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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히 일개 부처가 벌인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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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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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25일 고용노동부는 이른바 '양대 지침'을 폐기했다. 2016년 1월 박근혜 정부 고용노동부가 도입한 '공정인사 지침'과 '취업규칙 해석 및 운영에 관한 지침'(이하 취업규칙 지침)을 가리킨다. 이 두 지침은 박근혜 정부의 노동개혁 추진을 위한 핵심수단이었고, 노사정위원회 한국노총 탈퇴, 노동계 총파업 등 격렬한 사회갈등을 야기했다. 지난 대선 때 문재인 후보는 두 지침의 폐기를 공약했고 이를 실천한 것이다. 일단 다행한 일이다.

박근혜 정부 노동개혁의 핵심은 '더 쉬운 해고'였다. '공정인사 지침'은 기업이 '저성과자'로 지목한 노동자의 쉬운 해고를 가능하게 하기 위해, '취업규칙 지침'은 노동자에게 불리한 취업규칙을 기업이 자의적으로 개정할 수 있게 하려고 도입된 것이다. '지침' 도입 후 정부는 공기업·공공기관 등에 성과연봉제를 밀어붙였다. 정부기관이나 기업에 고용된 자의 입장에서 보면, 두 지침의 내용은 결코 동의하기 어려운 것이었고 강력한 저항이 뒤따랐다. 그런데 이른바 '양대 지침' 사건은 노동계의 격렬한 반발, 수백 건의 소송 등 사회갈등을 야기한 것 이외에 더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어 말해보려 한다.

감히 일개 행정부처가 '지침 따위'로 헌법과 법률을 무력화시킨 문제에 관한 것이다. '지침 따위'라는 표현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관공서의 '지침'이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가 아니다. 평범한 시민들은 헌법이나 법률 조항의 위력보다 일선 관공서의 규칙과 규제에 더 영향을 받으며 산다. 그럼에도 헌법과 법률이 중요한 이유는, 행정기관과 공무원들이 민주주의 원리를 넘어서서 시민의 권리를 제약하거나 월권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해주는 최후의 안전판이기 때문이다. 대통령, 총리, 장관들이 만들어내는 규칙이 헌법과 법률을 마음대로 넘어서는 것이 용인되는 순간, 우리의 정치체제는 더 이상 민주주의라고 부르기 어렵게 된다.

'공정인사 지침'은 근로기준법에 없는 기업의 자의적 해고를 감히 '지침'으로 허용하겠다는 위법한 내용을 담았다. '취업규칙 지침'은 노동자에게 불리한 취업규칙 변경에 관한 한 노조나 노동자 과반수의 동의를 얻도록 한 근로기준법을 무력화시킨 채 기업이 마음대로 변경할 수 있도록 허용한 것이다. 나아가 두 지침은 '근로의 내용과 조건을 민주주의 원칙에 따라 법률로 정'하도록 해놓은 헌법까지 위배했다. '민주주의 원칙에 따라 법률로 정'하라는 건 그만큼 중차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 다수자는 노동을 통해 생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는데, 이처럼 중차대한 문제가 또 있을까. 우리 헌법이 법률을 만들 권리를 부여한 기관은 단 한 곳, 국회다. 근로의 내용과 조건을 변경하려면 국회에 제안하고 심의를 거쳐 법률을 변경해야 했다. 그런데 박근혜 정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것은 그저 절차적인 문제일 뿐이다. 그러나 절차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이해하려면 히틀러를 떠올리는 것으로 충분하다. 히틀러(독재체제)는 의회와 갈등하지 않고도 정책을 좌지우지할 권한을 얻으면서 출발했다.'

2015년 영국 캐머런 정부가 법률이 아닌 행정명령으로 중요 정책을 추진하다가 의회에 의해 가로막혔을 때, 영국 신문 <가디언> 사설에 나온 구절을 인용한 것이다. 권력의 남용은 그들 개개인이 나빠서가 아니라 견제받지 않을 때 시작된다. 국회가, 언론이, 시민이 행정 권력을 견제할 수 있을 때 건강한 행정부도 가능해진다. 물론 사법 권력, 의회 권력도 마찬가지다.

*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된 글입니다.