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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뚜기 한국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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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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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철 출입문 기둥 옆자리에 앉았던 사람이 일어난다. 옆에 앉았던 사람이 잽싸게 그 자리로 옮긴다. 심지어 좌석열 이쪽 저쪽에서도 조금만 널찍하고 편해보이는 자리가 눈에 띄면 사람들은 어김없이 자리를 옮긴다. 왜 이렇게 사람들은 전철 속에서 메뚜기처럼 뛰어다니는 것일까. 조금이라도 좋아보이는 것이 있으면 체면이고 염치고 차릴 필요 없이 즉각 행동에 옮기는 것이 한국인들의 윤리강령인 것일까.

하긴 예전처럼 출입문에 들어서자마자 빈 자리를 향해서 가방을 냅다 집어 던지는 아줌마들은 사라진 것 같다. 하지만 여전히 한국인들은 전철 속에서 가만있지 못하고 너무도 분주하다. 전철 칸 사이를 오가는 사람들도 많다. 조금이라도 좋은 위치를 점유하기 위해서이겠지. 한마디로 한국의 전철 안은 분자운동이 너무 왕성하다. 왜 이러는 것일까.

왜들 모두 자기가 탄 위치, 앉은 자리에 가만있지를 못하는 것일까. 나는 전철 플랫폼의 승강지점마다 번호가 있다는 사실을 안 것도 오래되지 않는다. 나는 가장 가까운 승강지점과 내릴 지점들을 계산하고 타는 법이 없다. 그냥 아무 위치에서나 타고 내린다. 출입구가 멀면 조금 더 걸으면 된다. 그런 것을 계산하고 산다는 것 자체가 나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물론 촌각을 다투는 출근 시간의 직장인들에게는 한발자국 간격이 중요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내가 모르고 하는 소리일 수도 있다. 이것만은 내가 그들과 처지가 달라서 그런 것이라고 치자.

전철은 한 사회의 축도이다. 해외여행을 많이 해보지는 못했지만, 내가 다녀본 몇몇 해외도시의 전철에서 한국과 같은 풍경을 본 적이 없다. 도쿄, 파리, 타이베이의 지하철에는 승객들의 분자운동 같은 것을 전혀 볼 수 없다. 그들은 승차한 위치, 앉은 자리에서 이동하는 법이 없다. 좌석을 찾아 두리번거리거나 이 자리, 저 자리를 옮겨다니지 않는다. 도쿄, 파리, 타이베이 전철의 승객들은 차분했고 예의 바르게 보였다.

대체로 그곳의 승객들은 타인과 시선을 피하면서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는 듯했다. 한국의 전철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좁고 불편한 파리의 지하철 속에서 동양인인 나를 의식하면서도 무심한 척하는 파리지엥/지엔들의 시선을 속으로만 느끼며 재미있게 생각했었다. 적어도 우리처럼 노골적으로 쳐다보거나 두리번거리는 시선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전철 속에서 끊임없이 움직이고 자리를 옮겨다니는 한국인들을 볼 때마다, 조금이라도 나은 곳,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발버둥치는 한국 사회의 초상을 보는 듯하여 씁쓸하다. 왜 다른 사람이 자신보다 조금이라도 더 좋은 자리를 차지하는 꼴을 보지 못하는 것일까. 타인을 동료 시민이자 이웃으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을 무조건 밟고 넘어서야 하고 빈틈이 보이면 재빨리 차지하는 것이 최고라는 가치관이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시설이나 시스템에서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한다는 한국의 전철이지만, 그 속을 채우고 있는 인간들의 행동은 메뚜기 떼와 다르지 않으니 이야말로 한국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 이 글은 필자의 페이스북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