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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적 남성성 또는 그 찌질함의 본성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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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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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회는 생존 체제이자 동시에 지배 체제이다. 아니 생존 속에 지배가 있고 지배 속에 생존이 있다고 할 수 있다. 홉스가 말하는 국가도 폭력을 독점하는 대신에 민중을 살도록 해주는 체제인 것이다. 그러므로 폭력만을 독점하고 민중을 살도록 해주지 못하는 체제는 국가의 자격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한국의 국가는 여기에 가깝다.

사실 이러한 전통은 유구하다. 멀리는 고려 후기부터 조선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구한말, 한국전쟁에 이르기까지 국가는 민중을 지켜주지 못했으며, 평소에 큰소리 치던 지배층은 전쟁이 일어나면 먼저 도망을 갔다. 그래서 관군은 달아나고 백성이 맨몸으로 자신을 지켜내어야 했던 의병은 자랑스럽기는커녕 부끄러워 해야 할 역사인 것이다.

서양의 귀족계급은 호전적인 기사집단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그들은 비록 무식했지만 집단을 지배하는 대신에 보호했다. 일본의 사무라이들도 민중을 지배하면서 보호하는 역할을 했다. 남대문시장의 양아치들도 상인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자릿세를 뜯는다, 그 정당성은 차치하고서라도. 이런 점에서 지배계급과 민중의 관계는 불평등하지만 기본적으로는 교환관계이다. 그것은 지배하면서 살려주고 지배당하면서 살아가는 관계인 것이다. 가라타니 고진은 이것을 호수성(互酬性), 즉 일종의 교환양식이라고 부른다.

그러면 과연 우리가 자랑스러워 하는 조선의 교양 있는 사대부 문인계급의 지배는 저 야만스러운 서양과 일본의 무인계급 지배보다 우월한 것이었던가. 조선의 지배계급은 민중을 지배하되 생존하도록 해주었던가. 조선, 그리고 가까운 한국의 역사를 보면 이들은 한결같이 공동체의 보호라는 책임은 지지 않으면서 민중을 착쥐하기만 하는 집단에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오늘날에도 변하지 않고 마찬가지이다. 전쟁이 일어나면 적나라하게 드러날 것이다.

그러면 한국 민중은 왜 이러한 지배집단을 용인 또는 수용하는가. 문제는 이것이다. 이러한 한국 지배집단의 특성은 정작 바깥에서는 무능하고 아무 말도 못하면서 술 먹고 들어오면 마누라, 자식을 두들겨 패는 못난 아버지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한국 지배집단의 남성성이 서양이나 일본의 남성성과 차별화되는 지점이다. 그래서 한국의 남성성은 공격적 상징으로서의 남근을 가진 마초도 못되는, 거세된 남성성이다. 이것이야말로 찌질한 남성성에 다름아니다.

나는 한국 지배집단과 그들이 유포하는 민족주의의 맨얼굴이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피지배집단인 민중과 여성은 여기에 동조해서는 안된다. 한국 민족주의에 말려드는 것이야말로 한국적 남성성의 찌질함에 기만당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 이 글은 필자의 페이스북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