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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속성의 부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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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함께 공부하던 여자 선배가 이런 말을 했었다. "학교에서 조회 같은 것 할 때 줄지어 서있으면 갑자기 웃음이 터져나왔어. 그런 분위기가 너무 이상해서 말이야." 그래, 그게 무슨 말인지 알지. 몇 년 전 휴전선 근처 전망대에 가본 적이 있는데, 나는 그 비현실적인 현실 풍경이 너무나 어이 없이 느껴져서 속으로 웃음이 터져나온 적이 있다. 고작 이 따위가 우리 삶을 그렇게 짓누르고 있단 말인가, 정녕 고작 이 따위가...

그런데, 그런데 말이야. 나는 그 여자 선배가 말한 그런 풍경에서 웃음이 터져나오기보다는 오히려 그런 엄숙함을 즐기는 편이라고 할까.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의식(儀式)을 좋아한다. 국군의 날에 군인들이 행진하는 것을 보면 가슴이 뭉클해지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난다.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거나 들어도 어김없이 눈물이 주르륵 흐른다. 내가 너무 감정적인 것일까. 물론 앞에서도 말했다시피 그 여자 선배가 말한 느낌이 무엇인지, 나도 안다. 그 엄숙한 척하는 행사의 허구성, 싸구려 연극성, 사르트르가 말한, 연극 무대 뒤편이 갑자기 무너졌을 때 드러나는 현실의 부조리함... 그런 것들이 가져다주는 희극성.

나도 그런 것들을 안다. 하지만, 하지만 말이야. 나는 많은 경우에 그런 풍경에서 부조리함보다는 어떤 결핍을 느낄 때가 더 많다. 나는 학교 조회든 군대 제식이든 대통령 취임식이든 간에 한국 사회에서 목도하는 각종 의례들에서, 그런 연극성이 보여주는 희극성보다는 오히려 학예회 수준의 유치함, 엉성한 형식, 제대로 된 권위와 엄숙함의 부재 같은 것이 더 우습게 여겨진다. 나는 인간 세상의 연극성이 갖는 부조리함보다는 제대로 된 연극성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한국 사회의 무능력이 더 불만스럽다. 어차피 인생은 연극이고 세상은 무대인데.

나는 전체주의자인 것일까. 아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을 더 높은 존재에 귀속시키고자 하는 욕망이 있다. 내가 비록 한국 사회의 집단주의를 비판하곤 하지만, 그것이 인간의 집단에의 귀속 욕망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대상과 과정과 방법의 정당성, 좀더 정확하게는 품격을 요청하는 것이다.

나는 결코 원자론적 개인주의자가 아니다. 나는 나를 나보다 더 큰 것에 귀속시키고자 하는 강한 욕망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공동체이기도 하고 숭고한 이념이기도 하고 사랑, 신 또는 우주이기도 하다. 이것은 긍정적 의미에서의 자아 극복이며, 존재의 고양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나는 한국 사회에서 그럴 만한 대상을 거의 발견할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곤혹스러운 것이다. 내가 보기에는 학교, 기업, 군대, 교회, 국가 등 한국 사회의 어떠한 조직도 그럴 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어 보이지 않는다. 그것들은 모두 엉터리 권위를 내세우고 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한국 사회에는 제대로 된 의미에서의 귀속성이 부재하다.

나는 조회 시간이 지루하지 않다. 웃기지도 않다. 다만 무의미할 뿐이다. 내게는 나를 투척할 만한 가치가 있는 좀더 숭고한 대상이 필요하다. 그 여자 선배의 말이 귓가에 맴돈다. 그래요, 그래, 그게 무슨 말인지 알아요, 하지만 말이죠.

* 이 글은 필자의 페이스북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