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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르〉의 근대적 주체, 그들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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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니 픽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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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엘르>에서 여주인공(이자벨 위페르)은 어릴적 아버지가 이웃 주민들을 대상으로 저지른 살인극으로 인해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간다. 나름대로 상처를 극복하고 게임회사의 CEO로서 당당하게 살아가고자 하지만, 마음의 상처 때문인지, 친구의 남편과 불륜을 저지르고, 괴한으로부터도 강간을 당하지만, 그래도 침착하게(?) 대응한다.

그녀의 어머니, 즉 살인범인 아버지의 아내는 생뚱맞은 청년과 당당하게(?) 정을 통하다가 종종 그녀에게 들키고, 여주인공의 아들은 사랑하는 여자와 결합하지만, 그녀가 낳은 아이는 부모와 닮지 않은 흑인이다. 영화에서는 아이를 내려다보고 빙긋이 웃는 여주인공 아들의 흑인 친구가 실제 아버지일 것으로 암시된다. 아들과 갈등하는 가운데 여주인공은 아들에게 저 아이는 네 아이가 아니라고 말한다. 하지만 아들은 자기가 사랑하는 여자가 낳은 아이라서 그런지 자기 아이라고 주장한다.(프랑스식 속지주의?)

영화에는 꽤 많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여주인공과 그녀의 노모, 아들, 종신형을 받고 감옥에 갇혀 있는 그녀의 아버지, 여주인공의 전 남편, 그녀의 친구, 그녀와 바람피는 친구의 남편, 사내 인터넷에 음란한 애니메이션을 유포해 사장인 여주인공을 모욕하는 부하 직원, 그리고 나중에야 밝혀지는 그녀의 강간범인 이웃집 남자 등등...

이들의 관계는 얽히고설키면서 그다지 유쾌하지 않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행위만을 놓고 보면 불행하고 위선적이며 가학과 피학이 뒤엉켜 역겨운 느낌을 준다. 하지만 내가 이 영화에서 주목한 것은 이러한 행위보다도 오히려 그들 행위자에 대해서였다. 그러니까 이 영화에서 행위자들은 모두 개인적인 주체라는 것이다. 이들은 그 행위가 무엇이든 간에, 물론 행위에 따라서 그들은 사법적, 윤리적 책임을 지지만, 어디까지나 그들이 주체로서 행위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물론 그들은 나름대로 가혹한, 또는 벗어날 수 없는 운명에 갇혀 있기는 하다. 하지만 적어도 그들은 그들이 하지 않은 행위로 인해서 구속되지는 않는다. 여주인공은 끔찍한 살인마를 아버지로 두었고, 그로 인한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감옥에 갇힌 아버지에게 면회를 가라는 어머니의 종용을 배신하지만, 그러는 가운데 그녀가 접촉하는 경찰이나 사법관들로부터 어떠한 멸시도 받지 않는다. 물론 대부분 그녀 주변의 사람들은 그녀의 비참한 운명에 대해서 알지 못하지만, 그것을 알게 된 사람들이나 경찰들조차도 그녀를 철저히 프랑스 공민의 한 사람으로서 깍듯이 대우한다. 적어도 그녀는 그녀의 아버지와 권리적으로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

이 영화의 등장인물들은 그들의 행위로 인한 책임(배신, 모욕, 처벌 등)을 지지만, 그것이 그들의 개인적 존엄까지 침해하거나 부정하지는 않는다. 내가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바로 이 부분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내가 이제껏 본 프랑스 영화 중에서 가장 프랑스적인 영화였다(비록 감독은 네덜란드 사람이었지만).

나는 이 영화를 근대적 주체에 관한 텍스트로 받아들인다. 근대적 주체들도 다양한 삶을 경험하며 불행하거나 또는 행복한 삶을 살아간다. 하지만 그들은 적어도, 그들이 하지 않은 행위(아버지의 살인 등)로 인해 구속되지는 않는다. 그들은 오로지 그들이 한 행위로 인해서만 불행하거나 행복해진다. 나는 이것이야말로 근대적 주체의 요체라고 생각하며, 그래서 이 영화에서 주목할 것은 서사가 아니라 주체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를 본 주변 사람들은 한결같이 이 영화를 가리켜 사이코, 변태 영화라고 말한다. 서사를 기준으로 보면 그렇다. 하지만 나는 그 사이코, 변태들이 어떤 인간인가 하는 것이 흥미로웠다. 그래서 나는 이 영화야말로 집단주의적 주체인 한국인들이 죽었다 깨어나도 이해하기 힘든 영화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 이 글은 필자의 페이스북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