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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즈 트리〉 위반의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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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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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 앞 〈슈즈 트리〉가 명백히 실패한 공공미술임에도 불구하고, 자꾸 눈길이 가는 이유가 무엇인가 곰곰히 생각해봤는데, 그것은 이 작품이 미적 장(場)을 위반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판단이 들었다. 과연 이 작품이 국립현대미술관에 있었으면 이 만큼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있었을까. 단지 스캔들로 인한 대중의 관심만이 아니라, 현대미술의 이슈가 되기까지 한 그런 부분 말이다.

이 작품은 조형적 논리상 미술관 미술이라고 할 수 있는데, 공공장소로 뛰쳐나옴으로써 본의 아니게 공공미술이 된 것이다. 말하자면 이 작품은 미적 장을 위반함으로써 흉물 논란의 대상이 된 것이지만, 그런데 또 이게 나에게는 묘한 매력의 발화지점이기도 하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내가 이 작품에서 느끼는 감정은 이 작품이 저지른 미적 장의 위반이 가져다주는 반칙의 미학 때문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니까 나는 이 작품을 실패한 공공미술이자 성공한 현대미술로 보는 것이다.

이는 사실 현대 아방가르드 미술의 딜레마이기도 하다. 아방가르드는 현실과 예술의 분리라는 질서를 뒤흔들고자 하지만, 실제 현실에서 그러한 기획은 미술관이라는 금 그어진 공간 안에서만 허용되는 것이다. 아방가르드가 미술관 바깥을 나가면 그것은 폭동 아니면 혁명이 된다. 최소한 교통위반이라도 걸리게 된다. 반대로 아방가르드가 미술관에 갇히면 그것은 얌전하게 길들여진 짐승이 된다. 그것은 전복의 이빨이 빠진 채 던져주는 먹이를 삼키며 살아가는 동물원 동물 신세에 다름 아닌 것이다. 제아무리 강력한 언어를 내보이더라도 미술관 미술에서 좀처럼 매력을 느낄 수 없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동물원 동물에게서 야성의 매력을 느낄 수는 없는 법이니까 말이다.

미술관 바깥으로 뛰쳐나가는 것을 실천미술 또는 행동주의 미술이라고 부를 수 있다. 하지만 실천미술 또는 행동주의 미술이라고 모두 아방가르드가 되는 것은 아니다. 형식적으로만 보면 위안부 소녀상, 광화문 예술행동, 〈슈즈 트리〉는 모두 실천미술 또는 행동주의 미술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이 모두 아방가르드는 아니며, 동물원 우리를 뛰쳐나온 야생동물도 아니다. 개중에는 유기견도 있고 길냥이도 있다.

오늘날 동물원과 미술관은 야성과 인습을 가르는 장이라는 점에서 묘한 경계성을 공유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미술관 미술과 공공미술이라는 장의 경계를 뒤흔드는 것만이 오늘날 아방가르드에게 남겨진 마지막 카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슈즈 트리〉를 실패한 공공미술이자 성공한 현대미술로 보는 나의 도착도 바로 이 지점에서 연유하는 것은 아닐까. 위반과 일탈의 미학이 주는 저 피할 수 없는 쾌락 때문에 말이다.


* 이 글은 필자의 페이스북에 실린 글입니다.


관련 글 : 〈슈즈 트리〉는 흉물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