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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석 Headshot

화면 속 섹시한 그녀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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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야한 영화의 대명사처럼 여겨졌던 《나인 하프 위크》의 엘리자베스는 퇴폐적인 매력을 가진 주식중개인 존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존은 자극적인 게임을 원한다. 9와 2분의 1주 동안 그들은 위험하고 짜릿한 섹스를 한다. 존은 단지 게임을 원한다. 우리는 정말로 지루한 일상을 통과하고 있으며, 그렇기에 위험한 게임을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그 이상을 원한다. 단지 게임이 아니라 두 사람이 교감을 나누고, 이해하고, 사랑을 이루는 곳으로 나아가기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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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인 하프 위크》를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와 비교하면 흥미롭다.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에서 이름도 모른 채 빈 아파트에서 만나 섹스를 하던 잔느와 폴. 그렇게 몇 차례 익명의 섹스를 나누던 폴은 문득 그녀의 이름을 묻는다. 그녀가 누구인지 알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녀는 원하지 않는다. 그가 누구인지도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 위험한 게임 안에서, 철저히 자신을 익명으로 내던지고 싶다. 구체적인 남자로서 다가오려는 그에게서 도망치려는 잔느는 폴을 칼로 찌른다. 그렇다면 《나인 하프 위크》의 엘리자베스는 보수적인 걸까? 모든 사랑에는 전면적인 교류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기에?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개인차다. 엘리자베스는 존을 알고 싶다. 자극과 감각만으로 그를 만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모든 것을 알고 싶다. 다 알지는 못해도, 그 사람의 내면을 알고 싶다. 하지만 잔느는 원하지 않았다. 이미 그녀는 너무 많은 것을 그녀의 남자친구와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회적 외피를 모두 드러냈기 때문에 지금 이곳에서는 다른 것을 원한다. 빈 공간에서, 모르는 남자와 섹스를 하는 자신은 내가 아니다. 아니 진정한 나일 수도 있다. 그게 뭐가 중요한가. 지금 여기서 섹스를 하고 있는 내가 존재하고 있는데. 그렇기에 이 순간을 파괴하는 모든 것은 거부한다. 엘리자베스와 잔느는 다만 원하는 것이 다를 뿐이다. 그들이 살아온 과정이, 그들이 쌓아온 모든 것이 지금을 규정한다. 섹스도, 사랑도.

흔히 사랑과 죽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공포를 이겨내기 위하여 사랑에 빠져든다고도 하고, 죽음의 순간을 대리 경험하기 위해 섹스에 탐닉한다고도 한다. 뭐든 좋다. 자신에게 절실하기만 하다면, 어떻게든 무엇에든 넘어가도 괜찮다. 그래서 지금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해보지 않는 것보다는 하는 게 낫다고. 하고 나서 엄청나게, 죽고 싶을 만큼 후회할지라도 가보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사랑도, 섹스도 피하는 것보다는 해보는 것이 낫다고 믿는다. 나이가 들면 망설이게 되니까. 그다음 어귀가 보이니까 굳이 가보지 않게 되는 경우가 많아지니까.

* 이 글은 필자의 저서 <내 안의 음란마귀>의 내용 중 일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