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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에어컨 구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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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R CONDITIONER
shutterst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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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 전 어머니가 이사를 하셨다. 에어컨을 사야 하는데, '동네에 산이 많아 시원하니 에어컨 없어도 된다'는 어머니 말씀도 있고 해서 차일피일 뭉갰다. 날씨가 더워지기 시작하는데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 대형 마트에 갔다. 잘 나가는 신상품 에어컨 가격을 알아보고 인터넷몰에 올라온 가격과 비교해봤다. 역시 인터넷이 훨씬 쌌다.

쇼핑 같은 것 거의 안 하고 살던 내가, 최근에 인터넷으로 몇 가지 사보고 만족했던 게 화근이었다. '인터넷몰도 믿을 만해.' 인터넷으로 주문을 했다. 언제 설치가 가능한지 이틀 안에 연락을 준다고 안내문에 나와 있었는데, 열흘이 되도록 연락이 안 왔다. 그 열흘 사이에 폭염이 덮쳤다. 화가 제법 난 상태에서 인터넷 페이지에 게시된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물건 받아 설치하는 업체였다. 답을 들으니 화가 더 났다. 그 상품은 한 달 전에 품절돼, 진열품에서 빼달라고 인터넷몰에 얘기했는데 빼질 않았다는 것이다. '그럼 물건이 없다는 얘기냐' '그렇다' '주문한 지 일주일이 넘었는데 왜 연락 안 했냐' '우리는 배달하는 곳이어서 연락드릴 전화번호를 제대로 받지 못했다'.... 더 따져봤자 소용없는 일.

인터넷몰에 전화했다. 알아보고 연락 주겠다고 해놓고 연락이 오지 않았다. 다시 전화를 걸었고, 내 언성이 자꾸 높아졌다. '전화 받는 직원에 불과하다, 화내지 말자, 진상 되지 말자.' 전화 끊고 기다렸다. 다음날, 담당 직원이 사과를 하면서 물건이 없으니 주문을 취소해 달라고 했다. 물건 떨어졌다는 연락을 언제 받았느냐고 물었다. 인터넷몰 담당 직원의 대답은 배달 업체와 달랐다. 내가 주문하기 하루 전이었다고 했다. 더 따져봤자 뭐하겠나. 소비자원에 전화했더니, 주문을 취소하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했다.

'상품이 떨어졌는데도 인터넷 페이지에 진열해놓고 주문받고 며칠 지나 항의가 들어오면 주문 취소하라고 한다? 고가의 에어컨을 수백, 수천대씩 그렇게 주문받으면 취소할 때까지라도 돈이 고이는 거 아냐? 카드로 하니까 돈이 고이지는 않나?' 더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처음에 갔던 대형 마트로 전화했다. 같은 제품 가격이 그새 10% 가까이 올라 있었다. 그래도 살 수밖에. 밤이 늦어 다음날 갔더니 전날 전화로 물어본 것보다 값이 비쌌다. 화요일부터 주말 가격 아닌 주중 가격이 적용돼 더 비싸다고 했다.

또 화가 났다. '그럼 왜 어제 그런 말을 하지 않았냐. 말하면 어제 바로 와서 샀을 텐데.' '그럼 지금 주중 가격에 결제하고 주말에 할인 가격으로 재결제를 할 수 있게 하겠다.' '주말에 또 오라는 얘기냐' 하고 말하려다 참았다. '진상 되지 말자. 아쉬운 건 나다.' 가격 문제는 그렇게 해결했는데, 에어컨이 동이 나서 배달이 최대 일주일까지 늦어질 수 있다고 했다. 어느새 내 어투가 사정조가 됐다. "최대한 빨리 좀 부탁드립니다." 처음에 여기서 샀으면 더 싼 가격에 벌써 에어컨을 집에 들여놓았을 텐데.

마트를 나오면서 '싼 게 비지떡'이라는 말이 생각났다. '인생 공짜 없다'는 말도 떠올랐다. 내가 공짜 바라다가 돈과 시간을 허비해버린 미련한 구두쇠 같았다. 알뜰한 소비자가 되려고 한 것뿐인데, 소비자 권리를 포기하지 않는 민주 소비자를 지향하는 건데, 미련한 놈에 진상까지 될 뻔했다. '알뜰 소비'와 '공짜 좋아하는 마음'의, '민주소비자'와 '진상'의 경계선이 어딜까.

다행히 에어컨이 주문하고 이틀 지나 어머니 집에 왔다. 에어컨 바람 쐬면서 생각했다. 좋은 소비자와 진상의 경계선? 빨리 잊어버리자.

*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