정족수가 모자라 금지하지 못한다'는 식의 단호하지 못한 결정을 내리는 걸 몇 차례 봤다.

하야든 2선 후퇴든 박 대통령이 뭔가를 결정하지 않는 한, 탄핵 소리는 더 커질 거다. 아직 먼 일일지 모르겠지만 광화문 집회가 (헌재가 있는) '가회동 집회'로 바뀌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2003년 헌법재판소가 내린 주옥같은 결정문이 있다. "다른 법익의 보호를 위하여 정당화되지 않는 한, 집회 장소를 항의의 대상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을 금지한다."

*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